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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을 닦아버리고 공경을 닦아내다

글/ 대련(大連) 대법제자

【정견망】

다년간 자신의 수련상태가 줄곧 한 층차 속에 머물면서 새로운 돌파가 없다고 느꼈다. 때로 남편(동수)과 교류했다. 우리는 애초 수련의 길을 찾으면서 수련에 관해 수많은 책들을 보았고 결국에는 마침내 대법을 발견했으며, 아울러 대법에 들어올 때의 목적도 아주 명확해서 바로 수련을 위함이었으며 그 어떤 다른 생각도 없었다. 박해가 발생한 후 여러 차례 마난과 고험을 거치면서도 지금껏 내심속의 확고함이 바뀐 적은 없었지만 왜 지금에 이르러, 걸으면 걸을수록 나태해지고 심성(心性) 역시 정체되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나는 오늘에 이르러 수련이 정체된 근본원인이 우리 내심 깊은 곳에서 지금껏 진정으로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에누리 없이 대법에 동화해야 한다’는 이런 일념(一念)을 발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수련을 생각하고 대법에 들어온 것과 무조건적으로 대법에 동화할 것을 발원(發願)하는 이 두 가지는, 한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근본적인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수련을 생각하고 속인 이 층차에서 뛰쳐나오려는 이것은 단지 개인의 한 가지 바람(願望)에 불과한데, 속인 이곳에서부터 말하자면 그래도 비교적 초탈한 것이다.

우리 역시 애초 이런 바람을 부합시키기 위해 대법에 걸어들어 왔지만, 자신의 생각에 부합한 것에서 걸어 들어와 이성적으로 대법이 무엇이며 사부님은 누구신지 대체 어떤 심태로 사부님과 대법을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또 개인수련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한 진수(真修)하는 대법제자로서 반드시 명확해야 하는 것이자 다시 말해 몹시 중요하고 엄숙한 한 가지 문제이다.

내가 막 천천히 이런 것들을 깨달아 나갈 때 자신도 모르게 한 동수가 일찍이 내게 사존의 대법상(大法像)을 준 일이 떠올랐다. 전에 우리가 살던 곳은 대법상을 걸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다른 곳에 방치해 두었는데 이렇게 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새 집으로 이사를 왔고 전문적으로 사부님과 대법 경서를 위해 작은 방을 비워두고 남편과 이 대법상을 모셔오려고 생각했다.

남편이 모셔온 사부님의 법상(法像)을 보니 법상이 말린 곳에 두터운 검은색 먼지들이 덮여 있었다. 나는 차마 열어보지 못하고 사부님 법상 주변을 살펴보았다. 전에 동수가 테이프로 벽에 부착했던 곳이 모두 아주 더러운 검은색으로 변했고 법상 테두리 역시 모두 파손되어 있었다.

나는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곧 법상 위에 달라붙은 먼지를 닦아냈는데 이건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테이프를 부착했던 곳은 아무리 문질러도 닦이지 않았는데 접착제 위에 두꺼운 때가 덮여 있었다. 신나나 여러 가지 용제를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런 완고하고 더러운 것이 바로 최근 내 마음속에 쌓인 그런 완고하고 더러운 때나 패물(敗物)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우리 지역에 이런 대법상과 파룬도상(法輪圖像)이 모두 십여 세트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불법으로 납치되고 판결을 받은 후 이 물건들 역시 모두 압수되었다. 나중에 어떤 동수가 이 한 세트의 소중한 법상과 파룬도형을 우리에게 주었는데 그야말로 대단한 신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사부님의 법상을 이 모양으로 보존했으니 지금의 내 심정은 정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이때 머릿속에서 한 마디 음성이 이렇게 물었다.

“네가 사부님의 제자인가? 너는 이 몇 년간 무엇을 했는가? 네가 어찌 사부님의 법상을 이 지경으로 보존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다, 사부님의 제자로서 나는 이 몇 년간 대체 무엇을 했는가? 이 또한 지금 현재 내 수련상태의 한 가지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최근 몇 년간 생활하거나 생계마저도 곤란했지만 제아무리 힘들지라도, 진정으로 사부님과 법을 제1위에 놓은 대법제자라면, 어찌 사부님의 법상이 이렇게 먼지를 뒤집어쓰도록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작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사부님 법상 앞에 무릎을 꿇고 양심의 가책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한바탕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부님의 법상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반드시 사부님의 법상을 깨끗이 청리하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기회를 한번 주십시오.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제가 방법을 찾아내 이 더러운 때를 말끔히 없애 버리겠습니다.”

나중에 다양한 시도를 하다가 나는 커터 칼날의 측면으로 살살 긁어내면 얼룩이 지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마침내 깨끗이 때를 제거할 희망을 찾아낸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무려 4시간에 걸쳐 마침내 4장의 큰 사진 주변에 있던 오래된 때들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또 파손된 테두리도 잘 수선했다. 이 4시간 동안 내 눈에서는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마치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끊임없이 사부님 법상 위로 뚝뚝 떨어졌는데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훔치고 또 훔쳐냈다.

나의 사상(思想) 역시 멈추지 않았고, 이 전체 세척 과정에서 나의 몸과 마음 역시 완전히 새롭게 세척되었다. 나는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나의 정념(正念)을 가지해주셨고 나로 하여금 다시금 사부님과 법에 대해 무한히 숭경(崇敬)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셨으며 나의 주원신(主元神)을 맹렬히 각성시켜 주셨음을 알았다.

나는 명백해졌다. 나는 주불(主佛)의 제자인제 제자란 무엇인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반드시 사부님의 말씀에 따르고, 사부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사부님께서 하시려는 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늘 사부님과 법을 제1위에 놓는 진수자(真修者)가 되어야 한다. 늘 자신의 필요와 생각을 제1위에 놓거나 심지어 개인의 욕망에 이끌려 내려놓지 못하고 속인의 생활에 깊이 미혹되어 탐닉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또 명백해졌다. 나는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아닌가,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애초 천상(天上)에서 한번 내려가면 더는 되돌아올 수 없는 거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창세주를 따라 세상에 내려가 정법하고 사람을 구하기로 엄숙하게 서원(誓願)을 발했고 천백 년을 전전하면서 마지막에 다행히 세간에 들어와 법을 얻어 지금에 이른 것인데 어찌하여 최후의 이 만고기연(萬古機緣)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또 명백해졌다. 내가 최근 몇 년간 겪었던 마난(魔難)은 모두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높은 표준으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하지 않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전부 내려놓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대법의 표준에 따라 하지 못해 조성된 것이다.

깊이 뿌리를 캐보니 진정으로 내려놓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한 것은 한 생명의 뼛속 오만과 방만 및 잘난 체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또 명백해졌다. 수련을 생각하는 것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대법에 동화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 이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이 지점에서 단호히 결심을 내리지 않는다면 근본적으로 자신의 근본 집착을 제거할 수 없는 것으로 다시 말해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하고 제고해서 원만으로 나아갈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따라 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그런 생명은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고 여전히 내가 이렇게 하는 것 역시 법을 원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사람은 모두 사부님의 친인(親人)이니 모두 구도해야 하지만, 사람의 관념에 집착하는 그런 생명은 트집을 잡는 눈빛으로 오히려 어떤 이들은 너무 나빠서 구도할 수 없다고 말한다.

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대법제자 서로의 연분을 소중히 여기고 안으로 찾는 것이다. 하지만 모순 속에서 사아(私我)가 건드려진 생명은 오히려 시종 내려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동수가 잘하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동수가 자신을 해친 각종 사정에 앙심을 품는데, 이렇게 앙심을 품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되돌아 올라갈 수 없는 가장 큰 장애이자 정체협력과 조사정법을 저애하는 요소가 됨을 모른다.

다섯 가지 공법을 단번에 해야 한다고 요구하면 나태한 그런 생명은 오히려 이틀이나 삼일에 한번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어쨌든 연공을 한 거라고 하면서 시종 개인의 안일함을 내려놓지 못하고 새벽연공도 하지 않는다.

진상을 알리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 생명은 오히려 고개를 흔들면서 그렇게 엄격하게 할 필요 없고 어느 정도만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

또 때로는 이렇게 하는 게 옳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또 이렇게 하면 분명히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제때 결단을 내리고 굳은 결심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아와 마성을 방임하면서 흐리멍덩하게 흐름을 따라간다.

나는 과거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두려움도 모르면서 놀기만 좋아하는 반항하는 어린 아이가 자신은 아주 총명하다고 여기면서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다가 결과적으로 넘어져서 피를 흘리고 팔다리가 부러진 후에야 결국 어렵게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많은 것을 감당하고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에게만 의지했다면 어찌 되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나는 또 생각한다. 나는 사부님의 위없는 자비 속에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만약 집착이 너무 무겁고 지은 업이 아주 컸다면 돌아올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수련이란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시간은 긴박하고 일단 잘못을 저지르면 더는 그 어떤 기회도 없을 것이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구도에 대해 어떻게 해야만 떳떳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사명에 떳떳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만 세계 중생의 희망과 기대에 대해 떳떳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사부님의 말씀에 따른다”는 이 한 구절의 말에는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오히려 무한한 내함(內涵)이 담겨 있다. 그것은 또 당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가 아니면 당신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 명백히 말하면 바로 당신이 자신의 표준에 따라 수련하는가 아니면 대법의 표준에 따라 수련하는가의 문제이다.

때로 그 생명은 여전히 몽폐되어 나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수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당신더러 그것이 대법 속에서 깨달은 그런 생각과 요구에 따라 하라고 하는 것으로 에누리 없이 대법에서 말한 표준에 따라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이렇다. 대법이 자신의 생각이나 요구에 부합하면 기꺼이 하지만 자신의 생각 또는 집착에 부합하지 않을 때면 설사 법리에서 이미 아주 명백히 말씀하셨다 해도 오히려 내려놓지 못하거나 또는 대치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심지어 각종 회피할 구실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면 비록 표면적으로는 역시 대법을 배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오히려 그 구우주(舊宇宙)의 ‘사아(私我)’를 남겨둔 것이다. 사아를 모조리 제거할 수 있는가, 대법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할 수 있는가 여부는 또한 한 진정한 정법시기 대법입자가 될 수 있는가 여부의 분수령이 된다. 그것을 넘어선다면 장차 본질적인 비약이 있을 것이다.

나는 사부님은 우주 최고 주(主)이시며 이번 우주 위난을 해결하고 구원하실 정법자(正法者)시기에 모든 생명은 마땅히 더 없이 공경하고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복종해야 하며 사존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일체 자아와 오만을 모조리 버리고 사존의 안배와 가르침에 따라야함을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나의 내심에서 사부님과 법에 대한 무상한 경앙(敬仰)이 일어난 후 나는 나의 사상세계 속에서 늘 나를 곤란하게 했던 그런 마성들, 즉 원망하고 분노하며 남을 깔보거나 난폭한 정서 등이 순식간에 다 사라진 것을 발견했고 오직 비할 바 없이 청정하고 상화함을 느꼈다. 동시에 우주 중이나 세계적으로 모든 만사만물에 대해 다 존중하는 마음(대법을 파괴하는 생명은 제외)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세주의 자비와 위엄(威嚴)의 조화임을 알기에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마저도 모두 소중히 여기고 연민하는 마음을 지녀야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동수(집안의 어린 제자를 포함)에 대해서도 더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분노하고 화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창세주(創世主)께서 친히 선택하신 제자들로 모두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조사정법(助師正法)하러 왔으며 또한 모두 사부님께서 직접 지옥 속에서 건져 올리셨기 때문이다.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게 없는 것으로 동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사부님의 선택을 의심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사부님께 불경한 것이다.

동수를 해치는 것은 마찬가지로 사부님을 해치는 것인데 왜냐하면 매 한 동수의 배후에는 모두 사부님의 무한한 감당과 심혈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수에게 화를 내면서 충돌하는 것 역시 사부님과 충돌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매 하나의 동수는 다 사부님 법신이 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이다.

생명의 특징이 다르니 마땅히 서로 소중히 여기고 상호 존중해야 하며 문제가 있다면 선의적으로 원용하고 소통해야 한다.

나는 또 주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도 더 이상 원망을 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부님의 고심한 배치에 녹아들어가 제자의 제고와 원만회귀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안으로 마음을 닦음은 근본이며 고난을 원망하는 것은 마치 사부님께 왜 이런 배치를 하셨느냐고 원망하는 것과 같다.

중생에 대해서도 더 이상 분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일찍이 사부님의 친인이었고 창세주와 우주대법이 육성한 생명이자 사부님께서 구도하려 하시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법리가 내 사상 속에서 나타난 후 나는 아주 깊이 진감(震撼)되었다. 그 며칠간 나는 줄곧 눈물을 흘렸으며 나는 사부님・대법・우주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구우주 생명의 그런 자아와 오만이 순식간에 완전히 와해되었다. 위대한 창세주 앞에서면 미미하고 보잘 것 없으며 더 이상 미미해질 수 없는 그런 생명이 아닌가! 오직 무상(無上)한 숭경(崇敬)과 경건함으로 창세주의 생성과 구도에 감사할 따름이다. 티끌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겸손함으로 창세주의 위덕을 우러러 바라보며 창세주께서 부여하신 모든 고통・아픔・슬픔・즐거움에 대해 감사히 여겨야 하는데 일체가 다 당신이 대법 속에서 동화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경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부님께 무릎을 꿇고 신체 표면뿐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더 보아야 하는데, 정말로 일체 교만과 자아를 내려놓고 경건하게 사부님 앞에 꿇어앉아야 한다. 이렇게 크고 용맹한 마음을 내어 사부님과 정법을 위해 일체를 버린다는 발원을 하고, 근본에서부터 자신이 줄곧 개변하려고 생각하지 않던 것까지 개변해야 하며, 더 이상 법에 있지 않은 사집(私執 사적인 집착)을 위한 구실을 찾지 말아야 하며, 온순하고 성실하며 착실하고 착실하게 사부님과 법의 요구에 따라 하고 따라서 닦아야 하며 조금의 남김도 없이 동화해야 한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