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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하신 사존과 대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글/ 미국 대법제자

【정견망】

사존과 동수들에게 제가 수련한 심득을 보고합니다.

1. 안으로 찾아 자신을 인식하다

약 4년 전 사존(師尊)의 자비하신 점화 속에 나는 진지하게 안으로 찾아 잘 제고해 올라가리라 결심했다.

자신에게 일을 하려는 마음, 과시심 및 자아 실증, 남이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등의 사람마음이 있음을 인식하고 이 방면에서 자신을 닦는데 주의를 기울이자 많은 마음을 내려놓은 느낌이 들었고 일부 일들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일에 봉착하면 우선 남을 생각할 수 있었고 동수의 장점을 볼 수 있었고 동수의 어려운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수가 잘하면 동수를 위해 기뻐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런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사람마음을 닦아 없앨 수 있었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나중에 아직도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전화진상 구원플랫폼에서 전화할 때 매번 전화가 잘 걸리면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리며 스스로에게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님께 달렸다”(《전법륜》)며 일체는 다 사부님의 가지(加持)를 떠날 수 없다고 일깨워주었다. 내가 한 이런 것들은 아직 사부님의 요구와는 차이가 아주 머니, 환희심이나 하늘의 공을 탐하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상황에서 사상 속에서 쉽게 관찰하기 어려운 자신이 괜찮다고 인정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가령, 교류할 때 내가 법리(法理)에 대한 일부 인식을 말했는데 동수가 찬동할 때면 자신이 깨달은 것이 괜찮다고 인정하는 염두가 나타난다. 이는 나로 하여금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했다.

자신이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은 자아(自我)를 실증하는 것으로 위사(爲私)한 것이다. 나는 이미 아주 진지하게 자신을 닦았는데 왜 닦아버려도 또 나오는가? 왜 나는 늘 닦아버리지 못하는가?

이렇게 다년간 수련하면서 나는 금생에 대법 속에서 수련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법에 동화할 수 있기를 얼마나 희망했는가!

사부님께서는 《2015년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과거의 수련인은 집착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했다. 당신들은, 거의 모든 집착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한 층 한 층 약화시키고, 약화시키고, 약화시키고, 약화시켜, 갈수록 더 약해지게 하고 갈수록 더 적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20여 년을 수련했으니, 많은 집착이 서서히 약화되어, 갈수록 줄어들어야 하며 마땅히 아주 적고 아주 적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수련하는 가운데 튀어나오는 것은 마치 아직도 아주 완고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집착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2. 대법에 동화하는 거대한 장애 : 자아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을 반성해보니 내가 ‘자아(自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발견했다. 수련 중에서 나는 수많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제거했지만 아직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자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늘 칭찬 속에서 성장했고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나는 인인지사(仁人志士)와 이상을 품고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을 존중하는데 바로 자신이 고상하고 지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여기면서 내가 추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겨왔다. 이 일체는 모두 자아를 긍정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다만 나 스스로 겸허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이것이 나의 ‘자아’로 하여금 분명히 표현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내 기억에 팔구 세 때 아주 두꺼운 소설을 끌어안고 한 권씩 읽었는데 당시에는 오직 중공 어용문인들이 선양하는 소위 ‘혁명영웅주의’ 책만 볼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은 인성(人性) 중에서 자사(自私)와 방자함을 포장하고 미화한 것으로 사당(邪黨)이 하늘과 싸우고 땅과 투쟁하는 도구를 배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후에 현실의 사악이 나로 하여금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을 믿지 않게 했지만 당문화의 독해는 여전히 존재했다. 동시에 내가 그런 환경 속에서 공산당을 똑똑히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자신을 믿고 이기적으로 되었다.

수련 중에서 표면적인 좋지 않은 집착은 아주 빨리 인식하고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인간세상의 정의와 아름다움의 추구가 가린 자아는 내가 인식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이 ‘자아’는 나를 자신에 대한 정속에 빠지게 했다. 일을 잘할 때면 자신이 자랑스럽고 자신을 중시하게 된다. 일을 잘하지 못할 때는 자신을 자책(自責)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처음에 이런 자책은 내게 자신이 아주 정진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수련에 대한 나의 신심(信心)에 타격을 주었다. 수련 중에서 자신을 중시한다면 진정으로 안으로 찾을 수 없고 겸손하고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무조건적으로 대법에 동화할 수 없으며 자신과 사존 및 대법과의 관계를 바로 잡을 수 없다.

사존께서는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정진요지》〈불성무루〉)라고 말씀하셨다.

전에 이 단락을 공부하면서 내가 이해한 것은 단지 자신의 자사자리(自私自利)한 사상・행동 및 좋지 않은 것을 닦아 없애고 타인을 위해 생각하는 사람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층차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라는 법의 또 다른 한층 함의에 주의하지 못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본성이 위아위사(爲我爲私)한 것이다! ‘나의 본성’에 담긴 함의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께 이 단락 법을 배울 때 ‘본성(本性)’이란 두 글자가 내 눈앞에 두드러져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본성이라고? 원래 나의 본성이 위아위사한 것이었구나!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나더러 보라고 점화해주신 것임을 안다. 기왕 나의 본성이 위아위사(爲我爲私)한 것이라면, 그럼 나는 위아위사를 닦아버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나의 본성을 개변해야만 한다. 속인 중에는 “강산은 변해도 사람의 본성은 바뀌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전에 내가 이해했던 것처럼 사람 표면의 자사자리(自私自利)한 생각과 행동을 제거하는 것이 수련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본성에서부터 자신을 개변해야만 하는데 바로 자신의 사상관념을 형성한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개변해야만 한다. 나는 안으로 찾는 것의 한 층 함의를 깨달았고 동시에 나는 또 왜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아야 하는지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사존께서 내 생명과 영혼을 다시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깨달았을 때 아주 많은 것들이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느꼈고 순식간에 심신이 가벼워졌다. 사존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때 나는 수련의 엄숙함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바로 착실하게 수련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제고해 올라와 법을 잘 배우고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으며, 정념으로 자신을 주도해 일사일념(一絲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을 모두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3. 사존과 함께한 날들을 소중히 여깁시다

자신의 수련과정을 돌아보면 매 한 걸음마다 사존께서 부지런히 대가를 치르신 것과 떼어놓을 수 없다.

내 기억에 박해 초기 대륙에 있을 때 나는 밖에 나가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실증하려고 생각했지만 또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나가지 못하면 마음속이 몹시 고통스러웠고 늘 집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는 게 죽느니만 못했다. 내가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 문을 나섰을 때 나는 문득 내가 혼자가 아님을 발견했는데 바로 사부님께서 내 옆에 서 계셨다. 갑자기 천지에 우뚝 서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속이 비할 바 없이 든든해졌다.

그때 이후 내가 어디를 가든 나는 늘 사부님 옆에 있었고 사부님께서는 그 잊을 수 없는 수많은 날들을 나와 함께 하셨다.

어느 한 단락 시기, 나로서는 넘기기 힘든 관을 만나 기분이 침체되었다. 어쩐 일인지 몰라도 나는 곧 사부님을 그리워했고 늘 사부님을 볼 수 있는 그런 동수들을 부러워했다. 이때 나는 사부님께서 바로 내 옆에 계신 것을 생각하지 못했으니 이미 사람마음으로 사부님을 대한 것이다. 바로 이때 나는 아주 선명한 꿈을 하나 꿨는데 바로 본문 처음에 언급한 사부님의 점화(點化)였다.

아주 커다란 원형의 방안에 있었는데 마치 뉴욕법회에서 보았던 그런 대형 실내체육관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체육관은 타원형이었고 또 계단이 있었지만 이곳은 원형이고 전체가 다 평면이었다. 큰 방 중심에 원형의 빈 땅[空地]이 있었는데 주위에 한 줄 한 줄 탁자가 배열되어 있었다. 탁자 앞에는 탁자보다 약 20cm 정도 더 높은 칸막이가 있었다.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탁자 뒷면에 앉아 바쁘게 움직였다. 큰 방 주변에는 또 아주 많은 문들이 있었는데 매 문마다 탁자를 관통해 방 중심과 통하는 통로가 있었다.

문밖에는 아주 많은 대법제자들이 밖에서 다니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방 중심 원형 빈 땅의 중간에 서계셨는데 표정이 엄숙하셨고 몇몇 동수들이 사부님과 함께 있었다. 꿈속에서 매 대법제자 모두 사부님 근처로 갈 수 있었는데 외부에 있던 대법제자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사부님 신변에는 오직 몇몇 대법제자들만 있었다. 나도 어느 한 탁자 뒷면에 있었는데 막 꿈에 들어갔을 때 나는 또 “나도 사부님 옆으로 갈 수 있겠다!”라는 약간 현실적인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탁자 옆이 바로 통로였기 때문에 내가 일어서기만 하면 아주 빨리 사부님 옆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나는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나는 바닥 카펫에 누워 칸막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부님 설법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또 잠시 후 나는 탁자 뒷면에의 그물모양 해먹을 당겨 해먹 위에 누워 사부님 쪽을 바라다보면서 한편으로 가급적 몸이 해먹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사부님을 볼 수 없게 했다. 나중에 나는 또 문 입구로 걸어갔는데 밖에서 걷는 동수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사부님이 이곳에 계시는데 당신들은 모르는가? 왜 들어오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잠시 후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후 나의 첫 반응은 바로 사부님께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시고 “네가 나를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네가 내 옆으로 걸어 오려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알려주셨다. 동시에 또 사부님께서는 엄숙하게 제자를 교화(敎化)하시는 것을 느꼈는데 사부님의 교화 중에는 아주 깊은 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넘쳤고 사부님께 정말 죄송하다고 느꼈다!

나는 자신이 전에 사부님 옆으로 걸어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나의 심성과 경계(境界)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안다.

나는 사부님께 “사존(師尊)이시여, 저는 반드시 당신 옆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이는 생명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원한 감사입니다!

사부님께서는 《대만법회에 보내는 축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만고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기라!
이 수련(修煉)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라!
당신들이 걸어온 길을 소중히 여기라!
사부는 최후에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사존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와 매 시각을 소중히 여깁시다!

이 문장을 통해 동수들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비평과 시정을 바란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합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73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