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남에게 환심 사기’는 일종 의도적인 거짓으로 이런 마음은 관찰이 쉽지 않으며 때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나는 최근 이 마음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생겼고 이 마음을 인식한 후 나는 좀 유감을 느꼈다. 어찌하여 20여 년을 수련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했단 말인가?
‘남에게 환심 사기’는 일종의 관념인데 나는 어떻게 이런 관념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어릴 때 집이 가난해서 늘 이웃집에 가서 물건을 빌려야 했다. 가령 호미나 괭이나 도끼나 톱 등등이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말을 할 때는 아랫사람처럼 공손해야 한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남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잘해야 어딜 가든 손해를 보지 않는단다.”라고 하셨다. 내 마음이 이에 반응해 남의 환심 사는 것을 빨리 배우자 어머니는 이렇게 나를 칭찬하셨다.
“너는 잘하는구나. 네 형이 빌려오지 못하는 것도 빌려오는 걸 보니.”
점차적으로 인간세상에 오염되었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직장에 들어간 후 나는 기관(機關)업무를 맡았는데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남의 비위를 못 맞추거나 아첨하지 않으면 정말 힘들고 난처했다. 다행히 나는 ‘기초’가 좀 있어서 흐름을 잘 따를 수 있었다. 내 기억에 한번은 과장이 내게 한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기관의 당 소조에서 ‘민주생활회의’를 여는데 당서기가 여러 사람들한테 강경한 태도로 의견을 제출하라면서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겼다.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고 속으로 ‘서기한테 무슨 의견을 내라고? 그런 배짱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라고 했다. 반나절 동안 아무도 말이 없자 서로 무안해졌다.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제가 서기님께 의견을 내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아주 엄숙한 표정이었다. 당시 모두들 깜짝 놀랐고 그가 걱정이 되어 손에 땀을 쥐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한 것이니 서기님께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서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 말해 봐요.”
“저는 서기님께 줄곧 한 가지 의견이 있었는데 왜 매일 그렇게 일찍 출근하시고 그렇게 늦게 퇴근하시는 겁니까? 때로는 심야까지 연장근무를 하시고 또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서기님의 몸은 개인의 몸이 아니라 모두들 위한 것으로 혁명의 밑천이고 직장에서 몇 천 명의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계속 이렇게 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 사람을 고려하셔야 하며 피로로 쓰러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아첨을 하는 게 아니라 서기님께서 정상적으로 출퇴근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이 아첨은 인정과 이치에 부합하고 또 무슨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는 진정한 아첨고수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기관 총무에 발탁되어 물자를 관리하는 실권을 쥐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평소 보고 듣는 중에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남이 나더러 ‘환심을 사려는 마음’이 있다고 지적했을 때 나는 오히려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업무 성과가 뛰어나고 일도 잘했기 때문인데 내가 어찌 무릎을 꿇고 남에게 비위를 맞추려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니 내게는 확실히 이런 마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무거웠다. 에를 들면 서로 만나 인사를 할 때 어른이나 상사, 동년배나 후배 등을 막론하고 모두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데, 때로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먼저 찾아가 안부를 묻는다. 만약 내가 먼저 인사를 하지 않으면 속으로 뭔가 불편했고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그럼 왜 나는 주동적인가? 그 배후에는 남의 환심을 사고 비위를 맞추려는 생명이 나를 지배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이다. 숨겨진 의미는 바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열정적이고 밝게 대하면 남 역시 나를 존경하고 나한테 잘한다는 것으로 이런 자아(自我)와 사(私)의 표현은 아주 은폐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처가집에서 매년 김장을 할 때가 되면 내가 늘 돈을 마련해서 “장모님 신경 쓰지 마세요. 비용은 제가 다 부담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사실 돈도 그리 많이 들어가지 않지만 영향은 꽤 크다.
매년 가족들이 단오절 쭝쯔(粽子)를 만들 때면 “삶은 달걀은 전부 내가 사겠습니다.”라고 한다. 왜 이렇게 하는가? 내 생각에 내가 한 사람의 일을 도와주면 한 사람이 기뻐하지만 모두의 일을 내가 하면 모두가 기뻐하고 나에게 감격하며 통이 크다고 할 것이다.
또 친척집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누가 입원하면 내가 나서서 운전을 해주거나 물건을 사다 주는데 남이 보기에 나는 아주 친절하고 인정이 많아 보인다. 물론 비위를 맞추는 것에도 요령이 있다. 때로는 일을 할 수 있어도 말하지 않고 비위를 맞출 수 있어도 하지 않아야 ‘고상(高尙)’하게 보이는데 그 배후는 사람마음이다.
때로 친구가 식사에 초대해서 같이 밥을 먹을 때도 본래 친구가 초대한 것이고 자리가 끝나지 않았어도 내가 몰래 계산을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여전히 남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설 기간에 친척집에 인사를 다닐 때도 일반적으로 선물 하나면 충분하지만 나는 2~3개를 사간다. 이유는 여전히 남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한번은 내가 친척 동수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 아내는 속인인데 전기 오토바이를 사려고 했다. 나는 “제가 사드릴 께요.”라고 하고는 2500위안을 주었다. 동수 아내는 크게 감동했다. 이런 환심 사기는 진짜 하나의 생명인데, 당시 내가 돈을 줄 때 뭔가 강렬한 충동이 있었고 입을 열자마자 왔는데 이는 그 생명이 에너지를 보충하자 기뻐한 것이다.
동수 아내가 감격할 때 나는 속으로 흐뭇했다. 남의 환심을 사려는 그 생명이 만족을 얻은 것이다. 동수 아내는 성격이 좋지 않아서 늘 동수를 함부로 대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그녀의 환심을 사서 나중에 동수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의도였다.
나중에 사부님께서 이렇게 해선 안 된다고 점화해주셨다. 나는 잘못임을 알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유위적이며 동수의 제고에 대해서도 무슨 좋은 점이 없었다. 남의 환심을 사려는 배후에는 또 체면을 차리는 마음, 유위적이고 명예를 구하며, 인색하지 않고 통이 크면서 의리가 있는 좋은 사람이라는 등의 남의 칭찬과 칭송을 들으려는 것으로 모두 자사(自私)와 사(私)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들이었다.
나의 이런 마음은 집에서도 두드러졌다. 가령 아내가 기분이 나쁘면 나는 곧 ‘청소를 깨끗하게 하지 않았나? 아니면 주방에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나?’ 생각해 다시 한 번 조사해본다. 거리에 나갔을 때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보면 집에 사와서는 “어때? 좋지?”라고 한다. 아내의 안색이 나빠 보이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청소를 깨끗이 하는데 ‘이렇게 하면 당신이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한다.
수련인은 주견(主見)을 닦아 내야 하는데 남의 환심을 사는 것이 주견인가? 신(神)이 남에게 비위를 맞출 수 있겠는가?
물론 사람이 교제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인사하고 서로 왕래하며 존중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며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수련인은 마땅히 사람마음을 닦아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순정(純淨)하게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현재 층차에서 작은 인식이니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73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