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우(真愚)
【정견망】
수련의 길에 구세력은 도처에 우리에게 함정(陷阱)을 설치해 놓았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곧 떨어져 들어가 우리가 수련하는 과정 중의 거대한 장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종래로 우리가 수련성취하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수련의 각도에 서서 보자면 함정은 의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위장되거나 은폐되고 또는 감춰진 누락이나 변이로 보인다. 수련이란 최종적으로 모든 누락이 없도록 닦아야만 원만할 수 있다. 수련자는 사람마다 모두 누락이 있는데 누락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수련과정이 바로 끊임없이 누락을 보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누락은 우리에게 있어 말하자면 위장되거나 은폐되거나 감춰져 있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봐도 알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함정이 된다. 이런 함정은 때로 우리 수련이 아주 크게 굽은 길을 가게 만들거나 곤두박질치게 하고 심지어 거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본문에서는 개인수련의 각도에서 개인수련 과정 중에서 본 일부 함정을 정리해 여러분들에게 참고로 제공하는 바이다.
(1)
우리는 모두 육체를 지닌 범태(凡胎)로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미혹된 환경 속에 봉폐되어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주의 진상을 보지 못하고 다른 공간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세상의 이치는 반대로 된 이치이며 바른 이치가 아니라고 알려주셨다.
우리가 생활하는 이 세계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함정과 같아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사유와 인지(認知)를 에워싸는데 만약 뛰쳐나오지 못한다면 그럼 우리는 평생 늘 ‘함정(阱 역주: 함정을 뜻하는 阱과 우물을 의미하는 井의 발음이 같다)’ 속에 앉아 하늘을 보는 것이다.
인류가 출생하면서부터 이 세계는 바로 인류에게 한 세트의 굳어진 사유방식과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을 준다. 이를 통해 인류로 하여금 오직 단편적으로만 문제를 보게 만들고 시종 오직 한 면에서만 문제를 볼 수 있게 만들어 밖으로 뛰쳐나와 전면적이고 전일(全息)하게 문제를 볼 수 없게 하며 사물의 전체 면모와 진상을 똑똑히 볼 수 없게 만든다.
이 우주에서 가장 저층이자 가장 표면적인 ‘물질’세계는 인류로 하여금 ‘현실’을 대단히 중시하게 만들고 오직 눈앞에 있는 표면물질만 중시하게 만들어 물질을 실질적으로 여기고 다른 층면의 것은 모두 보고도 못 본 것처럼 여기게 한다.
가령 ‘그물(網)’이란 이 물건을 보자. 우리가 한 장의 그물을 보는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이 종횡으로 교차된 무수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를 이용하여 물고기나 새우를 낚고 또는 새나 짐승 등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동물을 사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실질적인’ 한 면이고 ‘실용적인’ 한 면이지만 그것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만약 다른 면에서 본다면 그물은 또 무수한 구멍과 그물눈으로 구성된 것이라 공기나 물을 빠져나가게 하고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물을 빠져나가게 한다.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으며 공동으로 완전한 그물을 조성한다. 하지만 우리의 눈과 사유는 종종 오직 그것의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면에 국한되어 무의식중에 다른 면을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우리 이 세계는 상생상극(相生相克)의 이치 속에서 생성되고 발전된 것이다. 상생상극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그물과 같아서 우리 이 세계 속의 만사만물(萬事萬物)을 그물로 가둬둔다.
상생상극이란 이 거대한 그물 아래에서 만사만물은 모두 정반(正反)이 동시에 나타나며 한 몸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눈앞에 보이는 ‘실질적인’ 일면, 직접적으로 절실한 이익을 건드리는 일면만을 보고 동시에 배후에 존재하는 다른 면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못 본 체 한다.
(2)
말재간이 아주 뛰어난 한 동수가 있다. 사유도 민첩하고 논리력이 아주 강해서 일반인과 논쟁해도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으며 그는 종종 다른 사람을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학창 시절에 그는 이런 재능이 가져다준 좋은 점을 크게 누려왔고 스스로도 자신의 이런 능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이런 능력은 물론 좋은 일이며 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하는 항목에서 특별한 역할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속인 중에 형성된 이런 능력은 모두 상생상극 속에서 생성된 것으로 정반(正反)이 동시에 나온다. 그가 이 능력을 향수하는 동시에 또한 마찬가지로 부면적인 작용을 초래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어려서부터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으로 까다롭고 진지해서 남을 선(善)하게 대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람이 좀 각박해서 신변에 늘 각종 모순이 무겁고 화약 냄새가 진동(역주: 늘 남과 잘 싸운다는 의미)했다.
늘 신변의 모순 속에 빠지다보니 그는 자신의 각박과 불선(不善) 및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등의 방면 역시 의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치려고 생각해도 늘 고치지 못했다. 늘 문제의 근본을 건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속으로도 꽤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한 차례 비교적 큰 마난을 거치는 과정 속에서 그는 완전히 대법(大法)을 위해 자아(自我)를 내려놓았고 진심으로 안으로 찾았는데 자신의 이번 일생을 모두 되돌려 문제의 근원을 찾아보았다. 최후에 그는 이 문제의 근원이 바로 그가 일생 중에 줄곧 자부해왔고 또 자신에게 수많은 실용적이고 좋은 점을 가져다주었던 그 능력에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런 능력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장점을 누린 동시에 또 이 능력이 가져다주는 부면(負面) 작용을 감당해야 했다. 이것들은 줄곧 한 몸으로 동시에 존재해온 두 면이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눈앞에 보이는 자신에게 유리하고 실용적인 일면만 볼 수 있고 반대되는 일면은 보고도 못 본 척 한다. 이는 인류가 사물을 인지하는 국한성이 만들어낸 상생상극의 함정이다.
이 함정에서 뛰쳐나오려면 이런 능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능력을 대법 속에서 바로잡고 바르게 사용하면 그것의 누락을 보완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상생상극의 제약에서 뛰쳐나와 완전히 부면요소를 없앨 수 있다. 또 이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법속에서 바로잡은 후 완벽하고 강력하며 누락이 없도록 변모시킬 수 있다.
오직 문제의 근본을 찾아내야만 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근본 상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수많은 굽은 길을 적게 걸을 수 있다. 매번 안으로 찾고 문제의 근본을 찾아 그 뿌리를 움직일 때면 종종 신체 속에서 일종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진동(震動)을 느낄 수 있고 마음속으로 단번에 다 분명해진다. 이 뿌리를 정확히 찾지 못했을 때는 아마 한 무더기 집착하는 사람마음을 찾을 수는 있지만 몸과 마음이 진동하는 그런 느낌이 없을 것이다.
(3)
“‘진(眞)’ 속에 眞(쩐)・善(싼)・忍(런)이 들어있고, ‘선(善)’ 속에도 眞(쩐)・善(싼)・忍(런)이 들어있으며 ‘인(忍)’ 속에도 여전히 眞(쩐)・善(싼)・忍(런)이 들어있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대법은 누락이 없고 원용불파(圓容不破)한 것으로 진선인(真善忍)의 내함은 원용한 것이다. 우리는 다 수련인은 진선인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진선인 표준에 따라 해야 함을 알지만 종종 오직 단편적으로 한 면만을 보고 자신이 가늠하는 표준에 누락이 생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법에 있다고 오인하게 한다.
가령 모순충돌에 직면해서 우리는 참아야 함을 안다. 하지만 때로 우리가 참음 속에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망설임이나 체면 등 사람마음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런 참음은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참음 속에 누락이 있고 사람마음을 감추고 있다. 때문에 비록 참아냈지만 오히려 법속에 있지는 않다.
마귀굴에서 사악의 박해를 당할 때, 그런 극단적인 고압 환경 하에서 우리는 설사 악경(惡警)이나 포협(包夾) 등에 대해 선량해야 하고 참아야 함을 알지만 때로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선과 참음 속에는 두려운 마음과 공포가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이런 선(善)과 인(忍) 속에는 위엄이 없으며 도리어 나약함을 지니는데 이 때문에 충분한 에너지가 없어서 사악을 해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악을 방종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또 일부 아주 강경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을 수는 있지만 오히려 다른 면으로 가는데 바로 악인(惡人) 악행(惡行)에 대해 강력한 악이나 미움 등 마성을 낸다. 비록 정념이 아주 강하고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이 정념 속에는 누락이 있으며 발출한 것은 마성인 미움과 악이다. 때문에 마찬가지로 사악을 해체시킬 충분한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인식은 만약 선(善)과 인(忍) 속에 두려움이나 공포 등의 요소를 제거한다면 위엄을 구비할 수 있고, 또 후자의 정념 속에서 악과 미움 등의 마성을 제거할 수 있다면 둘을 하나로 합한 후에는 자비와 위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럼 일체 사악이 곧 해체될 것이며 박해도 지속할 수 없다.
상생상극 자체가 바로 하나의 거대한 누락이며 그것은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상생상극 이치 속에서 생겨난 함정인데 그 속에 빠지면 사람을 단편적으로 만들어 한 면에서만 문제를 보게 만들고, 사람이 한 면에서 다른 면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즉 한 함정에서 다른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4)
상생상극의 이치는 세간 만사만물의 정반 양면이 한 몸에서 나오게 만들고, 한 가지 일 속에서 정(正)의 일면의 요소가 있으면 또 부(負)의 일면의 요소가 있게 만든다. 하지만 속인은 늘 단지 절실한 이익에 직접 상처를 입히는 부(負)의 일면만을 중시하고 정(正)의 일면은 소홀히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부면 교훈만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인류사회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추락해왔고 아래로 내려가 최후에는 훼멸에 이르게 된다.
전체 인류사회는 모두 상생상극 속에 있으며 그 어떤 일이든 다 정반(正反)이 동시에 나오는데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렇게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종종 단지 역사 속에서 부면 교훈만을 받아들이고 정면 교훈은 무시한다. 이에 동일한 역사에서 서로 다른 사람에 따라 보는 역사는 다 다른데 이것이 바로 서로 다른 역사관이다.
가령 중공은 중화 5천년 역사 속에서 오직 폭력, 증오, 투쟁, 계급 등 변이된 요소만 보고 역사 속의 그런 정화적인 것들, 오천년 역사 속의 정면적이고 찬란하며 아름다운 그런 것들은 오히려 다 무시하거나 고의로 왜곡하고 뜯어고쳐 그것의 변이된 역사를 날조했으며 중화 정통문화를 훼멸하고 중국인의 사상을 변이시켰다. 그러므로 그것이 만들어낸 사극(史劇)을 보면 권력욕과 모략, 계급증오, 궁정투쟁, 아귀다툼 등 어둡고 음침하며 사악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정면적이고 찬란한 것은 거의 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중공이 중국인들에게 강제로 더한 변이된 사관이자 당문화(黨文化)이다. 그것은 오직 역사 속에서 그런 부면적인 요소만 보고 아울러 이런 부면적인 것을 무한히 과장하고 확대시켜 역사 속의 정면적이고 찬란한 요소에 대해서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무시하거나 삭제하고 심지어 고의로 뜯어고쳐 왜곡한다. 이에 중공이라는 이번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사악하고 변이되고 어두운 것을 만들어냈다.
정통 중화문화를 학습하고 역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어려서부터 강제도 더해진 당문화(黨文化) 사관을 깨끗이 제거해야 하지만 이런 기초는 심지어 아주 깊어서 사람의 사상 깊은 곳과 아주 미시적인 층면까지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의 표면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이런 것들이 다 하나하나 함정이 될 수 있고 특히 수련인에 대한 장애가 아주 클 수 있다.
인류는 사회생활 속에서 부면(負面)교훈의 사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보편적이다. 가령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줘도 다른 사람이 그에게 감격하지 않고 또 뒤에서 그를 좋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종종 부면교훈만을 받아들이고 곧 이 사람이 이렇게 나쁘고 배은망덕하다고 한다! 앞으로 더는 함부로 남을 돕지 말고 곳곳에서 조심하며 방비하고 번거로운 일을 줄여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부면교훈만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인류의 강렬한 자아와 자아보호를 조성했고 자신이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일에 부딪히면 고집스럽게 외부에서 원인을 찾게 만들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 급급해 자신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갈수록 더 교활하고 이기적이게 만들어 우주특성에서 갈수록 멀어지게 했다. 인류는 또 이런 역사 속에서 한걸음씩 추락한 것이다.
진수자(真修者)에게 있어, 우리는 정면적인 교훈을 받아들여 끊임없이 자신을 제고해야 하며 정면적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이는 내가 어디에서 잘못해서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그를 도운 목적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이기적인 요소를 숨긴 것은 아닌가? 그를 돕는 과정 중에 내가 너무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며 허영을 구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은 아닌가? 여기에는 반드시 나의 원인이 있고 반드시 내가 닦아야 할 부분이 있으며 바로 잡아야 할 사람마음이 있으니 나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해 자신을 잘 찾아보고 제고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정(正)과 반(反) 정반대의 두 가지 방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늘 부면(負面)교훈을 받아들이는데 습관이 되어 부면적으로 문제를 보게 되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추락해 갈수록 더 교활하고 복잡하며 어둡게 될 것이며 최후에 마도(魔道)로 들어가 훼멸될 것이다.
반대로 법에 입각해 정면교훈을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문제를 보아야지만 끊임없이 제고하고 끊임없이 법에서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부면적이고 부정적인 것을 조금씩 제거해 갈수록 더 광명하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고 최후에 대원만(大圓滿)에 이를 수 있다.
(5)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저층차의 이치로 고층차로 가는 수련을 지도하는 것 역시 일종의 함정이다. 그렇게 하면 표층 수련은 아주 매끄러울 수 있지만 심층(深層) 뿌리의 그런 것은 근본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도리어 장애가 된다.
우리 집은 비교적 전통적이라 어려서부터 속인의 도덕을 중시했다. 수련을 한 후에도 그랬는데 자신의 도덕이 일반인보다 높다고 여겼고 심지어 수련 중의 일을 늘 사람의 도덕으로 가늠하곤 했다.
전통사회 속에서 도덕이란 속인의 표준으로서 속인 이 한 층에서는 바른 이치이며,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오히려 고층차 수련으로 가는 장애가 된다. 만약 이를 의식하지 못하면 수련 중의 함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겸허(謙虛)는 속인의 도덕으로 겸손하고 단정한 사람을 말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겸허란 이 미덕을 중시해왔고 반대로 떠벌리거나 과시하고 방자하거나 오만한 사람을 몹시 미워했다. 하지만 겸허는 사람 표면의 단속에 불과할 뿐이고 이는 사람 표면의 언행을 단속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내심을 개변시키진 못한다. 다시 말해 아주 겸허한 사람이라도 그의 내심은 오히려 오만방자하고 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은폐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의 겸허 때문에 그의 내심의 오만방자함이 아주 깊이 감춰져 누구도 관찰할 수 없다.
나는 사람이나 일을 대함에 줄곧 자신을 단속하려고 노력해 왔고 가급적 부드럽게 해서 겸허의 표준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는 사실 한 가닥 강대한 오만방자함이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나의 표면적인 겸허 때문에 이 오만방자함을 표면에선 볼 수 없었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고 자신의 겸허가 나를 속이고 남도 속인 것이다. 나는 자신이 아주 겸허하다고 여겨왔기에 자신의 오만방자함을 인정할 방법이 없었으며 이것이 곧 하나의 거대한 장애가 되었다.
마치 다 썩어빠진 낡은 탁자와 같은데 그것의 표면을 아름답게 색칠해서 새롭게 단장하고 그리고 나서 먼지를 닦아내면 이때는 누구도 이것을 낡은 탁자라고 여기지 못할 것이다. 오직 표면의 예쁜 칠을 벗겨내야만 비로소 진상을 알 수 있고 근본을 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나는 곤두박질쳤고 아주 많은 고생을 겪었으며 최후에 법에서 자아를 완전히 버리고 극히 고통스럽게 뼈를 깎을 정도로 안으로 찾은 후에야 비로소 이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가장 표층 인류의 시공에서 우리의 눈은 단지 가장 표면적인 물질만 볼 수 있을 뿐이며 사물의 표상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실제적’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우리는 늘 표면에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실체’에 주의력을 집중하는데 이를 ‘진실’하다고 여기고 늘 외재적인 사물에서 원인을 찾으며 근본을 소홀히 한다.
이 때문에 또 다른 함정을 초래하는데 바로 표면물질 세계가 일으킨 집착심으로 표면물질에서 결론을 짓고 표면물질에 공력을 들이며 문제를 찾거나 심지어 표면물질을 표준으로 하여 덮어 감추며 착각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미식회(美食會)는 식욕(食慾)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때문에 사람의 관념 속에서 미식은 식욕의 집착과 결부된다. 하지만 미식과 식욕에 대한 집착이 같은 것은 아니다. 매일 먹는 것이 그런 산해진미라고 해서 꼭 식욕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며, 매일 먹는 소박한 나물이라고 해서 꼭 식욕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문제의 근본을 소홀히 하고 표면에만 공력을 들이게 된다.
어떤 수련인들은 늘 표면의 수련만 중시하고 표면을 아주 ‘매끄럽게’ 닦지만 이는 단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고 신(神)은 속일 수 없다. 근본을 닦지 않고 표면만 아름답게 닦아서는 오히려 자신에게 함정을 만들 수 있는데 자신의 누락을 모두 덮어 감춰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결국에는 헛되이 수련하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어떤 동수는 색심(色心)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남녀 사이에 미색(美色)에 대한 애모를 색심이라고 보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일부 의식하지 못하고 잠재적인 색심도 있다. 가령 예쁜 아기를 보면 좋아하고 한번 안아보거나 친해지고 싶어 하거나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으로 애모하면서 늘 보고 싶어 하고 냄새를 맡고 싶어 하는 등등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색(色)’이 가리키는 것이 그 사념(邪念)을 움직인 것을 가리키며 미색(美色) 자체는 아니라고 본다. 아름다운 사물을 좋아하되 단지 마음에 사념(私念)이 생기지 않고 순정(純淨)하다면 그럼 색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선념(善念)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생명의 고층에서 내원한 것으로 더욱 높을수록 더 아름답고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생명이 반본귀진(返本歸真)하려는 선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전제는 이 아름다움이 정통적인 아름다움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만약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을 모두 색으로 본다면 다 없애야 하는데 그럼 생명이 사는 것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념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움직인 것이 선념이며, 그럼 색심과 관련이 없다. 그러니 전면적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6)
구세력은 우리 수련의 길에 무수한 함정을 설치했지만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으로 찾는 법보(法寶)를 하사하셨다. 이는 구세력의 일체 함정을 타파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신기(神器)다. 하지만 만약 완전히 법에서 안으로 찾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찾지 못하며 법에서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고 안으로 찾지 못한다면 그럼 안으로 찾아도 누락이 나타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사람의 눈이 제아무리 예민해도 눈에 가까운 눈썹이나 코 및 뺨은 볼 수 없는데 이는 눈이 얼굴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아무리 심각하게 안으로 찾아도 만약 완전히 자아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집착을 지니고 안으로 찾는 것으로 영원히 근본을 찾을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어떤 물건을 손에 들고 그 물건을 찾는 것과 같은데 비록 수많은 문제들을 한보따리 찾아내도 모두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뿌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반드시 대량으로 법을 배우고 마음을 써서 법을 배워야 하며 아울러 완전히 자아를 내려놓고 대법을 위해 자아를 모조리 버려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법으로 찾을 수 있는데 그 어떤 물건이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일체 함정이 모습을 숨길 곳이 사라질 것이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정진요지 3》〈교란을 배제하자〉)
법(法) 속에서 ‘화안금정(火眼金睛)’을 연마해낼 수 있고 시시각각 대법을 위해 자아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그런 진수자(真修者)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이런 함정은 다 언급할 나위도 없는 것으로 너무나 간단하다. 함정이 함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모두 자아(自我)에 장애되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