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왜 법을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가?

글/ 중국 대법제자 소명(小明)

【정견망】

우리 이곳 몇몇 노동수(老同修)들은 현재 수련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상태에 있거나 심지어 신심을 잃고 의기소침해 있다. 원인은 《전법륜》을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늘 읽고 읽어도 인식 상에서 여전히 그러하며 진보하는 느낌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정황은 마치 개별적인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보편성을 지닌 것 같다.

나 역시 한때 이런 생각 때문에 아주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지만 나중에 생각을 고쳐 먹고 더는 새로운 수확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어떻게 착실히 수련할 것인가만 중시할 뿐이다. 지금 이를 써내어 동수들과 교류하고 공동으로 토론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의미”란 내가 보기에 대채로 《전법륜》을 읽은 후 곧장 또는 며칠이나 몇 달 후 원래 자신의 한 가지 집착심이 그곳에 있음을 발견하고 이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즉각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현재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춰진 집착심을 파낸 후 눈앞이 환해지면 일체가 모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 든다. 뜻밖에도 애초 자신이 그런 집착에 익숙해져 보지 못하고 아주 자연스럽다고 느꼈으며 아무리 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발견했으니 다시 말해 곧 새로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오성 문제를 말하자면, 이것은 수련과정 중에서 나타나는 각종 층차 또는 사부가 말한 어떤 것과 어떤 법, 그것에 대한 당신의 이해 정도를 가리킨다.”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곧 같은 일 속에서도 자신이 원래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집착심을 찾아내거나 또는 법을 읽는 과정 중에서 집착심을 발견하거나 또는 법을 읽고 나서 며칠 후 발견하거나 혹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마땅히 우리가 그 집착심을 알아야 할 때가 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 집착심을 발견하게 하는데 그것을 던져버리면 곧 새로운 천지를 발견하고 우리의 정진을 촉진한다. 아마 이런 것이 바로 새로운 의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의미를 알지만 오히려 이것이 새로운 의미인지 모르고 이를 너무 평범하게 넘긴 일로 여기거나 또는 어느 한 부분의 법을 배워서 알게 된 것인지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법을 배우다〉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당신은 수련 중에서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수련되어 올라온 것이다. 기억하라. 구함이 없어야만 스스로 얻게 된다.”

나를 예로 들자면, 지금 수련 초기에 명확하지 못했던 수많은 도리(道理)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다년간의 법공부와 곤두박질치는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알게 된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깨달음으로 그 노동수가 말한 것이 꼭 이런 정황이 아닐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정황이 있는데 점오(漸悟)상태의 동수에게 있어 그가 깨달은 ‘새로운 의미’는 앞에서 말한 도리상의 것만이 아니라 아울러 직접 보거나 응용한 신통(神通)이거나 일의 인과 관계 등인데 닫혀서 수련하는 그런 수련인들 보다 깨달은 것이 훨씬 더 풍부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수련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수련의 배치다. 이렇게 도를 깨닫는 것은 분명 ‘새로운 의미’의 체현이지만 그들은 반드시 정념(正念)으로 ‘신통(神通)과 인과(因果)’를 대해야 하며 만약 호기심으로 추구한다면, 가령 어느 부처는 모습이 어떠한지 또는 대체 어느 한 부처의 능력이 큰지 등을 알려고 한다면 이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점오, 이런 수련방법 역시 쉬운 것이 아니며, 공능이 나오면 어떤 사람들은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쉽사리 과시하며 좋지 않은 일을 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당신의 공은 떨어져야 하고, 당신의 수련은 헛되어 최후에는 망치고 만다.”

우리가 볼 수 있다시피 대법 수련에 대한 요구는 아주 엄격하고 또한 극히 엄숙한 것으로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을 지니면 성취될 수 없다. 우리가 점오인지 아니면 닫혀서 수련하는 지는 대각자(大覺者)의 각도에서 배치된 것으로 어떻게 하는 게 수련에 유리하고 정법에 유리한 지에 따라 그렇게 배치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관념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속인의 각도에서는 영원히 올바르게 생각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다른 법문의 누구도 보지 못하게 하고, 동문(同門) 중의 제자도 모두 보지 못하게 하기에 누구도 맞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일생은 개변된 것이며 수련의 일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닫혀서 수련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주 적어 여기서 멈춘다.

어떠한 수법(修法)이든 막론하고,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상관없이, 오로지 우리가 《전법륜》을 붙잡고 심성(心性)에 공력을 들이기만 한다면 일체는 다 바른 깨달음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3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