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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수련하는가?

글/ 육문(陸文)

【정견망】

매 대법제자마다 자신이 수련인임을 분명히 알지만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수련에 사용하는가? 우리 한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자.

출근하는 사람이라면 하루 8시간 일하고 6시간 잠자고 4시간 집안일(식사, 빨래, 청소, 가족 돌보기 등)을 하고 1시간은 출퇴근에 사용한다. 가끔 모임이나 활동도 해야 하니 1시간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은 고작 4시간뿐이다. 이 4시간 중에서 또 물도 마셔야 하고 화장실에도 가야하는데 그럼 겨우 3시간 남짓만 남는다. 만약 잠을 1시간 더 잔다면 그럼 남는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이다.

또 퇴직한 노인이라면 8시간 아이를 보고 6시간 잠을 자고 4시간 집안일을 하고 또 다른 활동에 1시간을 쓴다면 남는 시간은 역시 5시간이 못 된다. 이 5시간 중에서 진정으로 수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역시 4시간 남짓이다.

만약 하는 일도 없고 아이도 돌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시간에 여유가 있고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전업(專業)제자의 수련과 유사하다. 여기서는 이 부분 사람들의 시간 배분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다시 말해 하루가 비록 24시간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고 이중 수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적어서 때로는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다. 만약 그리 다그치지 않고 휘청거린다면 시간은 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황폐해질 것이다.

만약 장기간 시간을 다그쳐 수련하지 않으면 사람마음을 없앨 수 없고 정념이 강화되지 않을 것이며 수련은 갈수록 더 느슨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정체(整體)와 차이가 갈수록 커지고 정체에서 더 이탈하게 되는데 기러기는 혼자 날 수 없으니 대열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련이란 물을 거슬러 오르며 배를 젓는 것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한다. 우리가 시간을 낭비할 때면 사실 이미 정진과는 더욱 멀어진 것으로 수련에서 점차 멀리 떨어질 것이다.

내 주변에 직장인 동수가 하나 있는데 퇴근하면 또 화초를 키운다. 여기서 죽이지도 기르지도 말아야 한다는 문제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화초를 돌보려면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 한다. 또 어떤 동수는 드라마를 보고 핸드폰을 보는데 전자제품은 사람을 잘 끌어들이기 때문에 한번 보면 금방 한두 시간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시간은 지나갔고 마음도 어지러워진다.

사람의 시간과 정력은 모두 제한된 것이라 우리가 화초를 키우는데 20분을 투입한다면 수련에 20분을 덜 투입하게 된다. 하루에 20분이 많지 않은 것 같아도 1년이면 100여 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전법륜》을 10번은 볼 수 있다. 그럼 법 공부를 해서 법리(法理)를 잘 알고 집착을 타파할 수 있으며 정념을 강화시킬 수 있고, 법공부 때 “법이 사람을 연마”하면 우리는 곧 귀진(歸真)하고 귀정(歸正)할 수 있다.

하지만 화초를 키우거나 TV를 보는 것은 단지 속인의 마음과 속인의 정을 강화할 뿐 마음 닦고 욕심을 끊는 것과는 정반대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내가 매일 낭비하는 시간이 어찌 20분에 그치겠는가! 이렇게 수련과 무관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면서 우리가 만약 이를 경계하거나 끊지 못하면 수련인을 교란하고 파괴하거나 심지어 훼멸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상에서 어떻게 당신이 낭비한 이러한 시간을 당신에게 기재(記載)해 주겠는가?”(《각지설법 11》〈2010년 뉴욕법회설법〉)

또 어떤 동수는 법공부를 느슨히 하고 속인의 생활을 주업(主業)으로 삼으며 수련과 세 가지 일을 부업(副業)으로 여긴다. 그러면서 “시간이 있으면 많이 연마하고 시간이 없으면 적게 연마하는 이것은 법리가 아닌가?”라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생각해보라, 만약 하루에 매일 한 강의를 덜 읽는다면 1년이면 적어도 《전법륜》 40번을 덜 읽게 된다. 만약 근기와 오성이 완전히 동일한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한 달에 1번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은 일주일에 1번 책을 읽는다면 10년이면 그들의 경지와 층차가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는 바로 어디에 마음과 힘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 농민들은 흔히 “사람이 땅을 속이지 않으면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소박하면서도 또 아주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수련 중에서 시간과 정력을 적게 치른 게 쌓일수록, 법리가 더욱 분명해지지 않고, 집착이 점점 담담해지지 못하며, 집착을 담담히 내려놓는 것도 없고 관념의 전변도 없다면 그럼 한걸음에 관을 넘고 즉시 성불(成佛)할 수 있다면 이는 미친 사람의 망상이자 백일몽이 아니겠는가?

사실 우리가 수련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지 못할수록 교란이 더욱 많아지고 수련상태는 더욱 엉망이 될 것이다. 한 여자 동수는 퇴직한 후 수련보다는 돈벌이에 신경을 쓰면서 일하는 데만 많은 힘과 시간을 들였다. 결국 수련이 점점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갈수록 속인처럼 되었고 남을 욕하는 것도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또 한 70대 남자 동수는 근기가 좋고 오성도 아주 좋아서 사부님의 법리도 다 믿었고 다 이해했다. 수련 후 간염도 좋아졌다. 하지만 나중에 점차 게임에 빠져 책을 보는 게 줄어들었고 연공도 소홀해졌다. 원래 정해진 수명이 되었고 또 정진하지 못하자 그 역시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사부님께서는 “이것은 외계인의 기술인데 마(魔)가 그것을 이용하고 있고 당신을 유혹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빠져들게 한다. 당신의 생명을 낭비하고 있는데도 당신은 아직도 내려놓기 아쉬워한다! 사람의 각도에서 봐도 당신은 문제가 있는데, 하물며 수련임에랴.”(《2016년 뉴욕법회설법》)라고 하셨다.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다시피 제아무리 높은 층차로 수련했든 오직 시간을 다그쳐 수련하지만 않으면 속인생활의 미혹에 빠져 떨어져 내려간 이가 너무 많다.

자세히 생각해보고 법리(法理)로 대조해보면 우리 자신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수련에 다그치지 않고 소홀히 하고 느슨해질 때는 사실 바로 속인과 혼동한 것으로 다시 말해 속인이 된 것이다. 그럼 속인의 병업(病業)과 겁난(劫難)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찾아오고 빚을 받아갈 귀신이 부르지 않아도 찾아온다. 우리가 속인이 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도 아무 이유 없이 속인을 도와 소업해주실 수는 없다. 그럼 이 때 가장 기뻐하는 것은 바로 구세력의 마와 난귀(亂鬼)다. 수련이란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엄숙하게 대할 수 없다면 바로 수련에 대한 큰 불경이다.

“사람마다 모두 도를 얻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연마(煉)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여전히 당신이 수련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 보아야 하고, 또한 당신이 결심하고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 보아야 하는데, 사람마다 성불(成佛)한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전법륜》)

그렇다면 견지해 나갈 수 없다면 곧 수련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줄곧 수련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기라고 알려주셨고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하며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매 일 분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수련에 많이 쓴다면 수련의 기연을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겠는가! 이는 관심이 필요한 문제이며 우리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자 또한 구세력과 사마(邪魔)가 쉽게 빈틈을 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또 일부 동수들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이 방면에서 잘한 것을 보는데 귀감으로 삼고 배울 가치가 있다.

어떤 노동수는 몸이 아주 쇠약하지만 수련에는 아주 강인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자면 “밥은 굶을 수 있지만 세 가지 일은 반드시 제대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녀가 전심을 다해 수련하자 뱃속에 있던 종양이 사라졌고 다년간의 원한(怨恨)도 사라졌으며 담이 작고 두려움이 많던 데에서 정념이 충족해졌다. 매일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수련을 다그치는 것은 가장 좋은 정진이며 다시 말해 가장 빠른 승화이다.

또 어떤 동수는 차에 타면 《홍음》을 외우고 어떤 이는 출근 시간을 이용해 법을 공부하고 어떤 동수는 집안일을 하면서 교류문장을 듣는다. 또 어떤 동수는 매일 잠을 3~4시간만 자고 밥 먹고 잠자는 중에서 시간을 짜낸다.

고대에 기예(技藝)를 배울 때는 “쉴 새 없이 수련하여 숙달되도록 노력한다”고 했다. 또 독서인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이 알려준다”고 했다. 만약 사람이 반석처럼 굳건하고 정진하며 해이해지지 않는다면 그럼 신불(神佛)의 보우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꾸준히 도심(道心)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시방세계를 진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적인 이해로 우리의 생생세세는 바로 이번 생을 위한 것이고 이번 생은 바로 수련을 위한 것으로 우리는 법을 위해 온 생명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법을 위해 감당해야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세 가지 일을 주업으로 삼고 가장 중시해야 하며 가장 좋은 시간과 최고의 정력으로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시간을 절약하고 소중히 여긴다면 이것이 바로 기연을 소중히 여기고 수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고인은 “시간은 황금처럼 소중하고 황금을 팔아도 시간을 살 수는 없다”고 했다. 정법시기의 시간은 가장 소중한 것으로 돈으로는 비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직장에 출근하는 동수들은 매일 업무 외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에 불과하다. 만약 이 몇 시간을 다그치지 않는다면 수련은 곧 말로만 외치는 구호가 될 것이며 대법제자란 칭호는 허명과 허풍에 불과하고 중생구도는 빈말이나 농담처럼 될 것이다. 시간을 들이지 않고 정력을 쓰지 않으며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중생구도의 무거운 책임을 또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모든 생명에게 있어 하루는 모두 24시간으로 이는 하늘이 평등하고 공정하게 준 것이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배치하고 이용하며 시간을 배분할 것인가는 바로 매 사람 개인의 선택이다. 고층차의 수련은 바로 선택이다. 우리가 시간과 정력을 수련에 들이기로 선택했다면 그럼 신(神)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매일 속인의 생활을 선택한다면 그럼 속인을 선택한 것이다.

“창세(創世) 이래 이미 두 개 지구를 거쳤다. 이 억만년의 역사는, 바로 최후의 오늘 이 한 시각을 기다리고 있다. 이 한 시각은 실제로 눈 깜빡할 사이의 일로서, 신이 보기에는 손을 흔드는 사이의 일이다. 그러나 인류 이 공간에서는 시간적 과정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이 공간에서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신이 보기에는 단지 눈 깜빡할 사이의 일에 불과하다.”(《각지설법 9》〈2009년 대뉴욕지역법회설법〉)

우리가 수련을 몇 시간이나 하는가는 사실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필자가 이 뻔한 주제를 갖고 글을 쓴 이유는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좋은 의견들이 나와 여러분이 모두 시간문제에 대해 한번 관심을 가졌으면 원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이번 한 평생에 한마음 한뜻으로 수련합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4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