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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음 6》〈사람을 구하고 자신을 구하기 어렵네〉를 읽은 소감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사존의 《홍음 6》이 출간되자 나는 간절하고 격동한 마음으로 5번을 보았다. 처음 〈사람을 구하고 자신을 구하기 어렵네(度人度己難)〉를 볼 때 감동이 아주 커서 나는 바로 이 시를 외웠다. 나는 이는 사부님께서 제자들더러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어디에 해당되는지 보고 빨리 따라잡으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전체 시는 다음과 같다.

대법도 수련 어렵지 않으니
첩첩 속인 마음 곳곳을 가로막네
상사가 난(難)을 들음에 한번 웃으면 해결되고
중사는 관을 만나면 담담하지 못하며
하사는 사람마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누나
대법이 세상에 전해짐 비범하지 않나니
사람 구하고 자신을 구해 원만해서 돌아감이라
몇이나 할 수 있고 몇이나 빈말이런가

[역주: 아직 한글 번역본이 정식으로 발행되지 않은 상태라 임시로 번역한 것임]

大法徒修不難
重重凡心處處攔
上士聞難一笑解
中士遇關不坦然
下士人心去不完
大法傳世不非凡
度人度己圓滿還
幾人能行幾人空談

나는 이에 자신을 한번 가늠해보았다.

“상사가 난(難)을 들음에 한번 웃고 해결되는” 여기에는 분명 부족하다. 왜냐하면 나는 관을 넘길 때 한번 웃고 해결된 적이 드물고 대부분 조급하고 화난 모습을 보였고 나중에 후회했기 때문이다.

“중사는 관을 만나면 담담하지 못하며”에 좀 가까운데 나는 자아가 강해서 난관 중에 대부분 “담담하지 못했다.”

“하사는 사람마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누나” 이건 좀 달갑지 않은데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렇게 가늠해보니 나는 자신이 ‘중사’나 ‘하사’의 중간상태에 속함을 느꼈다.

전에 나는 줄곧 자신이 그래도 수련을 잘해왔다고 여겼다. 매일 《전법륜》 한 강과 해외설법을 읽었으며 발정념도 6~7차례 했고 대법 일도 하고 있다. 또 법리적으로 말도 좀 할 수 있어서 동수들과 함께 교류할 때면 자신이 뒤쳐진다고 느끼지 않았다.

나는 또 때로는 ‘사악이 탄압하는 비바람 속에서 오늘까지 온갖 마난을 겪으며 걸어오는 것도 아주 어려운 일이니 이 점에서 보자면 나는 마땅히 대근기지인(大根器之人)이고 마땅히 상사(上士)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겠는가?’라고 자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사부님 시에서 ‘상사 중사 하사’의 상태 표준을 보고 나는 단번에 차이를 보았다. “한번 웃고 해결되는” 상사의 표준과 차이가 큰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담담하지 못한” 중사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상태가 어떤지는 일목요연하니 나는 몹시 부끄럽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속의 자아와 오기(傲氣)가 단번에 사라졌고 마치 공중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수련 중에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다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대법 경계(境界)의 표준요구에 도달해야만 하며 최후로 갈수록 요구는 더욱 높아짐을 의식했다.

때로 나는 여전히 인식 상에서 잘못을 저지른다. 가령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수련을 잘한 지표로 삼는데 자신이 일을 잘하는 것을 가지고 일을 적게 한 동수와 비교하고 동수를 만나면 자연히 남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는데 잠재의식 속에서 내가 남들보다 낫다고 여긴다. 이는 수련인의 큰 금기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수련함에 비단 당신이 부동한 경지의 그 층차에 도달하고 당신의 본성이 되돌아 나와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당신이 부동한 시간 부동한 층차를 지나오면서 역사의 오랜 세월 중에서 부동한 경지 중에서 오염된 것들을 제거해 버려야 하며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한다. 내가 당신들에게 주려는 것은 바로 당신들로 하여금 천지개벽의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경지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다.”(《미국동부법회설법》)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경계’(境界 경지)는 신우주의 생명표준으로 조금만 차이가 나도 다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 해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일을 많이 했다고 “한번 웃으면 해결”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일을 하는 것과 마음 수련은 별개의 일이다.

사부님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자신을 찾았고 또 많은 단점들을 발견했다. 가령 수구를 잘하지 못하고, 남을 평론하고, 남에게 강요하며, 성격이 고집스럽고 조급하며, 천박한 자부심, 과시심, 원한심 등등이 있다. 또 관(關)을 넘기면서 마음이 건드려질 때면 이지적이고 냉정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쉽게 흥분하며, 성격이 좋지 않고 말투도 상화롭지 못하다. 사람의 ‘이치’를 고수하며 내려놓지 못하는데 수련인이라면 다 알다시피 관을 넘는 것은 바로 그 몇 초에 달려 있고 그 한 시각이 심성(心性)에 대한 가장 좋은 검증이다.

매번 관을 넘고 검증할 때면 나는 늘 ‘중사’와 ‘하사’ 사이에서 흔들렸으니 정말로 몹시 부끄럽다. 나는 반드시 자신을 잘 수련해서 “상사가 난(難)을 들음에 한번 웃고 해결되는” 상태에 도달해서 사부님께 위안을 드리고 원만해서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현재 층차에서 작고 얕은 깨달음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4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