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음뇨뇨(餘音嫋嫋)
【정견망】
수련을 이렇게 다년간 해왔음에도 나는 조급한 성격 때문에 줄곧 곤혹스러웠다. 다른 동수의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을 보면 아주 부끄러운데 자신이 이 마음에서 늘 큰 돌파가 없다고 여겼다. 때로 이건 성격문제이지 수련상의 집착심이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다그쳐 닦으려 하지 않았다. 이 조급한 마음에 가려져서 나는 아주 많은 집착심을 닦는 것이 몹시 느린 것을 발견했다. 가령 쟁투심, 과시심,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등이다.
동수들 앞에서는 그래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동수의 수련이 아무리 힘들고 제아무리 법에 없어도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설사 모두들 어떤 동수의 표현이 아주 차(差)하다고 인정할지라도 그(녀)가 단지 법에 있기만 하다면 나는 늘 그에게 정념을 줄 수 있었고 자신의 결점과 동수의 장점을 비교하며 동수의 빛나는 점을 찾아 선의(善意)적으로 동수를 도울 수 있었다.
누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기 마련이기에 매 동수마다 다 장단점이 있다. 동수의 장점을 많이 배우고 동수의 장점을 보며, 동수의 부족한 점을 볼 때면 반대로 자신을 보고 자신을 닦으면서 내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마땅히 제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법(法)을 수련하고 천상에서 성스런 인연을 맺고 모두 사명을 지니고 내려왔다. 나는 수련환경을 잘 원용하며 선의로 동수가 법에서 정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깊이 안다. 때문에 모두들 다 나와 교류하길 원하는데 심지어 동수들 사이에 내가 법리를 잘 알고 수련을 아주 잘했다고 여기게 만드는 일종의 가상(假像)이 조성되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집에서 나는 남편(동수)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자비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남편은 다른 동수와 다르게 대하는가? 왜 다른 동수를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의로 남편을 대하지 못하는가? 때로 자신을 찾아보지만 모두 자신의 각종 관념에 의해 문밖에서 가로막혔다. 단지 나의 당문화(黨文化)가 너무 심해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못했고 가족의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나만 잘났고 내가 높다고 여기면서 일률적으로 가족 동수에게 안으로 찾을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마성을 방종해왔던 것이다. 나는 늘 남편은 평화적이고 이성적이라 내가 그에게 잘하든 못하든 그는 다 개의치 않으며 나의 모든 것을 포용해주리라 여겼다.
한번은 남편이 꿈을 꿨는데 꿈에 내가 그에게 구멍이 많이 뚫린 바지를 주었다고 했다. 집에 좋은 바지가 많이 있었지만 오히려 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 꿈은 마치 하나의 망치처럼 내게 충격을 주었다. 내 몸이 맹렬하게 한동안 진동했는데 마치 좋지 않은 생명이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줄곧 나를 교란해왔던 좋지 않은 물질이 해체된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남편 동수에 대해 의존하는 마음으로 나는 마침내 나의 근본 집착을 찾아낸 것이다.
나는 남편에 대한 정 때문에 그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이다. 남편에게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한 정서로 대한 것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는 마음에서 내원한 것이다. 나는 그를 좋지 않은 감정을 배설할 나의 충실한 청중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모두 독립적이라 설령 부부사이일지라도 말을 함부로 하거나 멋대로 성질을 부려선 안 된다! 남편을 나의 부면적인 정서를 발설할 좋은 대상으로 여기는 이 자체가 바로 법에서 빗나간 것이다. 이 근본 집착을 찾은 후 내 마음 속에서 부끄러움, 자책, 후회 등의 복잡한 감정이 나왔다.
수련 전 나는 고전 시사(詩詞)를 애호했고 고상하고 운치 있게 말했다. 산문도 세속을 벗어나 등불처럼 마음을 밝혀주는 책들을 좋아했다. 나의 이런 자연스럽고 고졸하며 소박한 생활태도 때문에 “독서만이 고상하고 다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는 고인의 말을 숭상했다. 때문에 나는 법을 얻는 데 아무 장애도 없었다.
수련한 후 나는 한 가지 도리를 알았는데 인간세상의 문화는 불도신(佛道神)의 자비에서 온 것으로 생명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전해온 것이다. 하지만 사물에는 늘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수련 상에서 내가 과거에 읽었던 책이 비록 내 시야를 넓혀주긴 했지만 아주 많은 집착심을 강화했고 수많은 완고한 관념들을 형성했다. 나는 청아하고 고상하며 오만하고 자아를 중시했으며 사는 것도 자유분방했다. 반대로 남편은 성격이 평화롭고 이성적이라 나의 나쁜 성격을 다 참아냈고 아무런 원망도 품지 않았다. 수련 후 나는 그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았고 자신도 이 방면에서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장기간 양성된 습관은 정말 고치기 힘들었다.
나와 남편은 둘 다 수련하려는 마음이 아주 강했다. 사존께서 남편을 점화하신 바에 따르면 역사상 우리 둘은 함께 수행했었고 또 부부가 된 적도 있었다. 금생에 우리는 다시 만나 법리에서 공동으로 교류하며 공동 승화하는 동수가 되었는데 남녀 사이의 정(情)도 잘 내려놓아 일찌감치 색욕을 끊었다. 한때 나는 농담삼아 남편에게 “우리 사이는 그저 손을 맞잡는 우정으로 내려왔어요.”라고 했다.
나는 남편에 대한 정을 이미 내려놓았다고 여겼지만 수련이 승화됨에 따라 남편의 손을 잡는 우정마저도 없어졌고 우리는 매일 사존께서 요구하시는 세 가지 일을 하는데 정력을 쏟고 있다. 속인 중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재미가 없고 인간세간의 일체는 우리에게 이미 아무런 흡인력도 없다. 또 그의 미래는 모두 사존께서 관할하시니 내가 조바심 낼 필요도 없다. 자신은 남편에 대한 정이 이미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정법노정이 추진됨에 따라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는 갈수록 높아졌다. 끊임없이 자신을 깊이 파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남편에 대한 나의 정이 이렇게 무거운 것을 발견했다. 그에게 조급했던 마음의 원인은 그에게 의존하는 마음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런 의지하는 마음은 그에 대한 정에서 기원한다.
가령 그와 남이 만나 사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남편이 집에 있는 걸 좋아했다. 설령 서로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책을 보고 학습하며 각자 자기 일로 바쁘면서도 남편이 집에 있어야 마음속이 늘 든든함을 느꼈다. 내가 무리하게 장난을 걸어도 포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흡족했고 허영심이 극도로 만족되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아주 짙은 정의 표현이었다. 부끄럽게도 정법노정이 이렇게 빠른데 자신의 수련은 여전히 이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시험 삼아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이런 의지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존을 따라 원만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는가? 의지하는 마음을 찾아낸 후 나의 집착은 수련의 근엄함에 맞아 박살이 났다.
한번은 다른 동수와 교류하는데 이 동수가 정진하지 못했고 때로 TV 드라마를 보았다. 교류 후 동수는 분명히 알게 되었고 자신의 부족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내가 한마음으로 그녀를 위했기 때문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고 앞으로는 드라마 중독을 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은 그래도 울 기회가 있지만 정말로 원만하는 그 날 동수들이 모두 원만해서 날아 올라가는데 당신만 사람 이곳에 남아 ‘뒹군다’면 그때는 울어도 늦을 겁니다. 사존께서 자비로 연장해주신 시간을 무료하게 TV보는데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정진해야 합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나 역시 전에 이렇지 않았는가? 나 역시 사람 속에서 청성하지 못했고 사람 속에서 뒹굴었으며 나에 대한 남편의 포용과 양보에 즐거워하지 않았는가! 심령 깊은 곳에 한 가지 마음이 있어서 남편 앞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수련하지 않으면서 그는 당연히 나를 포용하고 당연히 내게 양보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정 속에 빠져 자아 도취되어 각종 집착심을 자양했던 것이다. 수련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자비하신 사존께서 마음을 쓰시게 했다.
한번은 꿈을 꾸는데 사존께서 의념으로 “너는 움직이지 않는(不動) 물로 구성된 것이다”라고 넣어주셨다. 나는 사존께서 수고스럽게 꿈속에서까지 우둔한 제자를 점화해주신 것에 대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사존의 거대한 에너지장이 내 주변에 가득했고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 한순간 나는 사존의 자비에 녹아들어가 사람의 사유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무엇이 공(空)인지 체험할 수 있었다. 신(神)의 일면에 불가능이란 없으며 강철을 녹일 수 있는 자비가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었으며 나와 세간 사이의 간격이 천만층이나 벌어진 것을 느꼈다. 그때 정이란 무엇인가? 내게 말하자면 불필요한 물질일 뿐이며 그것은 이미 나를 제약하지 못했는데 정말로 대자재(大自在)했다.
정신을 차린 후 나는 곧 사존의 설법을 찾았고 사존께서 물에 관해 하신 설법을 기억하려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법공부가 부족하고 이렇게 피동적인 것을 한탄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사존께서는 《미국법회설법》〈샌프란시스코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사실 물질의 본원은 바로 물이다. 우주 본원의 물이지, 속인 지구의 물이 아니다.”
“우리 이 공간의 물을 포함하여 그것 역시 더욱 미시적인 물이 조합되어 더욱 큰 입자로 구성된 물 분자를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한다. 그것이 기왕 더욱 미시적인 데에서 표면물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는데, 전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이 우주는 바로 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런 물은 밀도가 극히 큰 것이며 전혀 움직이지 않는 물로서, 그것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 단락의 법을 읽고 난 후 나는 활연히 밝아졌고 수련에서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창문을 열어주셨다. 이에 마음을 닦고 집착을 없애는 방면에서 한 갈래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매번 조급해질 때마다 나의 생명본원(주원신)은 극히 미시적인 물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자신의 육신(肉身)에 반영된 조급한 사상이 아주 가뿐히 억제되었고 이를 통해 본성의 일면을 드러낼 수 있었다. 서서히 나는 부동심(不動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본성의 일면은 움직이지 않는(不動) 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세간의 일이 어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마음을 움직일 때면 우리가 층층 아래로 걸어 내려올 때 만들어진 후천관념이 우리의 육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사존의 법리를 붙잡고 남편에 대한 정을 내려놓은 후 그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줄어들고 또 줄어들었으며 내심은 법리의 인도하에 갈수록 더 강대해졌다. 남편에 대한 정을 제거한 후 지금 나는 정이란 정말 일종 불필요한 물질로 여기는데 나는 이미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 남편과도 선의(善意)로 평화롭게 소통해 사람의 물질이 줄어들었고 신의 그 일면이 나와 남편 사이에 갈수록 묵묵히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서로 지지하고 서로 지탱하면서 사존의 가지 하에 ‘신선부부(神仙眷侶)’처럼 변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집착심 방면에서도 아주 큰 개선이 있었고 사존의 홍대한 자비 하에 끊임없이 경지(境界)를 제고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생명의 진정한 존재 형태는 마땅히 신성(神性)의 상태여야 하는데 다시 말해 초연하고 자연스럽고 순정(純淨)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이런 것만이 비로소 생명이 진정으로 지녀야 할 존재형태라 할 수 있다.
사존의 보살핌이 있음은 진정으로 삼생의 행운이다. 사존께 무릎 꿇고 절을 올립니다. 만약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랍니다. 허스.
끝으로 한 수의 시로 여러분들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억년 이별에 눈물로 손수건 젖고
눈 들어 달 보며 고향 가족 생각하네
홀로 풍소(風騷)를 이끄니 누가 짝이 되리오
그대와 손잡고 아름다운 음악 만든다네
離別億年淚濕巾,
舉目望月思故親。
獨領風騷孰能比,
與君攜手創佳音。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6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