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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정과 외모에 집착하는 배후의 현대관념을 깊이 파다 

대법제자 귀정(歸正)

【정견망】

나는 수련에서 아주 큰 난관(難關)을 만나 법 공부와 안으로 찾음 및 동수들과의 깊이 있는 교류를 통해 일부 사유 배후의 현대관념을 인식했고 또 아주 많은 집착심을 제거했다. 최근 마땅히 이 과정을 글로 써내어 현재 인식한 일부 변이사유의 근원을 폭로해야 함을 깨달아 여러분들에게 일부 교훈과 참고로 제공하고자 한다.

남녀 정에 대한 집착을 닦아버리다

나는 법을 얻기 전에 수많은 문학작품들을 읽었다. 소위 ‘애정(愛情 사랑)’이야기에 세뇌되어 ‘애정’이야말로 인생의 최고 가치라고 여겼다. 법을 얻은 후에도 내심으로 여전히 ‘애정’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 이 때문에 수련 후 다년간 몇 차례에 걸쳐 이성에게 흔들린 적이 있고 또 몇 달간 허튼 망상을 품고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적도 있다. 단지 매번 마음속 활동에 불과했고 말이나 행동(言行)은 여전히 아주 삼가고 조심했음에도 마음속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느꼈는데 비록 언어로 명백히 표현하진 않았지만 상대방 역시 나와 유사한 감정으로 괴로워함을 느꼈다.

정당하지 못한 언행(言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 더러운 색욕심과 남녀 정에 대한 집착을 진정하게 중시하지 못했고 도리어 변이된 가치관 하에서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으니 지금 세상에서는 오히려 아주 고상한 거라고 여겼다. 마치 애정을 중시함이 천경지의(天經地義)인 것 같았다. 비록 법리로 자신을 대조해 이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몹시 좋지 않은 마음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긴 했지만 매번 풀만 뽑고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철저히 바로잡지 못했다.

그때 이런 생각들은 대법에 위배되니 제거해야 함을 알았지만 여전히 이런 것들을 아름다운 감정으로 여기며 진정으로 이런 생각이 왜 아주 좋지 않고 또 사악한 것인지 몰랐다. 또한 신(神)이 보기에 바르지 못한 염두 자체가 바로 죄악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사실 무신론(無神論)에 세뇌된 후 고인(古人)이 강조하던 “머리 석자 위에 신령이 있음”을 믿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단지 마음속으로 생각만 움직이고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니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홍음(洪吟) 5》와 《홍음 6》에서 여러 차례 “현대관념”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 현대관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몰랐다. 단지 법에서 사람에 대한 그것의 독해(毒害)가 거대한 것만 알았다. 나중에 점차 “현대(現代)”란 단어와 상응하는 것인 “전통(傳統)”임을 이해했고 그렇다면 현대인이 떠받드는 전통이념과 위배되는 것은 모두 현대관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다 사람의 탐욕심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것이다. 가령 “황금만능주의”, “애정지상주의”, “돈이 많아 제멋대로 살거나 잘생긴 외모로 제멋대로 사는 것”을 부러워하는 등등. 마치 현대사회 일부 사람마음 속 공리(公理)가 된 것과 같은데 일부 수련인들 역시 이런 현대관념으로 형성된 변이된 가치관에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

현대관념이 가져온 변이된 가치관을 바로잡자면 사부님의 법과 대조해 전통으로 회귀해야 한다. 전통이념에서 무엇을 말했는가 보니 나는 적어도 정통(正統)적이고 전통적인 표준에 부합하지 못했음을 보았다. 일부 전통 이야기들을 읽은 후 나는 전통가치관은 남녀 사이의 접촉에 대해 대단히 신중하고 근엄했음을 이해했다.

가령 남녀 사이에 직접 물건을 주고받지 않는다거나 예의가 아니면 보지 않는 등등이다. 또 “색의 유혹을 거절해 복을 얻거나 색을 탐하다 재앙을 초래한” 인과응보 사례들에서 볼 수 있다시피 사람의 언행 및 염두의 선악은 모두 각기 다른 과보(果報)를 초래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이성(異性) 앞에서 자신이 매력 있기를 바라는데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이 되는 것을 일종 복분(福份)으로 여긴다. 나 역시 전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정견망 문장 《양송(兩宋)의 네 차례 윤회》 이야기에서 큰 계시를 받았다.

“옛 사람들은 남녀가 서로 물건을 주고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남녀 방면에 많은 도덕규범이 있는데, 더욱이 여자에 대한 규범이 더 엄격했다. 사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도덕표준만이 아니라 더욱 깊은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녀 사이에 불필요하게 업을 빚는 일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의 사람은 감정에 대해 무책임해 부주의로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조성하는데, 그것은 모두 갚아야 한다. 만일 정말 어떤 사람이 당신을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억울하게 일생을 마친다거나, 혹 당신 때문에 질투하다가 죽게 되면, 장래에 당신은 아마 일생 혹은 몇 생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비록 당신이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그에게 고통을 준 것이 당신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말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 방면을 가장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과 이야기들을 알고 나서 나는 설사 마음속에 색념(色念)이 있는 것만으로도 극히 커다란 악과(惡果)를 초래해 사람이 타고난 복을 감소시킬 수 있음을 알았고. 왜 정당하지 못한 남녀 정이 철저히 잘못된 것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많은 현대인들의 관념에 따라서 본다면 결혼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마치 자신이 만난 사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소위 “진짜 사랑”이나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여긴다.

동수 중에도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이혼한 후 다시 재혼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현상은 마치 최근 중년이나 청년 동수들 중에서 갈수록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어떤 이들은 각기 다른 구체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어떤 이는 혼인에 대한 가치관이 세상 기풍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 도덕의 영향을 받아 변이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사실 아주 위험한 것이다. 정통이념에 따라서 본다면 사상 속에서나 또는 행위에서 혼외정(婚外情 역주: 정당한 혼인관계 이외에 생겨난 각종 남녀 사이의 정)이 생기면 복을 감소시킨 후 운명 역시 갈수록 더 나빠져서, 애초 추구했던 행복과는 정반대가 된다. 일부 근대인들의 많은 실제 사례 속에서 이런 도리를 실증할 수 있다.

(역주: 원문에서는 여기에 몇몇 유명 연예인들의 사례를 들고 있으나 생략)

한마디로 많은 미녀 스타들이 원래 배우자와 이혼하고 새로운 상대와 재혼한 후 더 불행해진 반면 이혼당한 그들의 원래 배우자는 행복하게 잘 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대법의 법리에 따라 이해하자면 사람의 운명이 좋고 나쁘거나 행복한 여부는 다른 공간의 덕(德)과 업력(業力)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운명을 좋게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덕을 쌓고 덕을 지키는 것이다.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 그 어떤 방법도 모두 덕을 손상시킬 뿐이며 덕을 손상하면 운명은 더욱 나빠진다.

정견망 문장 《윤회의 경고: 스테이플러 심으로 전생한 승려》를 보면 이 승려는 색(色) 방면의 언행에서 아무런 과실도 없었고 그저 내심의 색념(色念)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라게 하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미 만회할 수 없는 악보(惡報)를 조성했기 때문에 10여 차례에 걸쳐 동물로 전생해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나는 발정념할 때 일찍이 마음속에 색심을 움직인 동수를 도와 색마(色魔)의 교란을 청리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 구세력은 역사상의 은원(恩怨 은혜와 원한) 및 우리가 닦아버리지 못한 색심을 이용해 우리더러 극렬하게 서로 해치게 한다. 인과관계에 따라서 본다면 역사적으로 거대한 원한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또 이 방면에 문제가 있는 내가 아는 일부 다른 동수들을 도와 발정념을 한 적이 있다.

“색(色)에 집착함은, 악한 자와 구별이 없으며 입으로는 경문을 읽으면서도 음흉한 눈길을 마주치니 도(道)와는 너무나 먼 것이라, 이는 사악한 속인이다.”(《정진요지》〈수련자 금기〉)

고대에는 “음란이 만 악의 으뜸(萬惡淫爲首)”이라 했다. 색심이 무거운 사람은 종종 악념(惡念)을 일으키기 쉬운데 마음 역시 보통사람보다 더 불선(不善)하고 남녀 정에 빠질 때도 상대방이 어떻게 좋고 자신에게 어떻게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정(情)이 가져온 가상에 불과할 뿐이다.

많은 사례들이 증명하다시피 정당하지 못한 남녀 정은 거대한 악보를 초래할 수 있다. 나 여기에서 체현된 보응은 마음속에 수시로 알 수 없는 고통으로 몹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내 생각에 이는 내가 과거 사상 속에서 둘이 서로 사랑함을 향수(享受)하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그런 감정과 향수는 오히려 내 명(命)에 원래 정해져 있던 복이 아니며 이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훔친 것과 같다. 훔쳐온 것은 자신의 즐거움에 속하지 않는다. 비록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만 하늘은 오히려 일일이 다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마음속으로 고통스럽게 빚을 갚아야 한다. 아울러 과거 다년간 나는 이해력과 기억력이 모두 좋지 않았고 또 집중할 수 없었는데 정(情) 방면에서 조금씩 바로잡은 후에야 점차 호전되었다.

우리는 법에서 불의(不義)의 재물을 가져올 수 없음을 아는데 불의의 재물은 덕으로 교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단지 재물뿐만이 아니라 명(名)이나 정 방면에도 이런 이치가 있다. 정 방면에서 심각한 교훈을 제외하고 명 방면에서도 나는 또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다.

나는 일찍이 말을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나중에 말재주에 의지해 자신의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생각은 아마도 명예를 탐하는 것으로 실질은 없으면서 헛된 명성을 향수하는 즐거움은 나중에 고통 속에서 갚아야 하며 이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임을 알았다. 말을 함에 마땅히 최대한 진실하고 질박(質朴)하며 과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데 이렇게 해야만 뜻하지 않게 헛된 명성을 얻어 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는 사람의 매 일념을 늘 수시로 가늠하면서 덕(德)과 업(業)이란 천칭에서 저울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말에 “사람마음에 일념이 생기면 천지가 다 안다. 선악에 만약 보응이 없다면 건곤이 반드시 사심(私心)이 있을진저”라고 했다.

나는 또 한 가지 집착심이 남녀 정에 대한 집착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따스한 인정(人情)을 갈구하는 마음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아주 집착했고 사람들이 모두 나를 친가족처럼 대해주길 기대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을 눈에 거슬려하거나 불만을 품었는데 늘 남들이 나를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여겼다. 이는 지나치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스한 정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그 배후에는 정과 명에 대한 집착이 있다.

나는 남녀 정에 대한 나의 집착 역시 이 마음과 관련이 있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둘이 서로 사랑할 때 따스한 정을 갈구하는 나의 사람마음을 크게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남녀 정을 제거할 때 뿌리를 뽑지 못했던 원인은 진정으로 이 집착이 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인식한 것은 이렇다. 만약 어떤 음식에 대한 집착을 끊기 어렵다고 하자, 이 음식 안에 극독(劇毒)이 들어 있음을 안다면 당신이 감히 더 탐할 수 있겠는가?

색욕과 남녀 정 역시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아름다운 외모 배후에 사람을 죽이고 눈도 깜짝하지 않는 백골정(白骨精 역주: 《서유기》에서 미녀로 변해 사람을 유혹하는 요괴)이 있으니 반드시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사상 속에 조금만 섞어 넣어도 극독을 먹는 것과 같아서 약간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다.

외모에 대한 집착

나는 또 전에 외모에 몹시 집착하고 젊고 예쁜 외모를 부러워했다. 어떤 동수들이 동년배보다 훨씬 젊어 보이면 나는 속으로 몹시 질투했고 마치 내가 가장 마음에 두는 좋은 것을 그들이 빼앗아간 것처럼 여겼다. 사실 이런 생각은 아주 이지적이지 못한 것으로 매 사람마다 외모는 모두 자신의 복으로 가져온 것이라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나는 강렬한 집착심 하에 이렇게 일종 아주 비이지적인 심태를 품었다.

젊고 예쁜 외모에 집착하는 이 마음을 깊이 파보니 사실 배후에는 역시 색(色)과 관련이 있었다. 나는 일부 여성들이 외모에 대해 마치 첨예하고 민감한 심태임을 느꼈다. 마치 여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원처럼 여기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비이지적으로 질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뉴스에 한 아역 출신 여배우가 동창들의 집단 따돌림을 당하다 건물에서 뛰어내렸다는 기사가 있었다.

외모에 대한 나의 집착은 당연히 “애정”에 대한 집착에서 형성된 것이다. 나중에 일종 완고한 관념으로 형성되어 그것이 형성된 근원을 망각했다. 세밀하게 생각해보면 사실 아주 많은 애정이야기 속에서 여주인공은 늘 젊고 예쁜데 마치 이렇게 해야만 아름다운 애정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때문에 나는 학창시절부터 외모에 대해 몹시 집착했고 다른 여성을 만나면 제일 먼저 보는 게 그녀의 외모가 어떠한가 였다. 나의 사상은 이런 관념에 의해 단단히 통제되어 있었다.

나는 또 동수들 중에도 자신이 젊어 보이길 좋아하는 관념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 지역 노년 동수들은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것도 아주 싫어 한다. 심지어 스무 살 이상 젊은 동수가 아주머니라고 불러도 안 된다.

나는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오십여 세” 사람을 “노부인” 또는 “아주머니”라고 하신 것을 발견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아마 이것이 법에서 정한 노년인의 나이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보편적으로 노년을 달가워하지 않고 죽어라 젊게 보이려 꾸미는데 각종 방식으로 젊어지려 한다. 심지어 남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조차 심하게 따진다. 때문에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도 “모모 오빠” 또는 “모모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나는 현대인들이 젊음에 집착하는 배후의 일부는 아마 마귀의 배치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것은 또 색욕을 감추고 있거나 심지어 성을 난잡하게 하거나 윤리를 어지럽히는 심리상태이다. 일부 현대인들이 중년이나 노년 이후에도 젊은 세대와 떨어지려 하지 않고 죽어라 청춘을 붙잡으려 한다. 일부는 아마 ‘색정(色情)시장’에서 자원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는 각종 어지러운 현상들이 나타나 나이를 초월한 “연상연하커플”이 나타났다. 일부 할머니 연배의 사람들은 단지 젊은 여자들과 외모를 경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자친구를 빼앗기까지 한다.

고대에는 상대적으로 여성이 젊을 때만 자신의 미모로 무의식중에 남을 유혹해 업을 지을 조건(전통이념에 따르면 미모를 보고 사념을 일으키면 덕을 잃고 복을 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예쁜 외모를 가진 사람은 무의식중에 남에게 업을 짓게 할 수 있다)을 갖췄다면 현대인은 기어코 이 시간을 연장해 사람을 유혹해 업을 지을 효율을 높이면서도 스스로 좋은 일이라고 여긴다.

불교에서 연화색(蓮華色) 이야기는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그녀는 쉽게 늙어 보이지 않는 동안 외모 덕분에 수많은 불가사의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한 동수에 따르면 이웃에 사는 한 젊은 여자가 빼어난 미모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다투는 대상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이 그녀를 사귀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정신병에 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년 후 그녀는 오히려 뚱뚱해져서 휠체어를 타야 했으며 심리적인 문제까지 나타나 과거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동수는 이에 대해 그녀가 남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설사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다.

하물며 현대인들은 언행에 신중할 줄 모르고 도리어 미모를 자신의 장점으로 여기고 과시하려 하니 아마 의식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많은 업을 지을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사람은 마땅히 선량하고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남을 해칠 수 있는 그런 일은 설사 자신에게 책임이 없을지라도 마땅히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현대관념 하에서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마치 외모를 남과 경쟁하는 날카로운 무기처럼 여기며 남에 대한 선심이나 존중이라곤 전혀 없다. 《9평 공산당(九評共產黨)》에서는 “정상적인 사회의 문화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심과 사랑 및 생명에 대한 경외와 신에 대한 감사로 가득하다.”고 했다.

나는 우리 지역 일부 동수들의 이 방면 표현에 주목하는데 친구 사이에 서로 무슨 ‘미녀’니 ‘여신’(개인 인식으로 수련인은 이런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게 마땅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는 색심이 포함되어 있고 하나는 신에 대한 불경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이라고 한다. 또 자식들을 서로 비교하는데 아이의 외모가 좋으면 득의양양해 한다.

사실 나는 일부 소제자(小弟子)들이 외모가 뛰어나서 아주 어려서부터 이성의 교란을 받거나 색심이 생긴 사례들을 알고 있다. 일부 소제자들은 심지어 성장한 후 수련하지 않거나 또는 색욕에 의해 망가졌다. 개인적인 이해로 색심(色心)이 있으면 사람 전체가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잘생긴 외모는 정말이지 좋은 일이 아니다. 잘생긴 외모는 소위 ‘색정시장’에서 보다 ‘가치’ 있을 수 있지만 만약 수련인이 법리에서 투철하고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고 도리어 희희낙락하거나 색심을 자라게 한다면 불필요한 마난을 초래할 수 있다.

정견망 문장 《윤회의 경고: 스테이플러 심으로 전생한 승려》의 젊은 승려의 사례를 다시 들어보자.

“그는 외모가 당당해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어떤 여자 신도가 그를 좋아해 기회를 이용해 그와 대화를 나누려 했다. 화상은 당시 행동거지가 근엄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점차 사념(邪念)이 자라났고 머릿속에서 수시로 더러운 염두가 나타났다. 그는 제때 이런 망념(妄念)을 제어하지 못했고 그런 사념을 제거하지 못했으며 또 계속해서 허망한 생각에 빠졌다.”

이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지옥에 떨어질 뻔 했고 늦게나마 자신을 바로 잡으려 노력한 후에도 여전히 10여 차례 동물로 전생해 업력을 갚아야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동수들이 처음에는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이 색심과 관련이 있음을 모른다. 단지 단순히 젊어 보이면 당연히 좋고 늙어 보이면 좋지 않으며 뚱뚱해도 좋지 않다고 여기며, 이런 생각은 이치상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또한 이런 생각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뿌리를 캐지 않는다.

한 동수의 말에 따르면 표면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외모를 중시하는 것 자체가 아마 색욕심에서 내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늙어도 이성에 대한 매력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설사 표면에서는 체면을 차리고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런 견해 배후는 아마 색욕심을 가치관으로 삼아 나온 관념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적인 표현에 집착하는 이 마음의 배후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색욕심이란 이 뿌리를 피해가기 힘들 것이다.

비록 많은 동수들이 현대관념의 영향을 받아 외모에 아주 집착하지만 나는 또 일부 동수들은 여전히 이런 관념에 이끌리지 않고 설령 외모가 좋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착실한 수련이 제 위치에 도달한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많은 방면에서 수련에 소질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일부 동수들은 수년이 지난 후에 오히려 무슨 노화현상이 없었다. 나는 겉으로 드러난 외모가 젊고 아름다운 것이 부러운 게 아니며 이런 동수들이야말로 진정 부러워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 지역 한 여자 동수는 중년에서 노년까지 20여 년을 수련했음에도 외모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기본적으로 외모에 대한 집착심이 없다고 보는데 20여 년 전에 입던 옷도 중년 풍으로 젊어지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 반면 나는 또 일부 젊게 보이는 화장에 열중하는 여자 동수들이 몇 년이 지난 후 오히려 아주 노화된 것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나는 외모의 젊음 역시 명(命) 속에 정해진 복분이 있는 것으로 명을 인정하지 않고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날조(물론 다른 원인이 있는 경우는 제외함)”로 배후에는 아마 색심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느 한 단계에서는 확실히 젊어 보이는 효과가 있겠지만 지나고 나면 오히려 노화가 가속화되는데 총체적으로 여전히 자신의 명에 정해진 이 방면의 복을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의 타산은 하늘의 타산만 못하다. 더욱이 색심이 일어난 후에는 오히려 자신의 복을 손상시킬 수 있다.

이런 도리를 분명히 알고 난 후 외모에 집착하는 마음이 아주 약해졌다. 하지만 사람이 늙는다는 관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도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 마치 관념이 이미 굳어져 실로 제거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다년간 형성한 관념 속에서 줄곧 사람이 늙으면 갈수록 가치가 없어지며 외모만 늙는 게 아니라 건강 역시 나빠지고 각종 사회 자원 역시 줄어들어, 나이가 들수록 노병사(老病死)란 인생의 단계를 향해 간다고 느꼈다. 때문에 내심으로 비관하고 소침해졌다.

나중에 나는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젊음을 추구하고 노인은 가치가 낮은 대상으로 보는 이런 변이된 가치관 역시 구세력이 배치한 하나의 현대관념임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지혜와 경험이 풍부해 다음 세대를 가르칠 집단으로 간주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의 노인에 대한 견해와 전혀 다르다.

《공산주의 유령은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가?》〈공산악마의 인류 훼멸 대계획 ‘36계’〉중 ‘도태를 가속화하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세대교체를 가속화해 기성세대를 갈수록 빨리 도태시켰다. 노인을 사회 중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식으로 인류의 전통 이탈 속도를 빨라지게 했다. 끊임없이 선거연령을 낮추고 정치를 비롯한 모든 직업군에서 젊은이들의 권리를 늘리면서 전통 관념이 있고 명석한 사람을 도태될 때까지 비주류로 만들었다.

문학예술과 유행 문화에서 젊은이들의 취향과 가치관을 치켜세워 유행을 추구하고 시류에 영합하게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과학기술의 갱신 속도가 빨라지면서 생활 리듬도 빨라져 노인들이 적응할 수 없게 된 데다 이민과 도시 개조 등이 속도를 내면서 원래 살던 곳의 모습을 변화시켜 노인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또 청장년 세대에게 보다 큰 생활압력을 가해 그들이 부모를 모시고 돌볼 여력이 없게 만들어 노인들의 고독과 무기력감을 증가시켰다.”

​구세력의 배치를 똑똑히 인식하자

최근 나는 사실 과거에 집착했던 남녀 정이든 아니면 줄곧 있어왔던 외모에 대한 집착이든 모두 구세력이 우리에게 강제로 배치한 것으로 또한 나에 대한 거대한 관과 거대한 난이 되었음을 생각했다. 나는 마땅히 이를 승인하지 말고 발정념으로 제거하도록 견지해야 한다. 나는 발정념을 통해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데 물론 또 법공부와 사부님께 가지를 청하는 것에 의지해야 한다.

사부님의 각지설법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구세력은 매 한 제자에게 모두 한 세트의 것을 배치했는데 아울러 일사일념(一思一念)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밀하게 배치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이런 집착들은 모두 구세력이 배치한 것이지 진정한 자신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해야만 적절하게 자신을 바로 잡고 변이된 사유를 제거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세계파룬따파의 날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한 가지, 많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주의하지 않는다. 자신이 자기 자신의 수련에 대해 엄숙하지 못함은 모두 당신에게 번거로움, 곤란, 심지어 고통을 조성하며, 더욱이 심지어 생명을 잃게 한다. 어떤 대법제자는 표면적으로 보면 어떤 대법 활동에도 다 참가하고, 아주 좋으며, 사람들이 봐도 수련이 그래도 괜찮고, 표면상에서 보면 아주 정진한다. 그러나 누구도 누구의 내심에 어떤 집착이 있어 넘기지 못하는 마음의 매듭이 있는지, 심지어 그것이 얼마나 큰지 모르며, 누구도 누구의 내심에 또 어떤 고집스레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있는지 모르며, 얼마나 넘기기 어려운 것이 있는지 표출해 내지 않았다.”

이 단락 법을 읽을 때 나는 자신이 다녀간 외모와 남녀 정에 집착한 마음의 매듭과 이 매듭이 나를 몹시 힘들게 했고 또 일반적인 집착심에 비해 훨씬 떼어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주 단단하게 내 몸에 달라붙어있는 것 같았다.

최근 몇 년간 많은 동수들이 병업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중에는 모두들 아주 정진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내 생각에 그들 중에 일부는 아마 풀지 못한 마음의 매듭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가령 우리 지역에서 병업으로 세상을 떠난 한 여(女)동수는 표면적으로 줄곧 아주 정진했다. 수년 전에 남녀 정에 곤혹되었다고 했고 나중에 또 그녀보다 30살 이상 젊은 동수가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괴롭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 그녀 역시 아마 나와 유사한 이런 집착심이 있었던 것 같다.

법에서 내가 이해하기에, 구세력은 매 대법제자에게 한 세트 그것들의 것을 배치했지만 매 생명의 역사적인 상황, 업력 등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부딪히는 마난의 형식 역시 천차만별이다.

어떤 제자의 마난 형식은 사악에 체포되어 박해받는 것이고 어떤 이는 병업관이며 어떤 이는 가정관이고 어떤 이는 경제적인 박해이다. 또 어떤 이는 동수 사이의 모순이며 어떤 이는 성공한 후 끊임없이 마음이 팽창되어 결국 심성이 법에서 벗어나도 모르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끓이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가 서서히 죽어가는 식으로 안일한 마음이 나오는 것이고 어떤 이는 거대한 사상업이며 어떤 이는 색욕으로 망가지며 어떤 이는 일을 하느라 바빠서 장기간 심성을 착실히 수련하지 못하는 등등 표현이 각기 다르다.

내 생각에 전반적으로 마땅히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동수가 겪는 그 어떤 형식의 마난이든 모두 근본적으로 구세력으로부터 온 것이고 돌파의 어려움 역시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다른 공간에 지닌 물질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모두들 마땅히 서로 더 이해하고 포용하고 수련이란 쉽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며 그 어떤 사람마음이나 관념을 지니고 동수를 대하지 말아야 한다.

동수의 이런 표현이 드러나는 것은 그가 일시적으로 아직 구세력의 배치를 돌파하지 못한 것이지 동수 본인이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도 마땅히 이런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나는 일찍이 자신에 대해 아주 실망하고 낙심한 적이 있지만 나중에 사람마음으로 자신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마땅히 구세력이 억지로 자신에게 더한 것과 자신의 진아(真我)를 분리하고 끊임없이 법리에 따라 마음을 닦으며 이런 것들을 배척해야 한다.

수선(修善)

나는 사부님께서 몇 차례에 걸쳐 나더러 선을 닦는 것이 마난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점화해주신 것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구세력이 배치한 서로 다른 형식의 마난에 대해, 동수들이 마땅히 선심(善心)으로 저것을 없애고 이것을 도와야 한다고 보는데 선의 힘은 거대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캐나다밴쿠버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나를 만나기만 하면, 나는 당신의 선념(善念)을 모두 움직이게 하고, 당신이 나를 만나기만 하면 나는 당신의 선념 중에서 당신의 죄를 없애 주고, 당신의 업을 없애 줄 수 있다.”

어느 날 이 단락 법을 읽다가 뭔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내 생각에 원래 우리가 남에게 선심(善心)을 움직일 때 사실 또 자신의 죄업을 없애는 것이다. 때문에 동수를 대할 때 마땅히 진심으로 남이 잘 되기를 희망해야 한다. 또 상태가 좋지 않은 동수를 만나면 마음속으로 묵묵히 지지하고 축복하며 사부님께 이 동수를 가지해달라고 청하면서 그가 반드시 갈수록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야만 선념(善念)을 움직인 것이고 이런 생각만이 자신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느낀다.

어떤 동수는 색욕심 제거가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나는 색심(色心)이 중한 사람은 종종 또 자사(自私)와 불선(不善) 등의 문제가 존재함을 관찰했다. 어떤 이는 각 방면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일을 할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의 감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하는 말이 날카롭고 또 수시로 남을 배척한다.

개인적으로 만약 선심과 위타(爲他)한 마음을 닦아내지 못하고 그저 어느 구체적인 문제만 해결하려 한다면 아마 아주 어려울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음이란 불량한 토양(현대관념이 더한 지나치게 강한 탐욕)에서만 색욕과 정이란 이런 ‘독화(毒花 독이 있는 꽃)’가 자라는데 독화를 뽑아버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토양 자체를 개량하는 것이 관건이다. 때문에 내심으로 선을 닦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주 관건이다.

선을 닦는 방면에서 비록 전처럼 남을 무시하고 질투하거나 원망하는 등 이미 아주 많은 사람마음을 약화시켰지만 사실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에 대해 선하지 못한 염두가 아직 아주 많다고 본다. 또 이런 것들이 습관이 되어 당연하게 여긴다.

최근 법을 공부할 때 사부님께서는 나더러 반드시 사람에 대한 모든 악념(惡念)을 근절해야 한다고 점화해주셨다. 가령 그 어떤 사람이든 눈에 거슬리거나 불만이 있거나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마음 등인데, 누구누구가 좋지 않다거나 누구누구가 나를 좋지 않게 대한다는 생각을 없애야 한다. 대법의 법리에 대조해 나는 이런 종류의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사법(邪法)을 연마하는 것이자 아귀다툼을 하는 것이며 남을 욕하는 것과 같음을 인식했다.

“어떤 화상은 거기에서 경을 읽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생각한다. ‘좀 지나 개광이 끝나면 나에게 돈을 얼마나 줄 것인가.’ 또는 경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모모(某某)가 나에게 그처럼 못되게 군다.’ 그의 거기서도 서로 헐뜯고 싸우는데, 현재 말법시기에 이런 현상을 인정하지 않아도 안 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여기에서 불교를 비평해서가 아니라, 말법시기의 어떤 사원(寺院)은 사실 청정(淸淨)하지 않다는 것이다.”(《전법륜》)

“어떤 사람, 그 또한 무슨 공을 연마하는지 모르겠는데, 한편으로는 연마하면서 흔들거리고, 입으로는 또 말을 한다. “참! 내 며느리는 내게 정말 효심이 없다, 우리 시어머니는 왜 그리 못됐을까!”” “좀 엄중하게 말하면, 그는 사법(邪法)을 연마(練)하고 있다!”(《전법륜》)

“이 어린이가 학교에서 집까지 뛰어가는데, 그 문을 열기도 전에 그 집 안에서는 벌써 욕부터 나온다. “뭐 대단할 게 있느냐. 그저 백 점 맞은 거 아니냐? 뭐 호들갑 떨 게 있느냐! 누구는 백 점을 못 맞아본 것처럼!””(《전법륜》)

비록 나는 내심으로 사부님께서 창세주(創世主)이자 주불(主佛)이심을 알지만 과거 다년간 늘 업력에 저애되어 늘 사부님을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법을 읽을 때 갈수록 일체는 다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에 의지해야만 성취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야만 지금 세상에서 매 사람이 존재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음을 느낀다. 사부님의 위대함은 실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 법신은 시시각각 늘 제자의 신변에 계시기 때문에 제자로서 마땅히 마음속으로 늘 사부님을 생각해야 하며 시시각각 법신의 구체적인 점화와 배치를 민감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역시 신사신법(信師信法)의 체현이다. 또한 나는 법 공부가 반드시 마음에 들어가야 함을 인식했는데 마치 사부님께서 직접 제자에게 설법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공경하게 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심에서 우러나와 사부님께 참회하며 또한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감사드린다!

이상은 나의 일부 수련 체오(體悟)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부디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