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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수련의 위대함과 수승함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자비롭게 가호해주신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함께 성스런 인연을 맺은 동수들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최근 출근하면서 늘 〈정법시기 대법제자〉[1]를 외웠다. 감오(感悟)가 자못 컸는데 외울수록 더 감오가 깊어졌고 외울수록 정법수련의 위대수승(偉大殊勝)함을 느낄 수 있었고 외울수록 정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의 중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오가 깊었던 것은 시간에 대한 생각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가 대법(大法)을 수호하는 작용을 하지 못하면 원만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과거와 장래의 수련과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대법제자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1]

개인적인 깨달음은 이번 정법수련은 천지개벽이래 예부터 오늘까지 오직 이번 한번뿐이다. 그러니 정법수련의 기연(機緣)은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고금에 있어본 적 없으나
장래는 천지가 영구하리라
영원무궁할 큰 창궁을 보고
누가 감히 또다시 아래로 내려갈쏘냐.”[2]

만약 정법수련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안일한 마음에 이끌리거나, 소극적이 되어 분발하지 못하거나,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사람의 수련상태는 아주 중요한데 수련이란 물을 거슬러 배를 모는 것이라 나아가지 않으면 바로 후퇴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정진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법을 잘 배우고, 연공을 잘하며, 마음을 잘 닦는 것이 모두 다 아주 중요하다.

내가 알기에 많은 이들이 모두 새벽 단체 연공을 따라가지 못하면 늘 나중에 보충하려 하지만 일단 보충하려면 다른 많은 일들의 시간을 차지하는데 정법노정을 따라가기가 아주 어렵다. 연공이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법공부와 마음 수련 방면에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물론 매 사람마다 길이 다르고 수련이란 또 큰 파도가 모래를 이는 과정이라 남는 것이야말로 진금(真金)이다. 어떻게 법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진정으로 감성적인 인식에서 이성적인 인식으로 넘어가, 법에 입각해 법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법의 장엄하고 신성함과 정법수련의 수승함을 인식할 수 있고 정법수련의 기연이 아주 드문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만고의 기연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수련과 정법은 엄숙한 것이다. 이 한 기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사실 바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 한 기간은 길지 않을 것이지만 도리어 부동한 층차의 위대한 각자(覺者), 불(佛)ㆍ도(道)ㆍ신(神)과 부동한 층차의 주(主)의 위덕을 단련해 낼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느슨히 하는 한 수련자로 하여금 이미 굉장히 높은 층차에서 하루아침에 망가지게 할 수 있다.”[1]

“대법제자가 사악의 박해 중에서 잘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느슨히 한다면 아마 지금까지 이룬 공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1]

우리는 원고(遠古)시기 아득히 먼 체계(體系)로부터 걸어왔고 지구상에서 이미 천번 만번 생생세세 윤회를 거쳤다. 이번 일세(一世)는 최후 일세(一世)이니 다시 말해 가장 관건적인 일세(一世)다. 속담에 바구니와 소쿠리를 엮는 것은 전적으로 마무리에 달려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관건적인 마무리시기에 처해 있다.

어떻게 이 일체를 대할 것인지 마땅히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잘하면 영원히 우주에 새겨질 위덕(威德)을 세울 것이며 잘하지 못하면 아마 지금까지 이룬 공(功)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하루아침에 훼멸될 것이다. 바로 이렇게 관건적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가? 한편으로는 법(法)을 투철히 배우지 못해 진지하고 계통적으로 법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수련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현재 수련상태를 돌파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상태 속에 처해 있다.

나를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큰 박해를 3차례 받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렇게 수련해선 안 되며 반드시 법을 투철히 배워 법리(法理)가 명석해진 후 어떻게 수련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늘 구세력의 박해 속에서 맴돌 수 있는가?

석방된 후 나는 아주 진지하게 법을 배웠고 내 사상의 움직임을 아주 진지하게 찾아냈다. 전에는 감히 마주하거나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집착들을 한 차례 한 차례 전부 정리했다. 과거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곳이라면 모두 다시 떠올리고 추적하며 추적해서 제거했다.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사일념(一思一念)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청리(淸理)와 정리를 통해 나는 몇 가지 사유방식을 총괄해냈다. 생겨난 관념을 이번에 나는 모순이 오기를 기다린 다음에 다시 수련하지 않았고 주동적으로 제거했다. 사상 속에 떠올랐다면 곧 물질이 존재하는 것으로 바로 이 방면의 집착이 있는 것이다. 이에 그것을 배척하고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늘 “主意識(주이스)가 강해야 한다”를 외우자 나의 주이스가 갈수록 더 명석해졌고 갈수록 더 강해졌다.

법 공부 중이건 연공 중이건 사회에서건 오직 좋지 않은 염두가 나오기만 하면 나는 단번에 그것을 잡아 쥐고 신속히 제거할 수 있다. 특히 포륜(抱輪)할 때 늘 일종 “오묘한 듯 깨달은 듯(似妙似悟)”한 상태에 들어갔고 영감과 지혜가 끊임없이 솟구쳐 나왔다. 나는 이것은 바로 열심히 마음을 닦은 후에 사부님께서 주신 지혜라고 본다.

여기서 내가 총괄한 3대 사유방식을 동수들에게 참고와 귀감으로 삼도록 제공한다.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문제가 있다면 시정해주기 바란다.

첫 번째: 수련인의 사관(死關), 두려운 사유방식

이것은 사실 단지 두려움만이 아니라 놀람, 의심, 두려움, 근심을 포함하며 모두 이런 사유방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두려운 마음은 수련인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사관(死關)이며 반드시 시시각각 제거해야 하며 느슨히 해선 안 된다. 두려운 마음은 의심과 놀람을 통해 표현되어 나오는데 육욕(六欲) 중에서도 특히 눈과 귀 2가지 욕(欲)으로 표현되는 게 가장 강렬하다.

가령, 경찰차를 보거나 경찰을 본다거나 박해문장을 보는 등등, 이것을 의심하고 저것을 의심하는데, 문소리만 들려도 놀라거나 또는 누가 뭐라고 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놀란다. 또는 칠정(七情) 중의 근심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을 근심하고 저것을 근심하며 우울해하고 걱정한다.

오직 이런 정서가 나오기만 하면 그럼 반드시 곧 배척해야 하며 심지어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나 목소리 등이 나오는 것도 모두 구세력이 넣은 것이니 반드시 전부 부정하고 배척하며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수련이다! 사유 중에서 이런 좋지 않은 것들을 구별하고 배척하는 것이 수련이 아닌가? 이는 주이스를 강화하는 것이 아닌가? 심성이 올라가면 공도 그만큼 자라 오르는 것이 아닌가? 심성이 얼마나 높으면 법리(法理)도 자연히 당신에게 그만큼 펼쳐질 것이며 언제든 법을 볼 때, 연공할 때, 심득을 볼 때 늘 새롭고 늘 이전과는 달라진다.

두 번째 사유방식: 색정욕(色情慾)

이것은 현재 그야말로 재앙을 이룰 정도로 넘쳐난다. 핸드폰을 열기만 하면 곧 뛰쳐나온다. 당신의 사유가 그것을 따라가선 안 되며 당신은 경계해야 한다. 이런 색정욕을 배척해야 하고 예의가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하며, 생생세세 양성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 지금의 사람은 핸드폰을 떠날 수 없는데 당신이 화면을 열기만 하면 당신을 자극하는 문자나 화면이 당신을 유혹한다. 당신이 멈출 수 있는가? 그것을 누르지 않고 들어가지 않고 유혹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의 칠정육욕 중에서 눈과 귀를 단속할 수 있는가?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가장 먼저 때려죽인 것이 바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적(六賊)이었다. 이 육적을 없애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세 번째 사유방식은 안일이다.

이는 여러 방면에서 표현된다. 사람의 뼛속에서나,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사유 속에서도 모두 이것이 있다. 사람은 안일을 추구하는데 바로 편안하고자 한다. 수련인은 사람 중에서 시시각각 이 방면에 주의해야 한다. 하늘의 도(道)는 부지런한 이에게 보답하는데 수련인은 하늘의 도를 따라야 하며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먹을 것을 탐하고 잠을 탐하고 안일을 탐하다 끌려간 많은 동수들은 이 방면을 단속하지 못해 훼멸되었다.

“만약 당신들이 지금까지 아직도 정법제자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현재의 마난(魔難)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없으며 인간 세상의 안일(安逸)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끌려 사오(邪悟)할 것이다. 사부는 떨어져 내려간 그러한 사람들을 줄곧 아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수가 이런 마음에 이끌려 망가진 것이다.”[1]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은 우리를 청성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안일한 마음이 얼마나 두려운지 알 수 있다. 수련인은 첫 시작부터 이런 관념을 바꿔야 하는데 만약 바꾸지 못하면 그럼 사람이 될 수 있을 뿐 진수(真修)라 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홍음》 첫 번째 시에서 말씀하셨다.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
몸 고생은 고생이 아니나니
마음 수련이 가장 어렵도다
고비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데
곳곳마다 마(魔)로다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겠노라
세상 고생 겪을 대로 겪나니
세간 벗어나면 부처로다”[3]

이는 수련인과 속인의 근본적인 구별이다. 고생을 겪는 것과 안일에 대한 문제에서 속인의 이치는 반대로 된 이치(反理)이고 대법만이 바른 이치(正理)・정법(正法)・정도(正道)다. 천백 년간 인간세상에서 윤회하면서 이 관념이 그야말로 뿌리 깊이 박혔다.

나는 이 관념을 개변하지 않은 동수들에게 시험 삼아 한번 고생을 겪어볼 것을 건의한다. 행동으로 표현해 보라. 설사 가짜로 고생을 겪더라도 한번 고쳐보고 지속해서 하다보면 당신의 행동이 곧 당신의 관념을 진짜로 만들 수 있고 최후에 당신은 정말로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한번은 내가 농장에 가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여름이나 날이 무척 더웠고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옥수수 알을 마당에 펼쳤다. 쇠로 만든 가래로 옥수수 알을 뒤집어야 했다. 몇 번을 하고 나니 정말 움직일 수 없었다. 나중에 소조(小趙 역주: 조 씨 성의 나이 어린 동료)가 끝까지 버티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고생이 두렵지 않다. 가장 피곤한 때에도 계속했는데 결국 점차적으로 그리 피로하지 않게 되었고 또 그리 고생스럽지 않았다. 바로 행동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하니 극복할 수 있었다.

또 몇 차례 돼지 사료를 날랐다. 큰 화물차 한 대 가득 30~40톤이 실려 있었다. 한 포대가 40kg인데 차에서 내려 실내로 옮겼다. 때로 세 사람이 했으니 한 사람당 10톤을 나른 것이다. 정말로 이를 악물고 했는데 좌측 어깨가 아파서 안 되면 우측 어깨로 바꿔서 했다. 이런 일을 종종 새벽 2~3시까지 했다.

당시 경험을 생각해보면 그 반년간의 단련은 확실히 나의 안일한 마음을 많이 없애주었고 더 중요한 것은 적지 않은 관념을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이다. 셋방을 얻을 때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을 발견했는데 아마 이 역시 점오(點悟)일 것이다. 그 집 창문 커튼 도안이 뜻밖에도 온통 빽빽한 만(卍)자였는데 적어도 300~400개 이상이었다.

이런 3대(三大)사유방식이 우리 두뇌를 점거하는데 최종적으로 그것들의 뿌리는 여전히 사(私)이다. 물론 또 일부 다른 것들이 있는데 당문화(黨文化)와 같은 것이다.

한 사유가 이런 속에 떨어졌다면 다시 말해 이런 것을 간파한 후에는 전면적이고 시시각각 끊임없이 주동적으로 이것들을 배척해야 한다.

나는 반년간의 착실한 수련을 거쳐 수련상태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수련이 처음과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고 시시각각 심성(心性)을 닦았는데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늘 일사일념(一思一念)을 닦을 수 있었다. 두려운 마음을 닦아버리자 또 과감하게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다. 프린터를 사서 집안에 자료점을 만들었고 직접 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얼굴을 맞대고 진상을 알리는 동수들과는 아직 차이가 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다만 마음이 훨씬 담담해졌다.

정법수련의 위대함과 수승함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구세력은 박해할 자격이 없으며 심지어 그것들의 존재마저도 근본적으로 부정해야 함을 알았다. 나는 자신이 정법수련의 길에서 돌비맹진(突飛猛進)함을 느끼는데 집착이 밤을 넘지 않게 되었고, 짧은 시간에도 법을 배우고 연공하면서 도를 깨달을 수 있었고 층차가 신속히 제고되었고 더욱 고층차를 향해 돌파할 수 있었고 보다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수련의 길은 서로 다르며 이상은 개인의 일부 체회일 뿐이다. 법을 스승으로 삼고 부족한 곳은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정진요지 2》<정법시기 대법제자>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홍음 2》<대궁을 구하다>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홍음》<마음고생>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