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자비심으로 동수를 대하자

궁소(穹霄)

【정견망】

최근 들어 여러 사람이 내게 비슷한 유형의 말을 했는데 의미인즉슨 아무개를 수련인으로 여기지 말라, 때때로 하는 일이 일반 속인만도 못하다거나 또는 아무개는 어디어디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동수도 있고 일반인도 있으며 동수 가족도 있었다.

안으로 찾아 자신이 어느 방면에서 속인만 못하게 했는지 찾아보는 외에 나는 또 생각해보았다. 평소에 나는 비교적 수구(修口)를 중시해왔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의론하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모두 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왜 모두 나한테 말하는가?

나중에야 자신의 사상 중에 이런 염두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동수가 어느 방면에서 잘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가 한 것이 일반 속인만 못하다고 보면서, 확실하진 않지만 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고등학생 때 학교 근처 거리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어느 한 옷가게에서 들려온 ‘사은송(師恩頌)’이란 노래를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 가게에 들어가 점주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노래는 정말 듣기 좋네요. 우리 집에도 이 노래가 있습니다.”

당시 나는 집을 떠나 외지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은 모두 속인이었다. 문득 부근에 어떤 사람이 나와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아주 큰 격려와 위로를 느꼈던 것이다.

그때는 동수를 만나기만 해도 늘 친근감을 느끼며 서로 아꼈는데, 동수가 잘 닦고 못 닦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대법을 수련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이런 느낌이 없는가? 도리어 모두 함께 있으면서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동수는 어떻고 저 동수는 어떻다는 것일까?

1. 밖으로 찾고 법으로 자신을 닦지 않으면서 법으로 동수를 가늠함

전에 이런 체험이 있었는데 같은 일이라도 속인이 한 일에는 큰 반응이 없지만 동수가 한 일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령 핸드폰을 보는 문제에서 수련하지 않는 가족이 핸드폰을 보면 비록 좋지 않다는 생각에 권고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련하는 가족이 하루 종일 핸드폰을 들고 노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권고해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더욱 괴로웠다. 늘 어떤 방법을 써서 그가 이런 행위를 하지 못하게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모순을 격화시켰다.

나중에 나는 차라리 소극적인 태도로 됐다. 상관하지 말자, 나는 내 길을 가면 그만이고 그가 수련을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면서 머릿속에 좋지 않은 것을 주입한다 해도 나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자신이 이렇게 하면 옳지 않음을 알았는데 이 일에서 나는 또 강렬하게 밖을 보면서 안으로 찾지 않았다.

왜 속인과 동수가 핸드폰을 갖고 노는 일에 대해 나는 전혀 다른 태도로 대했는가? 이는 내가 속인과 수련인을 부동한 표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일방적으로 동수는 마땅히 모든 방면에서 수련인다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망각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잘 닦인 부분은 격리되었고 잘 닦이지 못한 그 부분은 사실 속인과 마찬가지란 점이다.

이외에도 나는 법에서 수련인은 마땅히 핸드폰을 갖고 놀지 말아야 한다고 깨달았다. 이는 나의 인식이고 그럼 나는 마땅히 이런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하며 핸드폰을 갖고 놀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는 당시 나 역시 핸드폰을 갖고 놀았는데 단지 그 시간이나 정도가 가족 동수와 달랐을 뿐이다. 즉 내게는 여전히 일종의 요행심이 존재했는데 자신이 적게 노는 것은 상관 없고 동수가 많이 노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대조해보지 않고, 오히려 법으로 동수의 행동을 가늠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모순을 격화시킬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보는 동수의 모습은 자신의 거울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유사한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 마음이 움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마땅히 무조건 안으로 찾고 자신을 닦아야 하며 밖으로 보면서 남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 선의(善意)적으로 직접 지적해주되 배후에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2. 입장을 바꿔 동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못함

많은 때 나는 아주 쉽게 자신의 각도에서 동수가 봉착한 관(關)과 난(難)을 대한다. 가장 직접적인 생각은 바로 나는 이 관을 단번에 지나갔는데 그는 어째서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내려놓지 못하는가?

나중에 내가 깨달은 것은, 사실 매 사람의 길은 모두 다른 것으로 매 사람의 역사와 누적된 업력 및 형성된 관념이 다르며 매 사람의 금생의 생활환경도 다르다. 그렇다면 같은 마난에 대해 이 방면의 저애력이 비교적 적은 사람은 아마 단번에 넘길 수 있겠지만 역사적인 요소가 비교적 복잡하거나 금생에 관련된 업력과 관념이 비교적 많은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관을 넘는 시간이 비교적 길 수 있다. 우리가 본 것은 그의 제거되지 않은 집착심인데, 사실 그는 이미 아주 노력해서 자신을 닦고 있고 아울러 이미 아주 많이 제거했음을 우리가 모를 수 있다.

전에 한 동수가 다른 한 동수가 어떠어떠하게 나태한 생활습관이 있고 어떻게 속인과 다르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 동수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감정불화 때문에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아온 것을 안다. 나는 갑자기 분명해졌는데, 사실 그 어떤 하나의 집착심이나 관념은 사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한 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이런 환경이나 경험은 모두 억지로 더해진 것이다.

가령 이익심(利益心)이 중한 사람은 아마 전에 아주 오랫동안 경제조건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살았을 것이고, 두려움이 심한 사람은 아마 엄중한 박해를 받았을 것이며, 당문화(黨文化)가 중한 이는 아마 줄곧 당문화 환경 속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내가 동수의 각도에 서서 관련된 문제를 보니 그런 못마땅하게 여기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직 매 사람마다 다 자신이 넘기 어려운 관이 있으며 아울러 서로 다르지만 아무리 넘기 어려워도 모두들 여전히 세 가지 일을 견지하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본다.

3. 동수의 부정확한 상태를 동수 자신으로 여기지 말아야

일찍이 사부님께서는 《푸왠선(副元神) 관련 문장이 일으킨 파동에 관해》에서 “사실 대법과 대법제자의 정념에 부합되지 않는 일체 것들은 모두 구세력이 참여하여 조성한 것으로, 자신의 바르지 않은 일체 요소를 포함하는데, 이것이 바로 왜 내가 발정념을 대법제자의 세 가지 큰 일 중의 하나로 했는가 하는 이유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읽고 나는 부정적인 의기소침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전에 각종 대법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상태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며 모두 구세력이 억지로 더해 조성된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다면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동수의 부정확한 상태는 동수 진아(真我)의 표현이 아니며 이 역시 구세력이 억지로 더해 조성된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보았다. 내가 한 차례 또 한 차례 넘어졌을 때 사부님께서는 왜 늘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을까? 내가 깨달은 것은 사부님께서는 진정한 내가 어떠한지 아시고, 내가 법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고 얼마나 힘겨웠는지 아시며, 내가 어떻게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세상에 내려왔는지 아시며, 이런 각종 집착관념은 모두 진정한 내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수 역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동수를 포함해서 자비롭게 중생을 대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호주수련생에 대한 설법》 비디오)

우리 사부님 말씀에 따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동수를 대하고 수구하면서, 뒤에서 동수를 말하거나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맙시다.

개인의 깨달음으로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