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옥(美玉)
【정견망】
창세주(創世主)와 함께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고 대법제자로 될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전법륜》에서 사존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전법륜》을 다 읽었을 때 첫 번째 감수는 바로 정말로 너무나 완벽하고 원만하다는 것으로 이는 창세주께서 오신 것이다.
생명의 번잡함은 마치 하늘의 별과 같은데 층층 우주에는 층층 하늘이 있고, 층층 중생에 층층의 신(神)이 있다. 천지만물의 탄생과 소실은 질서 있게 각자의 배역을 연기한다. 시간은 영원히 멈출 수 있고 또한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니 오고 가는 흔적도 없이 신적의 일부를 펼쳐낼 수 있다.
‘자비(慈悲)’는 상계(上界) 생명의 특성으로 만약 변하게 되면 곧 층차가 떨어진다. 가령 사람을 말하자면 ‘선량(善良)’을 잃는다면 그럼 요마귀괴(妖魔鬼怪)와 마찬가지 존재가 된다. 부동한 생명특징, 부동한 생명의 귀속은 모두 자신의 한 차례 한 차례 선택 속에 뿌리를 심은 것으로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안으로 자신의 잘못을 찾고 처음 생각을 되찾고 본심(本心)을 되찾으며 진정한 자신을 되찾아야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법은 세상에 널리 전해졌고 사존(師尊)께서는 우리에게 일체 진리를 알려주셨는데, 우리에게 일체 천기(天機)를 알려주셨다. 마침내 하늘로 되돌아갈 희망이 생긴 것이다.
수련(修煉)이란 영원한 하나의 화제다. 누가 당신에게 수련을 가르칠 수 있고 누가 수련을 알며 누가 진정으로 하늘로 돌아갔고 누가 또 보았는가? 그러므로 사람은 종종 ‘선량(善良)’과 ‘위선(僞善)’ 속에 뒤얽히고 믿음과 불신, ‘내려놓음’과 ‘얻음’에서 늘 흐릿한 육안을 통해 그것들을 뒤섞는데 종종 한차례 혼란이다.
그럼 왜 뒤섞어야 하는가? 뒤섞을 필요가 없다. 진정한 수련인이라면 내려놓았다면 내려놓은 것이고 얻었다면 얻은 것이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품고 사심(私心) 속에서 배회할 필요가 없다. 사심은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손해를 보면 또 좀 어떤가? 내려놓기만 하면 바로 온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가? 어디 진정으로 도를 얻은 사람 중에 인간 세상에 뒤얽힌 이가 있는가?
만약 대법 속에서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금생에 겪은 일들이 아마 나를 미치게 만들거나 사람을 죽였거나 정신병에 걸리게 했을 것이다. 나는 비록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어쩌면 귀신만도 못한 인간쓰레기로 추락했을 지 모른다.
지난 20여 년의 수련 중에서 사존께서는 종래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내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가호해주셨고 조심스럽게 이끌어주셨다. 물론 이것은 형용으로 다른 적합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이는 또 무슨 정(情)이 아니고 집착도 아니며 거대한 자비이자 홍대(洪大)한 불은(佛恩)이다.
나는 비록 사부님 신변에 있지 않아도 사부님께서 홍대한 자비로 널리 비추시는 따스함과 이것이 내 몸에 비추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천인합일(天人合一) 때의 특수한 친연(親緣)을 지녔기 때문에 주불(主佛)과 아주 가깝다고 느낄 수 있었고 주불이 아주 친근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매번 이럴 때마다 나의 모든 억울함과 모든 근심걱정이 녹아버렸다.
모든 부면(負面) 물질이 몰려와 마치 나더러 악(惡)을 선택하고 증오를 도발하도록 핍박하는 것 같을 때 ‘선악(善惡)의 대결’과 ‘정사(正邪)대결’을 고험할 때 나는 최종적으로 선(善)을 선택하고 정(正)을 선택했다. 나는 ‘악’을 원하지 않으며 정과(正果)로 성취하고자 한다. 내가 만약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실패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악은 결국 패배하고 가아(假我)는 실패하며 구세력은 실패할 것임을 안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렸다(人命關天)”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모두들 매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만약 금생금세의 생명이 모두 간단하지 않고, 정신(正神)이 난세(亂世) 속에 수련 성취되고 있는데 조사정법(助師正法)하는 대법제자가 어찌 나태해질 수 있겠는가?
패괴(敗壞)된 생명이 우주정법을 마주할 때의 오만방자함은 그것들의 종말을 결정짓는데, 온갖 나쁜 짓을 다함에 따라 자신을 훼멸하고 대응하는 체계 및 생명과 연대해 깡그리 사라져버리고 처량하고 황량해질 것이다. 마왕(魔王)이 제아무리 강력해도 결국은 마(魔)일 뿐이며 사악은 저절로 해체될 것이다. 이는 우주의 법칙이다. 마치 썩은 사과가 오로지 점점 더 부패해 주변을 해치고 나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힘이 더욱 강대해진다고 느끼겠지만 사실은 헛수고로 결국에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좋은 사과를 옮기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 진상을 똑똑히 알게 하면 바로 이 독(毒)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창세주의 위덕(威德)은 무한하고 법력은 무변(無邊)하며 지혜는 바로 진리와 천기(天機)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상(真相)인가?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가 바로 진상이다.
사존께서는 정법시기에 시종 일체 ‘생명’에게 기회를 주셨다. 앞길을 똑똑히 인식할 기회를 주셨는데,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내원은 평등한 것이고 우주는 선악(善惡)이 함께 존재한다. 원수처럼 악(惡)을 미워함은 진정한 각자(覺者)가 아니며 울음이나 오만은 합격한 수행자가 아니다.
생명(生命)이라 생명이 태어나려면 명(命)이 있어야 한다. 누가 ‘태어나는가’와 생생세세는 명(命)으로 와서 명으로 가는 것이다. 명(命)이란 글자는 이미 미혹의 끝까지 풀어냈는데 사람이 포복하며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야말로 바로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의 본질을 위배하면 바로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 생명의 쇠락과 부패가 시작되는데 따로 징벌하지 않아도 저절로 훼멸된다.
[역주: 한자 명(命)의 어원은 큰 집 아래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다. 또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늘의 명령을 공손히 따르는 모습이다. 저자는 티베트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할 때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모습이 명(命)을 구체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풀었다.]
이렇게 본다면 티베트 사람들이 신(神)을 숭배하는 방식이야말로 정확한 것이다. 그들은 포복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생명의 본원으로 돌아간다. 이는 바로 명(命)이란 글자를 구체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들이 경전통[역주: 마니차]을 돌리는 것 역시 정확한 것으로 자신이 생생세세 윤회해 왔음을 일깨우며 최후에 명(命)을 알고 포복하며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들은 경건하기에 하늘에 대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길 청한다. 생명이 되돌아갈 수 있다는 바람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희망이다. 다시 말해 수련해서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생명은 모두 살려고 하며 죽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죽으려 하고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사악이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럼 곧 죽음이다. 하고 싶다면 멋대로 해보라, 패괴한 생명에게 무슨 좋은 집착이 있든 여전히 악취만 날 뿐이다. 가급적 빨리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좋다.
전에 티베트 관련 모 프로에서 그들의 행동을 보고 나는 좀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속으로 비웃고 경멸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나도 신앙이 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사실 나는 전혀 그 경지(境界)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보따리를 내려놓지 못했고 자아의 체면을 내려놓지 못했으며 더러운 이 몸을 내려놓지 못했으니 자신이야말로 우매(愚昧)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글을 쓰면서 비로소 명백해졌다. 무릎을 꿇고 포복하면서 예불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보았는데 ‘불필요’하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본이다. 한 생명이 사람 속으로 추락해왔는데 무슨 자격으로 ‘불필요’하다고 말하는가?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수련인은 그 어떤 형식적인 경배(敬拜)도 필요 없으며 오직 진정으로 수련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로서 진정으로 수련한다면 수련상의 일에 명백해야 한다. 아직도 사람의 관념을 품고 신성한 수련을 대하는가? 그렇다면 진정으로 정정당당한 수련인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나는 티베트의 신앙방식을 배우자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수련인의 체회를 교류하려는 것이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렸다(人命關天)”고 하는데 사람의 명(命)은 정말로 하늘과 관련이 있다. ‘명(命)’과 ‘천(天)’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진상(真相)은 생명이 바로 천명이란 것이다. 사람은 생명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천명이다. 하늘에서 왔고 하늘에서 태어났는데 층층마다 하늘이 있다. 사실 관(關)자 역시 특수한 의미가 있는데 남천문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 다시 태어남은 대법을 얻은 후부터 시작된다. 한 생명이 만약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들을 수 없다면 그럼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겠는가. 왜냐하면 그는 소멸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면 그럼 또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이니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0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