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음(德音)
【정견망】
최근 《홍음•도(道) 중에서》를 공부하다가 차별 없는 경계(境界)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저 상(相)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며 표면적인 차이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며 세간의 그 어떤 표상(表象)에도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도(道) 중에서
마음에 두지 않으니
세상과 다툴 것 없도다
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니
미혹되지 않는도다
들어도 듣지 못한 듯이 하니
그 마음 혼란하지 않도다
먹어도 음미하지 않으니
입의 집착 없도다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
늘 도(道) 중에 있도다
고요하되 생각지 않으니
현묘함을 알 수 있도다
이는 또한 자신도 모르게 《도덕경 제2장》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만 알면 이것은 추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두 선한 것이 선한 줄만 알면 그것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악(惡)의 유래는 바로 미추(美醜)와 선악(善惡) 등의 개념을 구별하는 것에서 나온다. 생각해보라! 만약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이 있다면 인위적으로 장단점을 만들어 내어, 아름다운 것은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 오만해져서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게 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냉대를 당해 자신을 비하하며 움츠러들게 만든다. 사회 전체가 겉모습이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며 심령(心靈)의 아름다움을 소홀히 여긴다면 이는 악(惡)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 구별하는 선악(善惡)이 꼭 진정한 선악은 아니다. 인간이 판단하는 사람의 입장은 모두 주관적인 것으로 자아 이익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렵다. 마치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에서 선발한 인원이 모두 각자 대가족(大家族)의 사람인 것과 같다. 다른 부귀빈천(富貴貧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은 명실상부 사람을 더욱 분열시킨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정을 위하는 자 스스로 번뇌를 부르나니”(《홍음》〈사람 되기〉)
우리는 본래 청정자재(清淨自在)한 것으로 모든 구별은 다 스스로 번뇌를 부르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나 타인이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여 그 어떤 사물에 대해서든 마음이 움직인 것을 감지했다면 여기에는 하나의 관념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한 사람이 거리를 걸어가면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의 관념이다. 왜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느끼는가? 내심이 평온하고 충실하다면 외롭다는 개념이 없을 것이다. 내심(內心)이 공허한 사람만이 혼자 있을 때를 두려워한다.
가령 우리 아버지는 늘 나를 또래들과 비교하는데 다른 집은 애들이 이미 다 컸다고 한다. 이 역시 스스로 번뇌를 부르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이것도 관념이다. 연분이 닿지 않는데 억지로 구해선 안 된다.
가령 우리 아버지는 남들이 물건을 함부로 놓는다고 원망하는데 이 역시 관념이다. 물건을 어디에 놓은들 안 될 것이 있는가?
아버지는 말끝마다 늘 원망이 있고 하나의 관념을 품는데 내가 보기에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번뇌를 불러오는데 천재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말을 한들 새로운 의견이 얼마나 되는가? 그저 아버지의 화만 더할 뿐이다.
물론 우리는 변증법적으로 문제를 보아야 하며 최대한도로 속인 상태에 부합해서 수련해야 한다. 비록 속인의 원망이 관념에서 나오긴 했지만, 그중에는 또 우리가 수정할 부분도 있다. 그에게 관념이 있다고 해서 그의 의견을 무시해선 안 되며, 겸허하게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수(修)란 자신을 닦는 것이지, 남을 닦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관념이나 집착을 발견했다면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지 대조해보는 것이야말로 더욱 중요하다.
구별하는 마음은 쇼핑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책을 사면서 종이 질, 장정, 조판을 보는데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전자책은 브랜드, 기능, 외관, 무게, 화면 크기, 해상도, 백라이트…. 다양한 요구가 있는데 이 역시 사람에게 구별하는 마음이 있어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각종 업종에서 치열한 내부 경쟁은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의 반응이다. 사람은 영원히 만족을 얻지 못하며, 영원히 더 큰 이윤을 추구한다.
사람이 만약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안다면, 본분(本分)을 지키며 살아갈 것이며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노자(老子)가 말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과 같다.
개인의 인식이니 잘못이 있다면 부디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20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