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한 물체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이 물체는 더 견고해진다. 그렇다면 한 수련인이 더욱 잘 닦을수록, 그의 능력은 더욱 커지고 에너지장도 더 강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떠한 문제에 부딪혔더라도 첫 생각에 우선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바, 이것을 “안으로 찾는다.”고 한다.”[1]
법(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안으로 찾음’은 우주운행이 원용불파(圓容不破)하는 기제다. 사람은 소우주이고, 무수한 소우주가 대우주를 구성한다. 대법제자가 짊어진 책임은 심원(深遠)한 의미를 지니기에 대법제자의 수련 상태는 대법이란 이 정체(整體)와 직결된다. 당신이 안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찾을 때 당신은 바로 대법을 원용하는 동시에 대법에서 자신의 부족을 바로 잡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분자 역시 가장 작은 입자가 아니며 그것 아래에 또 원자가 있는데, 확대한 후 보면, 입자가 존재하는 방식은 역시 천상의 별들과 같은 것으로, 역시 그 층의 하늘이다. 원자도 가장 작은 것이 아니며 그것 아래에는 또 더욱 미시적이고 더욱 미시적이며 더욱 미시적인 입자가 있다. 층층의 입자는 바로 층층의 하늘이며 입자가 더 세밀할수록 그것의 위력은 더욱 크다. 물리를 배우는 사람은 더 세밀하고 입자가 더 미시적일수록 방사성이 더욱 크고 힘(力量)도 더욱 크며 에너지도 더욱 크다고 말한다.”[2]
현재 층차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원만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것으로 우리의 수련 환경,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우리 수련 범위 안에 있는데 특히 우리 가족은 우리와 더욱 인연이 가장 깊다. 만약 가족이 모두 대법제자라면 그것은 대법의 인연이 우리를 하나로 이끈 것이다.
우리 가족은 바로 대법과 연(緣)을 맺었지만 생명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견해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관념으로 상대방을 가늠할 때 종종 상대가 반감을 갖게 만들고 제거되지 않은 사람 마음이 자신을 방해한다. 가족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는 종종 매우 화가 나며 때로는 원망한다. 내가 가족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여기고 내 생각에 따라서 하면 반드시 되리라 여겼기에 상대방을 개변시키려는 생각이 아주 강했다. 하지만 내가 강하게 표현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더욱 반감을 갖는데 이런 극단적인 방법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아주 어렵다. 매 사람은 다 독립적으로 생각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문제를 보는 각도가 다 다른데, 어떻게 나의 것으로 남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법에 대조해 자신을 찾아보니, 자신의 과시심 때문에 생긴 것임을 발견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 수련했고, 법리를 명확히 깨달았다고 여겨 생각해 우쭐거렸다. 이렇게 낭비한 시간을 보고, 정진을 몰랐던 것을 보니, 사람의 물건이 많았고, 이익심이 무거웠다. 자신의 부족을 안으로 찾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반대로 눈을 밖으로 향해 상대를 보았는데 사실 자신의 장(場)이 순정하지 않은 것이다.
가족이 나타내는 소위 표현은 마치 하나의 거울처럼 나의 부족을 비춰주는데 밖을 향해 보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내 수련을 가로막았다.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얼굴 표정이 선량하지 않고 일을 함에 원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자아(自我)를 주장하고 사람의 관념을 고수해 내려놓지 못하는데 관용심이 없고 타인의 감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나의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가족들이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에 때로 가족이 나의 부족을 알려줄 때, 나는 또 속으로 원망하면서 나를 트집 잡는다고 여겼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속으로 억울했는데, 모순이 어느 정도 쌓여 폭발하면 이때 나는 또 모순 속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해서 타났는데 내적인 소모로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지나고 나서는 또 후회하고 자책했다.
다행히 나는 교류체험 쓰는 것을 견지해왔다. 그 속에 빠져 아주 막막할 때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교류체험을 쓴다. 때로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지만 명백한 그 일면(一面)은 곧 쓰고 싶어 했다. 이 방면의 체험이 아주 많은데, 정말로 사부님께서 나를 가지해주시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문장을 쓰고 싶을 때면 아마 당신의 정념(正念)이 나왔을 것이다. 이 일념(一念)이 법에 부합하기 때문에 대법의 신기(神奇)를 드러낼 수 있고 사로(思路)도 막힘없이 통해 깨달은 법리는 끊임없이 교류체험 중에 펼쳐진다. 마치 문장을 쓰는 과정에 대법이 끊임없이 나를 씻어주는 것과 같은데 나 역시 점차 미망(迷茫)에서 걸어 나와 머리도 청성해진다. 이런 변화에 따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모순이 모두 해결되고 일체가 다 평화로워진다.
사부님의 가지(加持)하에 심성이 제고됨을 느끼고, 안으로 자신의 부족을 찾을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사람이 선량하게 변하고 심태도 평온해진다. 대법에 대조해 자신을 수련하고 모순에 직면해 자신을 찾으면 상대방의 소위 부족에는 내가 수련할 요소가 있다. 본 것이 가상(假相)인데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이 가상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부족을 수련했는가? 당신은 법의 기점에 서 있었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모순에 부딪히게 되면, 누구의 탓이든, 우선 자신에게서 찾는다. 한 수련자로서, 당신이 이런 하나의 습관을 양성할 수 없고, 당신이 사람과 반대로 문제를 볼 수 없다면, 당신은 영원히 사람 속에 있을 것이며, 최소한 잘하지 못한 그 일보의 당신은 사람 중에 있는 것이다.”[3]
당신이 점점 더 미시적으로 끊임없이 돌파할 때 당신의 에너지장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데, 이 과정이 바로 당신이 끊임없이 대법에 대조해 제고하는 과정이다. 당신이 아주 착실하고 착실하게 걷고, 매 걸음을 걸으면 당신은 곧 점차적으로 당신의 밀도를 증가시키고 점차 법의 표준에 도달하게 된다. 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고 깨달음도 다르며, 모두 다 각기 다른 수련환경이 있다. 대법은 가늠하는 표준이고 금, 은, 동의 분자 배열순서는 다른 것으로 수련인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수련 층차에 차이가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 알다시피, 수련은 누락이 없음을 중시한다. 당신이 누락이 있는데 그것이 당신을 하늘에 올라가게 하겠는가? 바로 이런 일이다.”[4]
현재 층차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수련에는 그 어떤 우연한 일도 없으며 조금씩 제고하는 것이 바로 질적인 변화이다. 당신은 마치 출항하는 범선처럼 모든 밧줄을 내던지고 떨쳐버려야 가뿐하게 나아갈 수 있고, 사부님의 지속적인 가호 아래 선천(先天)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작은 수련 깨달음이니 부당한 점이 있으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무엇이 대법제자인가》
[2] 리훙쯔 사부님 저작:《2016년 뉴욕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2019년 뉴욕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2019년 뉴욕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