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子新)
【정견망】
수련 층차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장에 만약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나(我)’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작디작은 한 개체 생명으로서 ‘파룬따파(法輪大法)’에 대한 인식을 한번 말해보고자 한다. 엄격히 말하면 그 어떤 생명도 ‘파룬따파’를 논하거나 평가할 자격이 없다.
수련자로서 ‘나’는 이곳에서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얻은 체회(體會) 및 수련인이 감성에서 이성으로 승화한 일종의 객관적인 인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체회는 수련 전에는 내가 전혀 인식할 수 없었던 영역이다. 즉 내가 수련을 했기 때문에 사유(思惟)와 심신(心身)이 점점 풍부해지고 확대되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나는 사존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은(感恩)과 무한한 경앙(敬仰)을 네 글자로 표현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하늘과 땅 사이의 작디작은 ‘나’가 예부터 지금까지의 ‘불은호탕(佛恩浩蕩)’을 체험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가지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소원(疎遠)해지신 적이 없는 바로 창세주(創世主)시다.
홍대(洪大)한 대법(大法) 앞에서 ‘나’는 궁우(穹宇)간의 생명으로서 마땅히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은 제아무리 선택한들 다른 길이 없으며 모두 창세주께서 육성하신 궁우(穹宇) 사이에 있다. 이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태어나면서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大法)’은 그 어떠한 생명의 모독도 용납하지 않는데, 자비와 위엄이 함께 존재해 일종 무형(無形)의 힘이 생명으로 하여금 ‘대법’에 경외심을 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양지(良知)다.
만약 생명이 이 순진(純真)한 천성(天性)을 어겨, 양지를 배반하고, 자신을 팔면, 마음속으로 ‘대법’에 대한 어떤 의문이 생기는데, 사실은 다 생명이 변칙적으로 자신의 타락을 달갑게 여기고 주의식이 강하지 못한 것으로 유혹과 고험을 견디지 못한다.
망망(茫茫)한 건곤(乾坤)에서 그 어떤 생명도 광란의 파도를 만회할 능력이 없으며, 구 창궁(蒼穹)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데려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는 대체 어떤 감당이며, 대체 어떤 법력(法力)이고 대체 어떤 자비인지 도저히 가늠할 방법이 없다. 이 일체의 일체, 이 일체를 돌이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세주뿐이다. 오직 창세주만이 모든 생명을 구도하시며 중생을 위해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와 새롭고 행복한 세계를 개창하셨다.
그렇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 설사 먼지가 될지라도 그것 역시 새로운 세계의 일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구우주(舊宇宙)가 없어지고 신세계(新世界)가 도래하면 모든 것이 겁난을 지나야 한다. 단지 생명의 경지와 층차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은 진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사람이 없다면 그럼 진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하늘에 순종해 따르는 것만이 생명의 천성(天性)일 것이다.
‘사(私)’는 구우주의 특성이고, ‘무사(無私)’는 신우주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지, 나조차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오직 구우주의 생명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의식하며 자신의 과거와 장래를 의식하는데 ‘사’를 품고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구 관념을 바꾼다는 것은 소우주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구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순응해 따라갈 뿐이다. 왜 하필 하늘을 거슬러 역행하면서 헛수고를 하는가?
‘나’는 창세주가 주신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바로 나인바, 나는 과거를 알고 싶지도 않고 장래를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단지 조용히 창세주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지금처럼 창세주와 같은 세상에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족함을 알면 즐거움이 오래가는 것은 생명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정념(正念)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 생명의 회귀(回歸)이고, 반본귀진(返本歸真)이며 이것이 바로 생명의 오랜 소원이다.
생명의 궁극적인 회귀란 무엇인가? 바로 한 줄기 푸른 연기가 무지개를 만나면 바람에 흩어져 두 개로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자신이 잘해서 잡념(雜念)을 내지 말고 근심을 위안으로 삼고, 의심을 믿음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 ‘명(命)’의 내원을 인식하고 ‘운명을 받아들임’이 생명이 귀진(歸真)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명’이란 창세주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