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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음”을 말하다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자: 사당이 대법제자에 대한 노동교양을 줄이고, 중형판결을 늘리기 시작하는데, 사악이 새롭게 대두한 것입니까?

사부: 약탕을 바꾸고 약제를 바꾸지 않는데, 사악은 수단을 다 썼다. 그것이 어떤 사악함이든 모두 사람에게 보여주었으며, 또한 사람마음에 보여준 것이다.”

사부님 설법을 보고 나는 자못 놀랐는데 특히나 “또한 사람마음에 보여준 것이다[也是给人心看的]”라는 단락의 법은 마치 처음 본 것 같았다. ‘사람마음[人心]’이란 두 글자가 아주 명확히 현현(顯現)되었다.

나는 이 기간에 사람마음에 대해 얕은 깨달음이 있어서 법(法)에 대조해 끊임없이 사람마음을 제거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단락의 법이 제자에게 보다 심층(深層)의 깨달음을 열어주셨다.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람마음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의 것으로 다시 말해 당신이 집착하고, 내려놓지 못하며, 중시하는 일종의 표현이다.

당신이 부딪힌 일체는 모두 당신의 마음과 관계가 있다. 때로 명혜망 대륙종합소식을 보면 사악이 여전히 악행을 저지르면서 대법제자를 괴롭히고 불법으로 대법제자를 납치하는데 때로는 70이 넘은 노인조차 놓아주지 않는 것을 본다. 매번 이런 기사를 보고 나면 나는 심정(心情)이 몹시 억눌려, 좀 두렵고 걱정스럽다. 사부님 설법과 대조해보면 이렇게 억눌리고 두려운 원인은 바로 사람마음이 조성한 것으로 사람마음이 있기에 당신더러 사람마음 이 한 층의 것을 보여준 것이다. 수련에 소질이 있는 대법제자라면 사람의 관념을 지니지 않기에 동수가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불법으로 납치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곧 정념(正念)으로 사악을 해체해 동수를 도우며 소극적이고 어쩔 수 없어하거나 심지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음을 제거하는 과정은 바로 사람 그 한 층의 껍데기를 타파하는 과정이다. 선천적인 본성이 후천의 변이물질에 오염되어 몸에 아주 두터운 먼지가 쌓인다. 선천의 본성으로 돌아가려면 사람의 껍데기를 깨고 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사람의 것을 제거할 수 있다.

생활하면서 수많은 요소들이 사람마음을 건드리는데 생명의 특성이 다르고 매 사람마다 집착하는 물질도 다르기 때문에 표현되어 나오는 사람마음 역시 다르다. 당신이 아주 집착하며 내려놓지 못하는 어떤 일에 대해 아마 다른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을 수 있지만 그는 오히려 당신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일을 제거하기 어려워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불완전한 상태를 원용(圓容)하고 자비로 대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선의(善意)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모순 속에서 자신의 부족을 찾을 수 있는데, 누가 사람의 껍데기를 깨뜨릴 수 있다면 사람마음이 더욱 줄어들고 정념이 더욱 강해져 수련 층차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나의 깨달음은 이렇다: 주변 사람들의 언담거지(言談擧止 말과 행동)가 당신을 건드릴 때 또는 생활 속의 어떤 일들이 당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을 때, 당신의 첫 일념(一念)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원래 자신이 곧장 화를 내거나 또는 감정이 건드려져서 마성(魔性)이 크게 폭발한 것인데 지나고 나면 또 후회한다. 하지만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에 부딪히면 여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심성을 지키지 못한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법을 잘 배워야만 끊임없이 사람마음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사람마음이 그렇게 강렬하지 않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두려운 마음을 폭로시키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상대방의 연기는 아주 정확하고 훌륭해서, 그가 연기한 장면이 마치 나를 위해 맞춤 제작된 것 같다. 나의 한계가 얼마만큼 높으면 두려운 마음이 곧 그만큼 큰 것으로 상대방은 마치 하나의 거울처럼, 사각(死角) 없이 자신의 몸에서 녹이 슨 곳들을 비춰준다. 이런 장면을 보면 나 역시 좀 놀라운데 수련은 정말 신기(神奇)하다. 당신 공간장의 아주 작은 흠집이 다른 공간에서 보면 아주 진실한 것으로 정말이지 신(神)의 눈은 번개처럼 모든 것을 환히 비춰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나의 명백한 그 일면(一面)을 가지해, 진아(真我)가 주인이 되게 하셨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는 일을 마주해 내 마음은 아주 평온했는데 상대 생명의 특성이 감출 수 없고 솔직한 것을 생각하면 생명이 각기 다른 궤도에 따라 걸어가도 그가 어떠하다고 원망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의 입만 단속하면서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이끌리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다.

이런 상태가 아마 법에 부합할 것인데 당신이 대법에 따라서 할 때면 몸이 아주 가볍고 사상에 아무런 잡념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편안하고, 즐겁고, 상화(祥和)하며 자비로운 상태다. 밤에 꿈을 꿨는데 꿈에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해 주셨다. 당신이 진정으로 제고해 올라갈 때면, 당신 주위의 모든 것이 당신의 제약 속에 있는데 당신은 이미 이런 능력을 갖췄다. 제자는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제자를 격려하고 제자에게 진정한 수련은 사람마음을 제거해 완전히 위타(爲他)한 생명이 되어야 한다고 알려주시는 것임을 안다.

사실, 당신이 법(法) 속에 있을 때, 당신은 이미 사람 이 층의 제약을 초월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법으로 대조할 수 없다면, 그럼 당신은 바로 사람마음이 있는 위치에 있는데, 사람마음은 다른 공간에서 보면 아주 더럽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사람마음이 생겨난 환경은 ‘사(私)’의 기초 위에 있는 것으로 구우주의 ‘사’는 정법(正法)이 제거해야 할 변이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신에게 사람마음이 있으면 당신의 수련을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구우주의 변이된 생명과 비슷해진다. 그렇다면 정법에는 표준이 있는 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원하면 그것에 부합하는데 모두 당신 자신이 결정한 것이다.

주의식(主意識)이 강해야 하고 사상이 명석해야 하며, 당신의 혜안(慧眼)으로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을 둘러보아 좋지 않은 것은 제거하고 정화(精華)적인 것은 남겨야 한다. 이것은 하늘만큼 좋은 일이 아닌가?

위타한 생명은 사람마음이 없고, 자아(自我)가 없는 것으로 언제든 늘 자비롭게 남을 위한다. 사실 소위 모순이나 번거로움・방해 등은 모두 ‘자아’가 상처 받은 것이 아닌가? 모두 개인의 이익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당신이 아무리 많은 변명을 하고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리 많은 사실로 증명한다 해도 모두 당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당신은 자신의 관념을 개변하지 않았고 진실로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당신이 ‘자아’를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문에 당신은 모순이 나타날 때 상대방과 논쟁하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실증하고, 이로부터 사람마음을 보호해서 그것이 당신의 공간장(空間場)에 계속 살아남게 하는데, 파리대가리 만한 작은 이익을 위해 기뻐하고 근심한다. 당신은 눈앞의 현실을 중시해 점유하려는 충동으로 당신의 심지(心智)를 어지럽히며, 당신은 ‘자아’를 높이 치켜들면 진아(真我)는 오히려 당신의 사람마음에 가려져, 선천의 본성을 드러낼 방법이 없어 당신이 길을 잃게 한다.

만약 당신이 각도를 바꿔서 대처하고 스스로 먼저 뛰쳐나온다면 법의 기점에 서서 문제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은 사람 이 층의 이치보다 높기 때문인데, 당신이 사부님을 생각하고, 대법을 생각할 때면 당신은 곧 높은 곳에 서는 것이다. 높은 곳에 서서 사람 중의 일을 내려다보면 일목요연(一目瞭然)해지는데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어느 것이 바르고 어느 것이 사(邪)한지 당신은 모두 구별할 수 있다. 당신의 진아는 정확하게 시험 문제를 보고 답안을 알아서 답안지를 작성하고 합격된 답안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당신은 관을 통과한 것이다.

법(法)에서 수련하고 법에서 깨닫는 이것이 바로 고향으로 통하는 대도(大道)다. 소중히 여기고 정진해야 하는데 고향으로 가는 길이 멀지 않았다.

작은 수련 체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