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淸風)
【정견망】
사부님의 신경문(新經文)을 공부한 후 다른 동수들의 교류 문장들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문제가 생각났다. 당승(唐僧 현장)은 여래(如來)를 원망한 적이 있을까? 한 번도 없었다.
《서유기》에서 볼 수 있다시피 당승이 대당(大唐)을 떠나 서천(西天)까지 도달하는 전체 과정은 바로 하나의 수련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당승은 또 수많은 집착심을 폭로해냈는데 가령 두려운 마음, 오랫동안 서천에 도달하지 못해 막연해 하는 등이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당승은 여래를 불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자신이 불법(佛法)을 위해 무슨 ‘공헌(貢獻)’을 했다고는 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걷는 길이 옳음을 굳게 믿었고, 결국에는 서천에 갈 수 있다는 굳은 믿음만은 의심한 적이 없다. 바로 이런 신념(信念)이 그를 최후까지 걸어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사부님과 법에 대한 바른 믿음[正信]은 한 수련자가 최후까지 걸어갈 수 있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다.
비교해보자면, 우리의 수련은 당승이 경전을 구하는 것보다 내함(內涵)이 훨씬 더 깊고, 관련된 천체(天體) 층차도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승보다 마땅히 더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과정에서, 특히 대륙의 사악한 환경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대가를 치렀겠지만 종종 속인 중에서 소위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실망하고, 혼란스러워하거나, 더 나아가 나태해지거나 흔들리며, 심지어 반면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무릇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을 정법시기 대법제자로 여기지 못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수련은 원래 초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감옥에 있을 때 일찍이 소위 심리상담사가 찾아와 나를 전화(轉化)시키는 공작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대체 무엇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도의(道義)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으로 그를 위해 대가를 치른 것은 속인 중의 득실(得失)로는 가늠할 수 없다(당시의 인식으로 지금 보면 한참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비록 (천목이) 닫혀서 수련하지만 나는 내 생명의 궁극적인 귀결이 비할 바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내가 지금 속인들 사이에서 얼마를 잃었든 상관이 없는데 사실 모든 진수제자(真修弟子)들은 다 마찬가지다.
당승은 근기가 대단히 좋은데 그렇지 않았다면 선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알았고 여래가 자신에게 빚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가 걸은 매 한 걸음이 아무리 힘들어도 모두 자신이 역사상 지은 업력 때문이며, 여래가 그를 위해 치른 대가는 속인 층차의 득실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렇다. 우리가 하는 일체는 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자, 동시에 역사상 하늘처럼 거대한 업력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 이렇게 큰 난(難)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매 사람마다 구체적인 상황이 다르고 관련된 요소 역시 비교적 복잡하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많은 업을 없애주신 후에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해 그 어떤 불평도 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정말로 우리에게 빚지지 않으셨고, 오직 우리를 위해 감당하기만 하셨다.
내 기억에 감옥에서 나온 후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감옥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으니 당신 사부님께 떳떳하겠군요.”
그는 속인의 각도에서 문제를 본 것으로 우리 수련인은 당연히 이렇게 볼 수 없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바로 나타난 문제다. 원망을 품거나 심지어 반면으로 나아간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속인 중에서 학력이 높거나 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또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사람 층면(層面)에서 뛰쳐나오지 못했거나 사람의 정(情)으로 문제를 본 것을 말한다.
대법의 각도에서 본다면 수련하는 사람은 모두 법(法)속의 입자로 누가 누구보다 낫고 못함이 없다. 속인 중의 학력, 사회적 지위 등은 근본적으로 그가 한 말을 가늠하거나 그가 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표준과 요소가 아니다. 이 한 점을 우리는 반드시 똑똑히 알아야 하는데 수련에서 중시하는 것은 심성 수련과 지혜가 열리는 것인바, 이는 대법의 표준으로 가늠하는 것이지 속인의 표준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