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청(鬱菁)
【정견망】
수련 초기 다리를 틀고 가부좌를 하다가 다리가 아파 견딜 수 없을 때면 나는 업력(業力)이 아픈 것이고 그것이 내 뇌에 반응한 것이니 나는 그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서서히 가부좌할 때 아픈 것을 두려워하는 이 관(關)을 돌파했다.
나중에 박해를 받았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경찰이 집으로 나를 잡으러 왔다. 나는 황급히 집을 떠났고 이후 발정념(發正念)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두려운 물질이 나를 감쌌고 각종 좋지 않은 사유들이 뇌에 반응되어 나왔다. 이렇게 끝없는 괴롭힘은 대체 언제나 끝날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설마 또 유리실소(流離失所)해야 하는가?
비록 발정념으로 제거하긴 했지만, 줄곧 조용해질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 정념을 가지(加持)해주실 것을 청했다. 이때 머릿속에 “감수하지 않는다(不感受)”는 일념(一念)이 떠올랐다.
그렇다, 세상에 표현되는 미친 듯한 박해 형식이 내게 두려움의 물질장(物質場)을 강제로 더한 것으로 나를 두렵고 무섭게 만들어 내 의지를 소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것을 따라 감수하는가? 사부님 법신(法身)께서 바로 내 곁에 계시지 않는가? 사부님의 뿌리는 우주에 박혀 있는데 또 누가 나를 진정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때 그런 두려운 물질이 서서히 사라졌고 발정념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었다.
이 두 차례 경험은 내게 집착심에 대해 한 층 더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명리정(名利情)을 내려놓기 어려워하는 것은 명리정이 우리에게 일종의 즐거운 감수를 주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감수를 좋게 느끼고 또 그 속에 빠져든다면 그럼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다. 우리가 고난(苦難 고통과 어려움)을 싫어하는 것은 그런 고난이 우리에게 고통의 감수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감수가 좋지 않다고 느끼면,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고난을 회피하려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세간에서, 그는 단지 생명의 과정을 향수(享受)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과거에 사람은 아주 가련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람은 이 세간에서 그는 단지 생활과정 중에 사람에게 가져다 준 감수를 향수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이 표현은 비교적 정확하다. 무슨 뜻인가?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주재하고 있고, 내가 무엇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즐기는 중에서 후천적으로 양성된 습관과 집착으로서, 느낌을 추구할 뿐이다. 진정하게 작용을 일으켜 무엇을 하고자 하는 배후의 요소는, 사람의 습관, 집착, 관념, 욕망 이러한 것을 이용해서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진정한 인체는 바로 이러하며, 단지 생활과정 중에서 가져온 느낌을 향수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에게 단 것을 주면 당신은 단 것을 알고, 당신에게 쓴 것을 주면 당신은 쓴 것을 알고, 당신에게 매운 것을 주면 당신은 매운 것을 알고, 당신에게 고통을 주면 당신은 괴로움을 알고, 당신에게 행복을 주면 당신은 기쁨을 안다.”(《각지설법 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이 단락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람이 세간에서 살아가는 과정이 바로 감수의 과정인데 그런 감수와 집착심은 밀접해서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만약 우리가 세간의 감수에 대해, 그것들 모두 감수하지 않을 수 있다면, 즉 고생에 대해서는 그 속의 고생을 감수하지 않고, 단맛에 대해서는 그 속의 단맛을 감수하지 않고, 순조로운 상황에서는 그런 안일함을 감수하지 않고, 힘든 상황에서는 그런 고통을 감수하지 않을 수 있다면, 몸은 비록 홍진(紅塵 속세)에 있어도, 생각은 방외(方外)에 있어서 오직 자신을 잘 수련하며 중생을 구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쉽사리 집착심에 좌우되지 않고, 인생속의 상황에 따라 수련인의 의지가 닳아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