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입자
【정견망】
적지 않은 동수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병업(病業)에 직면했을 때 종종 순간적으로 정념(正念)이 강하지 못해, 구세력이 악의적으로 빈틈을 파고들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이 나타나거나 심지어 육신을 잃는다. 이에 대해 나는 전에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잘 아는데 몹시 견디기 힘들다. 그런 상황까지 가보지 않은 사람은, 체험하기가 정말로 어렵다. 다음은 내가 수련을 실천하면서 막 죽으려 할 때 깨달은 것들이다. 이미 몇 년이 지났고,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많은 일들은 또 모호해졌고 대략적인 의미만 기억할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병업관(病業關)이 닥쳤을 때, 나는 갑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항할 수 없는 사신(死神)이 왔음을 느꼈고 두려움에 사지가 무력해졌다. 이때 이미 정념(正念)이 완전히 없어지고, 너무 놀란 나머지 만념(萬念)이 다 사라졌고, 울고 싶어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신체가 몹시 견디기 힘들었는데, 정말 너무나 괴로웠다! 이런 것들은 내 기억 속에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때 나는 잠들고 난 이후의 느낌에 큰 미련을 가졌다. 왜냐하면 잠이 든 후 꿈속에서는 죽음의 위협도 없지만 이곳에서 깨어나면 죽음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동수의 도움으로 정념이 생겼고 “두려움”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 “두려움”은 사실 내 정신(精神)의 작용이다. 그것들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가상(假象)을 연화(演化)해 냈는데 아주 “흉악하고 무섭다”게 생겼고, 그것이 “극히 두렵고” 너무 놀라서 정신에 큰 부담을 주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진정으로 병을 얻는 것은 정신이 7할이고 병이 3할이다. 흔히 사람의 정신이 먼저 무너져서, 먼저 안 되고, 부담이 아주 중하여 병세를 급격히 변화하게 하는데, 흔히 모두 이러하다.”
“그의 정신이 그를 사망하게 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또 “노(老)ㆍ병(病)ㆍ사(死) 역시 일종의 마(魔)이지만, 이 역시 우주특성을 수호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런 정신적인 부담이 발전해 내려가면 결국 정말로 신체 상황이 급속히 나빠져서 결국에는 속수무책이 되는데 자신의 정신이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정념을 확고히 했다.
“나는 대법제자다,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어 내 뒤를 받쳐주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이에 원래 존재하지 않는 이런 정신적 가상을 단호히 부정했다. “흉악하고 무섭다” “극한 두려움”은 모두 마장(魔障)이다, 대법의 힘 앞에서 모든 가상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는데 마치 먹구름이 사라지면 다시 태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발정념을 하는 과정에서 일단 정념이 강하지 않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 곧 반복적으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더는 그것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외웠다. 또한 세 가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물며 나는 사람의 ‘정(情)’에 속하지 않고, 삼계(三界)에 관할당하지 않으며, 지옥에도 이름이 없으니,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원래 이런 가짜 ‘죽음’은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두려움’ 역시 존재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의 존재는 바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2》〈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에서 “두려움이 없다면 당신을 두렵게 하는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내가 평소 정념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구세력이 집착을 구실로 잡아 박해한 것이다.
사실 죽는 과정 역시 정말로 그 무슨 두려울 게 없고 오히려 아주 담담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바로 사람이 죽는 그 일순간에는 두려운 느낌 없이”“모든 사람이 다 그 일순간에 해탈감과 잠재적인 흥분감을 느꼈으며, 고통스러운 감각이 없었다고 했다.”라고 하셨다.
또 《유럽법회설법》에서는 “마치 잠을 깬 것처럼 당신은 갑자기 당신 일생에서 한 일이 눈에 역력하다. 매 한 건의 작은 일마저도 마치 금방 한 것과도 같이 그처럼 뚜렷하여 단번에 대뇌가 다 해방되었다.”라고 하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법(法)이며 곧 진리라고 생각한다. 죽을 때, 마치 잠에서 깬 것 처럼, 해탈감과 잠재적인 흥분감이 있다. 아울러, 자신이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지 눈앞에 똑똑히 드러나는데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소위 죽음이란 단지 사람이 미혹의 상태에서 다른 일종의 청성(淸醒)한 상태로 전환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상태 전환은, 마치 놀이와 같은데 두려울 게 뭐 있는가!
하지만 지금은 조사정법(助師正法)하는 관건적인 시각이니 나는 반드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법정인간(法正人間)까지 견지해서, 서약을 실현하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물론 위의 이런 것들은 내가 서서히 깨달은 것이고, 그 과정은 아주 길고 아주 고통스러운 단계를 거쳤다. 지금도 단지 이치적으로만 깨달았을 뿐, 사상에서는 아직 완전히 ‘생사를 건넌’ 경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심지어 동수들과 교류할 때도 ‘죽음’이란 화제조차 몹시 꺼린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한 각도에서 깨달은 것일 뿐,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이 글을 통해 보다 좋은 교류들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단지 참고로 제공한다.
후기: 나는 때로 도를 얻은 승려나 도사들 중 일부는 생사를 담담히 보고 죽음을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데, 어느 날 자신이 마땅히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곳에서 ‘좌화(坐化)’하거나 ‘시해(尸解)’하는데 아주 멋지고 여유롭다. 나는 대법제자로서 비록 ‘좌화’ 등을 말하진 않지만, 정법시기에 서약을 어기고 생사를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생사를 담담히 보는’ 이런 사상 경지가 있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