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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깨달음: 원용(圓容)

대법제자

【정견망】

때로는 매우 피곤하고 때로는 또 매우 즐겁다고 느끼는데 인간 세간(世間)의 진짜와 가짜, 허(虛)와 실(實)은 사람이 제대로 헤아리기 힘들게 만든다. 대법제자는 세간에서 조사정법(助師正法)하며 중생을 구도하는 중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지만 때로는 또 사람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데 그런 느낌은 몹시 괴롭다.

대법에 대조해 자신의 어디가 부족한지, 왜 이끌렸는지 살펴보니 내 생각에 관념이었다. 이 관념은 윤회전생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층층 공간마다 모두 관념의 요소가 있다. 때로는 관념이 나올 때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 생활 속의 문제가 당신의 관념을 건드릴 때, 명백한 그 일면이 비로소 깨닫고 어느 정도 진동(震動)을 느낄 수 있다.

이 방면에서 나의 체득은 바로 이렇다. 법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고 일에 부딪쳐도 법으로 대조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막상 당신 앞에 일이 나타날 때면 또 정념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가족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면 곧 어떤 한 가지 물질이 중간에 끼어들어 당신의 마음을 흔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고 뭔가 마음이 불안하다.

이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네 생각이 절대적으로 정확한가? 너는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으며 일체는 다 사부님께서 주관하신다고 말하지만, 네 사상은 정말로 백분의 백 사부님을 믿느냐?”

나는 사부님을 믿는 것에 에누리가 있어선 안 된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사부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동시에 사상 속에 또 일종의 물질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 물질이 가로막는 방식은 자신의 생각이 남들의 인정을 받아서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나도 이 좋지 않은 물질을 발견했고, 또 이것이 나의 신사신법(信師信法)을 교란한다고 생각해, 스스로 그것을 해체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고 찜찜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한 대법제자로 말하자면, 이전에 내가 줄곧 말했듯이, 내가 말하건대 대법제자는 이처럼 큰 역사적 사명이 있으며 중생을 구도할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데, 틀림없이 당신들 자신이 걸어 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 한 갈래 길은 반드시 한 갈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하며, 이래야만 우주 중생들이 비로소 탄복할 것이고, 비로소 교란할 수 없을 것이며, 당신은 이 한 갈래 길에서 비로소 번거로움이 없어지고, 비로소 아주 순조롭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각지설법 11》〈20년 설법〉)

사부님 설법의 개시를 통해 현재 층차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짜증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나타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이 환경을 이용해 당신이 법으로 자신을 바로 잡고, 당신의 마음을 바로 잡으면 길이 곧 통하고 하는 일도 순조롭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예전에 사부님께서 꿈에서 점화(點化)해주신 것이 생각났다. 나는 마치 아주 크고 호화로운 건축물 안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이 건물의 문은 자동으로 사람이 문 앞에 다가오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이 자동문은 질서정연하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꿈속에서 내가 한 자동문 앞에 가자 문이 자동으로 곧 열렸다. 이렇게 나는 이 직선을 따라 곧장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데 하나하나의 문이 자동으로 다 열렸다.

당시 나는 사부님께서 내게 무엇을 점화해주시는 것인지 똑똑히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은 분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나더러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법의 표준에 도달하면 길이 자연히 통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찾을 때 또 한 가지 현상을 발견했는데 즉 속인이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아직 노력하는 것 같고, 또 누가 집안의 물건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속으로 동경했으며, 집에 자손이 많은 장면을 보면 속으로 몹시 부러웠다. 왜 이럴 수 있는가? 대법제자는 몸은 속세에 있지만, 생각은 방외(方外)에 있는 생명인데, 어찌 또 부러워하고, 저층 공간의 생활 방식을 동경한단 말인가?

법리적으로 삼계(三界)는 우주의 쓰레기장이자 가장 더러운 공간임을 알면서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는 사실 바로 관념의 작용이다. 왜냐하면 구우주(舊宇宙)의 특성은 위사위아(爲私爲我)한데 대법제자 역시 생생세세 윤회전생 할 때 역시 이런 변이 요소를 지니기 때문에 부동한 시기 부동한 환경에 따라 반응해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활하는 장면은 아마 관념을 낳는 토양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사람이 생활하는 장면을 보면 곧 토양에 빠지는 것이다. 당신의 동경과 부러움은 모두 이 토양에게 양분을 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비정상적인 생각을 할 때마다 신체 주위에 조화롭지 않은 한 가지 물질이 끼어들어 나를 괴롭게 한다. 하지만 왜 힘든지는 똑똑히 말하지 못한다.

관념을 전변(轉變)해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지 않아야 하는데 대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 대법제자는 곧 대법을 원용해야 한다. 법을 원용함은 동시에 또 사(私)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사는 아주 높은 공간 층차까지 관통되는데, 물질에 대한 점유는 사(私)의 체현이자 직관적인 드러남이다. 사상 깊은 곳의 그 변이된 사(私)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법에 대조해 자신의 관념을 고수하지 말고 자연스러움에 따라야 함을 알고 법을 원용해야 함을 알지만 내심 깊은 곳에는 하나의 그림자가 어딘가 숨어 있는데 이 그림자가 바로 사(私)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법(法)을 원용하는 동시에 사(私)라는 이런 변이 요소를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사는 해체와 소각에 직면한다. 하지만 사람은 이 주체(主體)의 말에 따르는 것으로 주체가 자연스러움에 따르며 법을 원용하려 하면 누구도 개변할 수 없다.

법은 한 층 한 층 동화하는 것으로, 법에 동화하지 않은 그 한 층에는 여전히 사(私)의 요소가 있다. 대법제자의 수련은 또 근본적으로 집착을 제거해 누락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법(正法)이 근본적인 사에 충격을 주면, 사는 곧 반응해 나온다. 드러나는 것은 당신이 법에 없는 틈을 노려서 당신을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心智)를 어지럽혀, 당신의 육신(六神)에 주인이 없게 만들어 정념(正念)이 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수련상태에서 체현되는 것은 바로 소극적이고 어쩔 수 없어 하며 비관적이고 이유 없이 두려운 것이다. 눈앞의 편안함을 잃을까 두렵고 자신의 이익이 다칠까 두려우며 모순의 충격이 두렵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안정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이런 변이 요소를 고수하려는 것으로, ‘자아’를 고수하고, ‘‘자기 의견’을 고수해 인위적으로 자신에게 틀을 만든다. 여기에 구세력이 강요한 교란 요소까지 더해지면 집착이 커져 대법제자의 수련 환경을 어지럽힐 수 있다. 그러므로 대법에 따라 원용하고, 대법에 따라 모든 것을 가늠하며, 대법에 따라 자신의 부족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마음에 법이 있으면 곧 모든 교란을 타파할 수 있다.

이런 마음들을 찾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경직되었던 몸이 법(法)에 의해 소통되고 위아래로 관통되어 이전에 머릿속이 혼탁했던 상태가 사라졌으며 짜증나지 않고 마음이 안정되었으며 눈앞의 모든 것이 다시 평온해졌다.

작은 수련 체득이니 부당한 곳이 있으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