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개인수련과 정법수련의 차이에 관한 깨달음 (1)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정법수련(正法修煉)은 개인수련과 완전히 다른데, 가장 표면적인 구별은 개인수련은 발정념과 진상 알림이 필요없고 법을 잘 배우고 자신을 수련하면 된다. 정법수련은 개인수련과 표면에서는 무슨 구별이 없는데, 모두 안을 향해 찾고 사람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내포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또 개인 원만에 집착하는 수련생들과 그것의 내포가 같지 않은 부분의 인식을 교류하려고 한다. 동수들에게 참고로 제공할 뿐이다.

첫 번째, 수련의 목적이 다르다

개인수련에서 법을 잘 배우고 자신을 잘 수련하는 목적은 개인의 해탈을 위한 것이다. 그 표상(表象)은 수련에서 시종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고 개인의 층차 제고를 추구해 최종적으로 원만해서 우주 대궁(大穹)의 어느 한 경계 중에서 그 한 층차의 신(神), 그 한 층의 왕, 그 한 층차의 주재자가 되는 것이다.​

정법수련의 목적은 중생구도의 서약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정법수련에서 우리의 층차가 높든 낮든 막론하고 모두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서약 실현이다. 법 공부를 잘 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 자체가 서약을 실현하는 것이고 서약을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할 세 가지 큰 일 중의 하나다. 우리 개인의 원만과는 추호의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개인 원만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이미 개인 원만을 했다.

우리는 대법제자다. 사부님께서 제 위치로 밀어주셨고 사부님께서 일체 능력을 부여한 신우주(新宇宙)의 왕(王)과 주(主)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개인의 원만 과정은, 사부님께서는 우리한테 수련하라고 하지 않으셨고 직접적으로 우리를 밀어주셨는데, 우리를 직접 정법수련 속으로 밀어주셨다. 개인 원만의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 서약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정법수련의 목적이다. 개인 원만을 추구하는 것은 대학생이 초등학교의 졸업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모두 거꾸로 된 것이다.

개인 원만에 집착하면 관심 갖는 것은 자신의 층차이고 자신이 원만할 수 있는가 여부라,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자신의 사(私)를 위한 것이다. 정법수련의 목적 및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정법수련에서 대법제자는 완전히 중생을 위한 것으로, 비록 객관적으로 결국에는 자신을 성취하지만 주관적으로 자신을 위한 일은 단 하나도 없다.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하면서 오히려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 해탈이라면, 법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정법 현실의 요구를 엄중하게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구세력이 우리의 틈을 타는 곳인데, 개인 원만에 집착함은 바로 우리의 가장 큰 누락이다.

개인 원만은 정법수련에서 단지 기점(基點)일 뿐 절대로 종점(終點)이 아니다. 대법 속에서 저층차의 것으로 정법수련의 기초다. 이런 저층차의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직접 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연마할 필요가 없다. 정법수련은 우리의 층차와 관계가 없고 단지 우리가 서약을 실현할 수 있는지와 연관된다. 만약 우리가 서약을 실현하지 못하면 사부님께서 제 위치로 밀어주신 일체는 모두 물거품이 된다. 우리의 종점은 우리의 무량무제(無量無際)한 중생을 데리고 함께 원만하는 대원만(大圓滿)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여러 해를 거쳐 그는 행각하고 돌아왔다. 사부가 말했다. “자네는 이미 도를 얻었고 원만(圓滿)에 이르렀네. 다른 일이 없으니 자네는 돌아가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고,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자네는 속인 중의 일을 끝마치도록 하게.” ”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수많은 생생세세(生生世世) 수련을 거쳐 “행각하여” 되돌아왔고 이번 생에 우리는 이미 법을 얻어 원만했다. 개인 수련의 일은 이미 없다. 속인 중의 일을 마무리해야만 비로소 갈 수 있다. 우리가 속인 중에서 하는 일이 바로 조사정법, 중생구도의 서약을 실현하는 것이고 서약을 실현해야만 되돌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우리가 원만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가?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단지 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사부님께서 《2015년 미국서부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중생구도의 책임이 없다면 당신이 금생에 수련하지 않아도 나는 모두 당신을 원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제 위치로 밀어주셨을 때 두 가지 일을 의미한다.

하나는 우리 생생세세의 업력을 사부님께서 없애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업력이 없다. 두 번째는 우리의 사상은 사부님에 의해 깨끗이 씻겨졌기에 집착심이 없다.

사부님께서는 《푸왠선(副元神) 관련 문장이 일으킨 파동에 관해》에서 말씀하셨다.

“사실 대법과 대법제자의 정념에 부합되지 않는 일체 것들은 모두 구세력이 참여하여 조성한 것이다.”

720이후 우리가 만난 관(關)과 난(難)은 우리의 제고, 개인 제고와 더는 관계가 없고 우리의 중생구도와 관계가 있다.

기나긴 우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종래로 한 개인의 원만에 수련할 필요가 없고 사부님이 원만으로 밀어주신 이런 수승(殊勝)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우리 많은 수련생들은 이러한 일을 감히 믿지 못하고 이러한 일이 자신한테 발생했다는 것은 더욱 믿지 못한다. 수련을 말하기만 하면 한 사람이 어떻게 신(神)이 되는가 하는 사상 속에 빠진다. 때문에 정법수련은 한 신(神)이 서약을 어떻게 실현하는가의 책임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가 오늘 부딪친 일은 모두 역사상 있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개인 해탈이란 수련 개념 속에 빠져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면 안 된다.

두 번째, 수련상태가 다르다

개인 수련에서 사람은 곧 사람이고 사람의 상태이다. 수련 성취되어야 비로소 신(神)이다.

정법수련에서는 내가 이해하기에 우리의 표면은 사람과 같지만 본질은 같지 않다. 우리의 본질은 신이다. 그런데 신(神)이 사람들 속에서 생활할 순 없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우리 매 사람에게 모두 하나의 짐승(獸)을 배치해주셨다. 때문에 우리는 한 위대한 신이 한 마리 짐승을 타고 인피(人皮)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이는 과거에 석가모니 부처 및 예수와 같다. 사람 속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이 짐승이 표현하는 약간의 집착은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약간의 사람 마음이다. 동물은 그렇게 복잡한 사상이 없기에 우리 복잡한 사상은 그 짐승한테 오는 것이 아니라 구세력이 우리에게 강제로 주입한 사람 마음에서 온 것이다. 즉 사람의 표면 관념을 강화한 것이다.

구세력은 우주 매 층의 100의 20으로 짐승의 몸과 사람의 표면에 눌러 넣었고 사람의 표면과 신(神) 사이에 거대한 간격을 형성시켜 우리 신(神)의 일면이 표현되기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법 공부를 잘 하고 안으로 찾아 진정한 자신을 찾으면 사부님께서 제 위치로 밀어주신 신우주의 왕이 된다. 왕의 기점에서 어떻게 중생을 구도할 것인가의 문제를 사고하게 된다. 즉 구세력의 계략을 간파할 수 있고 우리가 마주한 문제와 책임을 똑똑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신(神)이니 언제라도 짐승에게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지금 천체(天體) 정법은 이미 결속되었고 사람과 신 사이에 간격을 조성한 물질도 이미 없어졌다. 다만 간격을 만들었던 기제(機制)가 여전히 존재하고 또 우리가 돌파해야 하는데 신(神)의 일면이 진정으로 우리의 사상을 주재하게 하고 우리 신의 일면과 사람 표면이 하나로 합체되어 제1장 공법 구결처럼 “신신합일(身神合一)”의 요구에 도달해야 한다.

개인수련은 원만이 곧 결속이다.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또 중생을 구도해야 하고 중생을 원만시켜야 한다. 우리에게 결속이란 단지 하나의 시점인데 바로 사부님께서 만족하실 때다. 사부님께서 언제 결속하려 하시면 바로 결속되고 사부님께서 결속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우리는 이어서 해야 한다. 우리 이 한 평생에 잘해야 할 다른 일은 없고 사부님을 따를 수 있고 사부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인가!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 중에 용맹정진할 수 있고 곤두박질쳐도 일어나서 또 하는데, 동수 사이에 당신이 나를 한번 끌어주고 내가 당신을 한번 도와주니 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우리는 서로 같은 행복감으로 같지 않은 고달픔을 겪는데 그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이고 그 어떤 천국 세계도 구비하지 못한 인간 세상의 아름다운 맛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매 하나의 고생을 소중히 여기고 주변의 매 수련생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천국에 돌아가면 더는 찾을 수 없다. 사람의 이치를 반대로 하면 우리는 바로 신이다. 매 하나의 속인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우리는 바로 그들을 위해 온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인피(人皮)를 쓴 신이다. 개인 원만을 위해 온 사람이 아니고 서약을 실현하기 위해 온 신이다.

세 번째, 구세력의 배치와 사부님의 장계취계

우리가 신이면 그럼 우리는 왜 자신에게 아직도 업력과 집착이 있다고 느끼는가? 이 문제는 구세력의 배치에서부터 말해야 한다.

구세력의 정법 방식은 무엇인가? 마치 옷을 세탁하는 것과 같은데 해진 옷을 깨끗이 씻으면 된다. 그렇다면, 우주를 깨끗이 씻는다는 것은 우주의 업력을 제거하는 것이고 업력이 없는 우주란 바로 정법을 끝낸 후의 결과다. 옷이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그 낡은 옷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마치 예수가 사람을 구하는 것과 같은데 예수에게 그가 구도해야 할 중생의 업력을 다 감당하게 했다. 그렇다면 대법제자가 역사상에 구도하겠다고 서약한 중생은 너무나 많다. 구세력은 중생의 업력을 대법제자 몸에 눌러 넣었다. 대법제자가 협력해 구도해야 할 중생의 총 숫자가 바로 우주 대궁 층층의 20%의 가장 변이된 생명과 우주 전부의 업력인데 대법제자 매사람마다 한몫씩 주었고 대법제자 사람의 표면과 우리의 신의 일면 사이에 넣어 우리 사람의 일면과 신의 일면을 갈라놓았다.​

우리 사람의 표면은 감수(感受) 속에서 살고 있고 우리 사람의 표면은 우리에게 가해준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고 구우주 생명의 변이된 사상과 그것이 가져온 업력을 감수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느끼는 자신의 업력과 변이된 사상은 모두 우리가 구도해야 할 중생에게서 온 것이다. 우리 자신은 업력이 없고 집착이 없다. 우리의 집착심과 업력은 모두 구세력의 배치에서 온 것이다. 이렇다면 우리는 곧 거대한 업력을 감당하는 중에 업력에 의해 소훼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將計就計)로 구세력의 이 한 차례 배치를 이용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업력을 제거해 주셨고 약간의 검은 기만 남겨주셨다. 그럼 우리가 감수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구도해야 할 우주 중생의 검은 기와 그들이 법에서 이탈해 변이된 사상이다. 이 검은 기는 우리의 감수 속에서 바로 업력의 표현인데, 법에서 이탈한 그것들의 변이사상은 우리의 대뇌를 거쳐 그것을 명리정(名利情)의 집착심으로 번역한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명리정의 집착심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에 한가지 착각이 생겼는데 우리가 감수한 것, 우리가 구도해야 할 중생의 명리정의 집착심과 업력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이성적으로 진상을 똑똑히 보고 감각에 이끌리지 말아야 한다.

구세력의 배치는 훼멸(毁滅)이다. 사부님께서는 중생을 구도하러 오셨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장계취계하여 중생을 훼멸하려는 구세력의 배치를 중생 구도의 배치로 바꾸셨는가?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에게 우리가 구도해야 할 중생을 이끌어 수련하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 14》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구도중생(救度衆生)’이란 이 말은 하기는 쉽지만, 누가 감히 할 수 있는가? 당신 한 사람이 수련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당신은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수련하려고 한다. 당신이 한 사람을 데리고 수련한다면, 그 사람의 일체를 당신이 모두 책임져야 하는 것과 같은데, 당신과 똑같이 당신은 그를 잘 수련하게 해야 한다.”(《대법홍전 25주년 뉴욕법회설법》)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 우리는 정법수련 속에서 바로 우리가 구도해야 할 중생을 이끌고 수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중생, 뭇 신의 업력과 법을 이탈한 그들의 사상을 데리고 수련하고 있다. 그럼 법 공부를 잘해서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고 우리 매 한 차례의 심성 제고, 매 한차례 관을 넘기는 것은 모두 우리가 예전에 구도하겠다고 서약했던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층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이 정법수련에서 법 공부를 잘하고 자신을 잘 닦는 내함이다. 이렇게 구세력이 중생을 훼멸하는 배치가 사부님의 장계취계로 중생을 구도하는 배치로 변했다.

나의 깨달음은, 사부님께서 장계취계하여 나로 하여금 이런 생명들을 거느리고 수련하게 하셨는데, 그들의 일체를 신우주의 표준으로 바로 잡고 갱신하게 한 후 신우주의 요구에 도달하게 하여 신우주에 진입시켜 남기려는 것이다. 법 공부를 잘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 바로 법을 실증하는 것이고 우리가 일찍이 구도하겠다고 서약했던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 가지 일을 하는 중에 매 하나의 일 자체가 모두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며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나란히 병행해야만 전면적이고 누락 없이 서약을 실현할 수 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