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견(鄭一見)
【정견망】
“법을 위해 감당[爲法付出 역주: 중문에서 부출付出은 희생하다, 대가를 치르다, 감당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경문 번역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감당하다’로 번역했다]”했다는 이런 일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어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법(法)을 위해 뭔가를 감당할 수 있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매 하나의 생명은 모두 이 법이 육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에서 만들어진 생명이 반대로 법을 위해 무엇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사람은 이 우주에서 생겨난 생명으로, 사람의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모두 이 우주 속에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 우주를 위해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우주는 또 법이 만든 것이니 사람은 이 우주를 위해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는데 또 법을 위해 무엇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의 정법(正法)은 우주 성주괴멸(成住壞滅)의 최후 시각에 우주의 근본 대법을 사용해 우주 중생을 구도하시는 것이다. 이는 천지가 개벽된 이래 최초의 일이다. 만약 사부님께서 이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주 중생은 구 법칙 속에서 결속되었을 것이다. 대법제자들이 법을 실증하는 것은 바로 정법이란 이 일이 성공할 수 있고 중생이 정법 속에서 구도 받을 수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대법제자는 법을 실증하고 수련하는 가운데 원만을 향해 나아가니 대법 속에서 수익을 얻은 것이지 법을 위해 감당한 게 아니다.
법을 실증함에는 총 세 가지 일이 있는데 바로 법 공부, 진상 알리기와 발정념이다.
첫째, 법 공부 수련은 법에 동화하는 과정으로, 좋지 않은 사람 마음·집착·관념을 닦아버리고 ‘진선인(真善忍)’ 표준에 동화해 궁극적으로 원만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원만 후에 얻는 일체는 다 대법이 부여한 것이다. 이는 완전히 대법 속에서 수익을 얻는 과정이기에 법을 위해 감당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버리는 것은 다 좋지 않은 것들이다.
둘째, 진상 알리기는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이 세인을 독해했기 때문에 세인들을 중공의 거짓말에서 구하기 위해 비로소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인과 중생을 위해 하는 일로 중생을 위해 감당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법을 위해 감당한 것은 아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과 진상을 알려 거짓말을 폭로하는 것은 대법 자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중생의 존망(存亡 남는가 또는 죽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거짓말은 중생을 독해하고, 진상 알림은 중생을 위해 감당하는 것이지 법을 위한 감당이 아니며 거짓말은 대법에 대해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발정념은 구세력이 구우주의 법리에 따라 배치한 것을 겨냥한 것으로, 이런 배치는 정법이 중생을 구도하는 것과 크게 충돌한다. 정법은 최대한도로 우주 중생을 구도하려 하고 구세력의 배치는 대량으로 중생을 도태시키려 하는데 그것들이 맘에 들어 하지 않는 대법제자를 포함한다.
우리는 대법을 실증하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이기 때문에 구세력과 그것의 배치를 인정하지 않는데,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목적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발정념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발정념의 위력은 오히려 대법에서 오기 때문에 발정념 역시 법을 위해 감당하는 일이 아니다. 대법제자가 대법의 위력을 펼치는 것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장애를 청소하는 것이다.
이상 내용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하는 일 중 어느 것도 법을 위해 감당한 것이 아니며 모두 법에서 수익을 얻고 그 후 중생을 위해 감당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많은 일을 했으니 법을 위해 많은 감당을 했다고 여긴다면 이런 사유는 법에서 문제를 보는 게 아니라 속인의 층면에서 문제를 본 것이다.
만약 한 속인이 대법을 위해 정의로운 말을 했다면, 그가 속인이기 때문에 대법을 위해 무엇을 감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가 이 일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렸고, 자신의 생명을 위해 정확한 선택을 한 것으로, 대법 속에서 수익을 얻어 아름다운 미래를 얻을 수 있다. 그가 한 일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에게 이익이 되며, 대법은 그 어떤 사람의 지지나 반대에 의해서도 전혀 영향받지 않으며 오직 그 사람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친다. 마치 “선에는 선한 보응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응이 있다”는 말처럼 인과 법칙은 사람이 선(善)을 따르든 악(惡)을 따르든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대법제자가 자신이 법을 위해 많은 감당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사상 속에서 속인의 사상이 이미 상대적으로 강해졌고 법에 있는 사상이 이미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으로 자신을 법 밖에 놓은 것이라 이는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법을 준수하고, 법에 동화해, 자신을 잘 수련하고, 중생을 구도해야 하며, 중생을 구도하는 힘은 여전히 대법에서 나오는데 우리가 어찌 법을 위해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대법은 우주 중생을 구도하고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함은 대법의 위력이 대법제자를 통해 충분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중생을 구도 게 하려는 것으로 대법제자와 중생은 모두 대법이 구도할 대상이다. 단지 대법제자는 중생을 위해 좀 더 감당할 뿐이다. 때문에 수익도 좀 더 많지만 누구도 법을 위해 무엇을 감당할 수는 없다.
매 사람의 대법에 대한 태도는 자기 생명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사람의 사상은 천차만별이지만 이 일체는 대법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고 단지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칠 뿐이다. 그 어느 생명도 법을 위해 무엇을 감당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대법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가 하는 일은 반드시 중생과 자신이 법에서 수익을 얻는 것이지 그가 대법에 수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상은 현재 층차에서 개인의 제한된 인식이다. 이를 써내어 여러분들에게 참고로 삼고자 한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5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