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련생
【정견망】
시어머니는 올해 여든이 넘으셨는데 피부가 하얗고 불그레하며 하루 종일 허허 웃으신다. 원래 앓았던 담낭염도 좋아졌다. 설날 친척들이 찾아올 때면 늘 며느리가 좋다고 칭찬하곤 하신다.
그녀는 고등학생 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마침 문화 혁명 기간이라 ‘출신성분’ 때문에 아예 대입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평생의 아픔이 되었다. 나중에 문화대혁명 기간에 부친은 종아리를 심하게 구타당했고, 오빠는 사범대학을 졸업했지만 ‘4부류’라 석재 채석장에서 10년 넘게 돌 깨는 일을 해야 했다. 이는 시어머니와 오빠의 결혼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고 간고한 삶을 살아야 했다.
문화대혁명은 그녀의 일생을 거의 바꾸어 놓았다. 당시 그녀가 얼마나 “두려웠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그녀는 줄곧 중공의 거짓 선전을 믿고 대법이 박해받은 진상을 받아들이길 거부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9평 공산당》을 넣어드렸는데 다음 날 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지고 땀을 많이 흘리며 친정 식구들과 화해하겠다고 외쳤다. 그때 나는 《9평 공산당》의 힘을 알게 되었다.
시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남편이 외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24시간 병원에 머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간병했다. 시어머니는 다리가 안 좋으셔서 집에서 쉬게 해드렸고, 병원 근처에 적당한 식당이 없어서 먼 길을 걸어서 시아버지를 도와 맛있는 음식을 사다 드렸다. 같은 병동 사람들은 내가 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며느리라는 말을 듣고는 시아버지가 복이 많다고 칭찬했다.
나중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편은 당황했고 시아주버니와 시누이는 외지에 살아 현지 풍습을 몰라 내가 장례를 주도했다. 장례식을 잘 치르자 시어머니는 체면이 섰고 나중에 시아주버니(남편의 형)에게 “네 아버지 장례는 네 제수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일상 생활에서 시어머니에게 관심을 갖고 잘 돌봐 드렸지만 시어머니를 모시기는 쉽지 않았고 때로는 나를 “꾸짖으신”다. 내 기억에 수년 전 우리 아이가 아직 세 살도 되지 않았을 때 어느 날 저녁 식사에서 시어머니가 말했다. “네 시누이는 임신해서 배가 불러도 여전히 일하는데 (당시 시누이는 남편이 외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구나.“
다음 날 나는 막 구한 직장을 그만두고(역주: 원래 아이를 시어머니가 봐주기로 하고 직장에 나갔다는 의미)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형님한테 가보세요, 제가 (사직하고) 집에서 아이를 볼게요.”
뜻밖에도 시어머니 표정이 변하더니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왜 네 맘대로 사직했니!
시어머니는 청결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신다. 내가 결혼할 때 시누이가 선물한 이불은 수납이 어려워서 장롱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보시고는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대체 시집을 몇 번이나 더 가려고 그러니? 너는 담요도 보기 싫고, 담요를 준 사람도 보기 싫다는 거니!“
내가 대답하지 않자 “가서 내 장롱을 가서 보거라”고 말했다. 남편이 듣고 싶지 않은지 “다른 사람들은 어머니처럼 이렇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아들의 반박을 듣자 그녀는 즉시 화를 냈다. 시어머니는 아주 엄해서 어릴 때부터 자녀가 말대꾸하는 것을 허용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시어머니만큼 깔끔하지 않고 좀 털털하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후 천천히 털털한 생활 방식을 바꿨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는 우리와 같이 산다(전에는 시누이 집에서 지내셨다). 어떤 사람이 시어머니의 다리가 불편해서 시누이가 힘들어질까봐 우리와 함께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집이 바로 시어머니 집이고 시어머니는 서서히 대법제자와 일반인의 차이를 보셨고 점차 대법 진상을 받아들인다. 지금 그녀는 자상하고 전통적인 할머니로 돌아왔고, 나는 그녀 때문에 정말 기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7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