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雨靜)
【정견망】
오래 전, 처녀 때부터 나는 ‘정(靜 고요함)’이란 이 글자가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 아름다운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저 이 글자만 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안정되며 상화(祥和)롭고 편안해졌다. 아마 수행(修行)에 대한 생명의 본능적인 동경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동창 중 이름에 ‘정’이 들어간 친구를 보면 부러웠고, 이런 이름이 있으면 자연히 우아하고 탈속한 운치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중에 수련하고 나서야 수련인에게 ‘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그 마음은 어느 정도로 고요한가? 고요하기가 두려울 정도까지 이르렀다. 당신 한 사람이 이런 정도로 고요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네댓 사람이 거기에 앉아 모두 그런 정도로 고요하고, 마치 깊은 못의 고인 물(一潭死水)과도 같이 아무것도 없어, 내가 그들을 감수(感受)하려고 해도 감수할 수 없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정말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운, 그런 기분을 느꼈다. 우리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하며 감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완전히 무위(無爲)이며 텅 빈 것이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수련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더 고요할수록 층차가 더 높다는 것이다. 고요함 즉 정(靜)은 또 고층 생명의 생존 상태다.
고인(古人)은 “마음이 고요하면 신명(神明)과 통할 수 있다[心靜可以通乎神明]”고 했다. 즉 내심이 평온하고 조용하면 신명에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내심이 평온하면 신명과 통달할 수 있는가?
사존께선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석가모니는 정념(正念)을 말했는데,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경을 읽어 진정하게 그가 수련하는 그 한 법문의 세계를 진동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각자(覺者)를 불러올 수 있다.”
원래 오직 마음이 고요하고 잡념이 없어야만 신명과 통할 수 있고 각자(覺者)를 청할 수 있는 것이다.
사존께서는 《싱가포르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늘 이런 말을 하는데, 한 사람이 자신의 어떠한 관념도 가지지 않고 남과 말하면서 남에게 그의 결점을 지적하거나 그에게 무엇을 알려준다면, 그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다. 당신 자신의 어떠한 요소가 없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 당신 자신을 위해서 아무런 보호도 하려 하지 않으며, 당신이 정말로 선의로 남을 좋게 하려 한다면, 어떤 사람이든 그는 정말로 당신의 이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내심의 청정(淸靜)은 일종의 능력으로 한 사람이 더 안정(安靜)될수록 더 힘이 있을 수 있으며 이런 힘은 내심에서 오는 것으로 본진(本真)의 자아에서 내원한 것이라 순정(純正)하고 강력하다.
불가(佛家)에서는 “영대가 청정하면 고요함이 혜(慧)를 낳을 수 있고 혜가 지(智)를 낳을 수 있다.[靈台清靜,靜能生慧,慧能生智]”라고 했다.
도가(道家)에서도 “고요하면 입정할 수 있고 입정하면 지혜를 낳을 수 있다”라고 했다.
총체적으로 말해 유가 불가 도가에서 모두 “고요하면 지혜를 낳을 수 있고[靜能生慧]” “고요하면 깨달을 수 있으며[靜能開悟]” “고요하면 도를 바르게 할 수 있다[靜能正道]”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고요해질 수 있는가? 어떻게 고요함을 닦을 수 있는가? 고요함을 닦자면 반드시 마음을 닦아야 한다. 마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마음에 잡념이 없어야 한다. 몸은 홍진(紅塵 속세)에 있어도 마음은 방외(方外)에 두어,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놀라거나 두렵지 않고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어서, 만나고 흩어지고 이별하고 죽는 것을 모두 자연스러움에 따른다. 덕(德)을 닦고 무위(無爲)하며 수구(修口)하고 욕념(欲念)과 좋지 않은 사유를 배척하면 “훗날 연기구름 걷히고 나면 그때서야 진짜 도 이미 얻었음을 알리로다”(《홍음》〈스스로 수련〉)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8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