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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지’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대만 대법제자

【정견망】

《싱가포르 법회 설법》에서 한 제자의 질문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제자: 사람의 강한 의지와 인내력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입니까?

사부: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놓고 말하든, 우리 사람 신체 표면을 놓고 말하든, 만약 속인사회에서 세파에 많이 시달렸다면, 그는 아마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고, 또 겪은 일이 많았다면 곧 강해지므로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수련 중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강해지게 할 수 있다. 경지를 제고하면 인내력도 증가한다.”

처음 온라인 단체 법 공부 사회를 맡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동수들이 단순하게 잘못 읽거나 빠뜨린 글자도 일깨워 줘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는 것은 경문이고 파룬불법이며 대법이니 마땅히 누락이나 잘못이 적어야 한다! 나는 법 공부할 때 글자를 빼먹거나 틀리게 읽는 적이 거의 없고 또 동수들한테 법을 잘 읽는다는 칭찬을 많이 듣는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동수들이 “도시(都是)”를 “취시(就是)”로 읽거나 “타(他)”를 “야(也)”로 읽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고 매 단락을 읽을 때마다 어떤 동수는 2~3곳이나 틀리게 읽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어떤 동수는 틀렸다고 알려주면 “내가 어디를 틀리게 읽었는가?” “나는 어떻게 읽지 않았는가!”라며 사납게 되물었다. 서서히 나는 감히 동수들의 잘못을 시정할 수 없었고 나중에는 조급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잘못 읽을 수 있는가? 모두 대법을 존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인이 안에서 찾는 이것은 법보(法寶)이다.”(《각지설법 9》〈2009년 워싱턴 DC 국제법회설법〉)

나는 자신을 반성하고 마음 속으로 자신을 찾았다. 동수의 잘못을 시정해 주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나는 대법의 한 입자인데 어찌 동수가 잘못 읽거나 빼먹고 읽는 것을 보고 가만 있을 수 있는가? 대법을 수호하지 못했고, 동수를 위해 생각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서 도피한 이는 사(私)가 아닌가! 또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더욱 드러냈는데 동수들이 화를 낼까봐 두렵고, 서로 잘 지내면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발정념과 법공부를 많이 해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든 늘 용감하게 동수를 일깨워주고 법을 위해 책임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는 두려운 마음과 이기심과 오만을 없애고 싶었다. 그러자 점점 사나운 말투도 사라졌고 잘못 읽거나 빼놓고 읽는 것도 줄어들었다!

어느 날 우리 교류방의 협조인이 교체되었다. 이날 법공부 전에 협조인이 공지 사항이 있으니 2분만 일찍 끝내달라고 했다. 시간이 되자 공지 사항을 알렸고 막 발정념을 하려고 준비할 때 한 동수가 제안했다.

“매일 저녁마다 다른 경문을 공부하는 것이 좋고 이 방에서 느낌도 같은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외에 토요일도 하면 어떨까요?”

협조인이 나에게 “괜찮으세요? 가능한가요?”라고 물었고 나는 즉시 “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인터넷 접속을 끊은 후 불만과 거부감이 계속 불거져 나왔다.

‘토요일 저녁에는 좀 쉬면 안 되는가. 누구는 또 매일 와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할 일이 없으니 이런 제안을 하는가!’
‘만약 토요일에 행사가 있으면 집에 돌아와서 다시 온라인 법 공부를 주관해야 하니 번거롭지 않은가.’
‘당신이 정말 토요일에 들어와서 법 공부를 하는지 보자.’

마음 깊은 곳에서 서운함과 원망의 감정과 동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부 나왔다.

당시 나는 전화 진상을 알리다 좌절 받는 고통을 피하려고 속인의 편안함과 행복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추구하며 속인 문예 작품을 많이 보러 갔고 사상업과 구세력을 따라갔다. 의념(意念) 속에 치열한 다툼과 폭력이 가득해서 사람을 붙잡아서 때리고 욕을 해야만 시원할 것 같았다. 심지어 또 ‘좋다, 나도 휴가를 청해 그더러 하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속인과 마찬가지로 다투고 싸운다면 당신은 곧 속인이며, 당신이 그보다 더하다면 당신은 그 속인보다도 못하다.”(《전법륜》)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 3》〈대뉴욕지역 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표준이 있으며 법 역시 표준이 있다.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그럭저럭 지내면 고비를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 한 사람의 심령이 모두 건드려지고 있고, 매 한 사람이 모두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하고 있으며, 매 한 사람이 모두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생각하고 있다! 당신들 일부 사람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사부는 당신을 보면 정말로 조급하다! 사부는 당신을 보면 정말로 조급하다! 사부가 오늘 이 몇 마디 말을 심하게 했다고만 보지 말라. 아마 내가 큰 망치를 쓰지 않는다면 이미 안 될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유감이다. 당신이 나처럼 이렇게 조급했으면 좋겠다.”

사부님의 조급함을 생각하며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과 대화를 나눴다.

전에 매일 《전법륜》을 공부할 때 그 말레이시아 동수는 왜 꾸준히 견지할 수 있었는가. 설령 병업(病業)으로 목이 쉰 상태든, 설사 혼자만 방에 들어와서도 그는 여전히 법 공부를 견지했다. 또 우리 지역의 한 동수는 수년간 구원 진상 전화를 해왔는데 그 역시 결코 멈춘 적이 없다. 그렇다면 같은 한 부의 법을 수련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꾸준히 걸어갈 수 있는데 나는 왜 오히려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넘어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

안일과 방종으로 구세력과 사상업을 따라갔고, 속인 속에 섞여 머리를 점차 혼란스럽게 했으며, 속인의 마음으로 좋고 나쁨을 가리고, 속인의 마음으로 세 가지 일을 했다. 사실 동수가 토요일 법 공부를 하자고 제안한 것은 어쩌면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나더러 법 공부를 많이 하라고 일깨워 주시는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개변하려 하지 않고 또 다투며 분노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니 이는 사악에게 끌려간 것이다. 정말로 끔찍하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아주 똑똑히 말씀하셨다.

“당신의 손은 그에게 어떻게 움직이라면 그는 어떻게 움직이고, 당신의 팔은 그에게 어떻게 움직이라면 그는 어떻게 움직이며 당신의 머리는 그에게 어떻게 움직이라면 그는 어떻게 움직이는데 그는 당신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사상을 당신이 그에게 조용하라고 하지만 그는 왜 조용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는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당신은 깨끗한 것이다. 모두 후천적으로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닦아(修)버리고 포기하고자 한다. 이것이 곧 그것을 배척하는 것이다.”(《유럽법회설법》)

기왕에 내 생각이 아니라면 나는 곧 그것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어찌 그런 좋지 않은 욕망과 집착이 내게 영향을 주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가! 그것은 내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니다. 또 구세력에게 틈탈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후, 다음날부터 나는 모든 속인일들은 가급적 잘 처리하고, 발정념으로 자신의 공간장을 청리해 사악이 법 공부를 교란하지 못하게 했다. 서서히 지속적으로 법에 서서 견정하게 걸어가고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걷다 보니 법(法)이 늘 마음속에서 더는 방종하지 말라고 일깨워 주는 것을 발견했고 더는 전화를 걸면서 추구하지 않게 되었고, 삼퇴 성공 여부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며, 남과 비교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가 진정으로 진상을 알고 구도 받길 바라는 마음을 품었다. 장기간 전화 진상과 법 공부를 지속하면서 비틀거리는 가운데 집착과 욕망을 제거하면서 이 과정에서 심성이 점차 서서히 안정되었다.

견지(堅持)란 정말 말로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교활하고 어리석은 나를 구도해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동수는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천법(天法)을 주셨고, 우리를 위해 끝없는 업력을 감당해주셨으며, 심성 면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각종 방식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격려하시며 성취하게 하셨다. 이 십악독세(十惡毒世)에서 사부님의 가지(加持) 없이는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착실히 수련하고 대가를 치르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신다. 사부님의 크나큰 자비를 생각하면 내 자만과 자부심이 부끄러워지고,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두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명혜 교류문장 《‘자대(自大)’에 점 하나를 더하면 ‘취(臭)’가 된다》)

사부님께서는 일마다 곳곳마다 제자를 위해 생각하고 잘 안배해놓으셨다! 그렇다면 자신을 잘 수련해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잘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착실한 수련이고 이렇게 해야만 사부님께 보답할 수 있다.

표현력에 한계가 있으니 이상 교류에서 법에 없는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