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청(小青)
【정견망】
나는 1970년대 초, 중국 남방(南方)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첫째였는데, 내가 태어나면서 이 가난한 집에 잠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나중에 나는 이는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1. 가족계획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다
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 가족계획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또 여동생을 낳았는데 가족계획에 따르면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나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내 기억에 아버지가 아침에 생산대(生産隊) 소를 산에 방목하고 저녁이면 다시 데려왔다. 아버지는 나를 업고 언덕 저편으로 소를 몰고 가면서 나한테 말했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 소를 저쪽에 데려갔다가 다시 널 데리러 올게.”
나는 나를 버리려는 것임을 알고 울면서 말했다.
“하느님, 부모님은 저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헛되이 왔다 갈 순 없습니다. 저는 아직 자라지도 않았으니 성장하면 부모님께 효도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나의 불쌍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시고는 양심에 가책이 생겨 다시 나를 업고 돌아오셨다.
2. 수행인의 점화
한번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갔다. 젖은 나무가 너무 무거워 나는 등에 지고 올라갈 수 없었고 어머니와 동생의 도움으로 겨우 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에서 쉬고 있는데 비구니로 보이는 한 수행인이 와서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앞으로 당신 장녀에게 잘하세요, 나중에 딸 덕을 볼 겁니다. 저렇게 많이 지게 하다니 그녀를 죽이려 합니까!”
3. 새가 하는 말을 알아듣다
그 후 어머니와 여동생은 나와 함께 일하지 않았고, 또 다른 사람이 소문낼까 두려워 나 혼자 일하게 했다. 나 혼자 산에 있으면 아주 무서웠는데 이럴 때 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려워 마, 내가 여기 있잖아.”
주위를 둘러보니 작고 빨간 새 한 마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또 한 번은 산 어디선가 아주 예쁘고 귀여운 초록색 새 떼가 날아오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대법을 찾는 것을 명심하세요, 우리 많은 생명들이 당신의 구도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새들이 한 말을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나를 무당산(武當山)에 보내 출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부모님은 여전히 나를 원하지 않으셨다. 나는 가기 싫다고 말했고 이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되었다.
4. 천목이 열리자 부모님이 정신병이라고 말해
어렸을 때 나는 천목이 열려서 다른 공간의 사람, 사물, 식물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 사람과 말하거나 인사 할 수 있었다. 또 천상의 구름이 수시로 다양한 풍경, 물건, 사람, 선녀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또 나무는 각기 다른 사람 형태[人形] 및 다른 자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크기와 모양이 달랐다. 내게 말을 하거나 무릎을 꿇고 절을 하거나 두 손을 허스할 수 있었다. 나는 감히 그것들을 볼 수 없어 늘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며칠은 앉을 수 없었는데 사람이 앉기만 하면 전면과 후면에 사람의 머리와 팔다리, 내장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무 무서워서 감히 앉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으며 밥도 먹지 못했다. 왜냐하면 밥도 살아 있는 것을 보았고 철사가 작은 매화록(梅花鹿 사슴의 일종)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부모님은 내가 미쳤다면서 도처에서 나를 봐줄 사람을 찾게 했다. 나를 봐줄 도사를 찾았지만 좋아지지 않았다. 나중에 노도사(老道士)가 나를 도제로 받으려 했지만 내가 원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고 부모님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5. 멀리 하북으로 시집갔다 파경과 재혼
내가 열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는 외지로 일하러 나가셨고 같은 마을에 사는 사촌 언니가 고향집에 와있었다. 어머니는 나더러 사촌 언니를 따라 하북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라고 했다. 하북의 겨울은 아주 추웠고 온통 얼음과 눈만 있었고 봉제 공장도 문을 닫아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사촌 언니는 이에 내 남편감을 찾았는데, 어리숙하고 술담배를 하지 않았지만 나보다 나이가 10년 이상 많았다. 결혼 당일 나더러 몇몇 아이들과 국수를 먹였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마음이 서글펐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수도 좋은 음식이었다. 남편은 차마 먹지 못하고 형수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나는 1989년 정월에 하북에 왔고 1991년 부모님이 가산을 정리하고 나와 함께 살고 싶다며 여동생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막상 와서 보니 남편 집의 형편이 좋지 않았고 또 사람이 어리숙한 것을 알고는 우리를 헤어지게 했다. 엄마는 남편이 바보 같아서 같이 살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나는 임신 4개월이었는데, 어머니는 동생 남편감을 찾는다면서 나를 데리고 다녔다. 사실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내 신랑감을 찾고 있었다.
남편의 형수가 이 사실을 알고 마을 사람 십여 명을 불러와 어머니를 심하게 때렸다. 채찍으로 온몸이 멍들 정도였다. 아버지가 이를 보고는 남편 가족을 공안국에 고발했고 남편을 때리면서 협박하자 남편은 감히 나를 데려가려 하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고향에서 다른 곳에 시집을 갔는데, 조건이 괜찮았고 나와 아이도 잘 대해주었다. 나중에 전남편이 나를 찾으러 왔고 몇 주 후 우리는 재결합했다.
6. 법광에 목욕하며 광명을 향하다
1996년, 내가 23살이고 아이가 5살일 때 나는 심장병에 걸렸지만 병 때문에 복을 얻었다. 그해 4월 25일에 대법을 수련해 좋아졌고 지금도 대법 속에서 견정하게 수련하고 있다. 수련으로 복보(福報)를 얻었기 때문에 성도(省都)에 집도 마련했고, 또 아들에게 결혼할 집도 사줬으며 사는 것도 괜찮다. 아들은 아주 총명하고 공부도 잘해서 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은 교사로 있다. 여동생은 1998년 4월부터 대법을 수련했고 노제자다.
비록 고난의 인생이었지만 법을 얻어 마침내 광명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 생활 형편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대법을 수련해 돌아갈 곳이 생기자 마음이 착실해졌다. 이는 어떤 물질적인 향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박해와 가택 수색, 납치를 당하긴 했지만 늘 정의를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내 마음은 늘 희망과 광명이 가득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