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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 진상 삽입방송을 주도한 왕옥광 인터뷰 (2)

여명(黎明) 취재

【정견망】

3. 하얼빈으로 돌아오다

저는 무사히 외지(外地)의 어느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방송에 관한 일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그저 사악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숨겼습니다. 며칠 후 하얼빈 동수가 알려주길 강택민이 흑룡강성 공안부에 20여 만 위안의 돈을 주면서 총 200명이 넘는 인원으로 전담팀을 구성했다고 했습니다. 성 공안청에서 저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고, 제가 배후 협조인임을 알았으며 곳곳에 사진이 게시되었습니다. 공안국, 보위국, 610 사무실, 국보대 등이 차례로 우리 집을 찾아와 사람을 내놓으라면서 반드시 잡아들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전담조가 저를 찾지 못하자 우리 집이 있는 향방구(香坊區)에서 40명이 넘는 동수들을 납치했습니다. 그들은 남편에게 나를 찾아내라고 했고 남편은 수련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히고 감시하며 미행하고 도청했으며 집에 사람이 없을 때 불법으로 침입해 도청기를 설치했습니다. 나중에는 남편을 체포해 불법으로 구금하고 제가 간 곳을 자백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열다섯이던 아들은 방과 후 아버지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자 몹시 겁이 났습니다. 경찰은 남편과 아들에게 나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했고, 그들에게 극히 큰 정신적 피해를 입혔습니다.

남편이 구금되었다 석방된 후, 경찰은 그에게 매주 제가 집에 돌아왔는지 저를 본 적이 있는지 보고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남편은 직장에서도 직위가 강등되었고 급여가 깎이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듣고 나서 저는 마음속으로 두려움과 근심 걱정이 올라왔고 온갖 생각들이 다 떠올랐습니다. 사악이 이렇게까지 우리 가족을 대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당분간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돌아가서 그들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이 도시에 있으면 나는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정념(正念)이 또 나를 몹시 불안하게 했는데 여기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이것은 숨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게 많은 동수들이 체포되었는데 협조인인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 숨어 있을 수 있는가? 저는 속으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 발생한 일이 제게 아주 깊은 감동을 주었고 저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어느 날, 현지 협조인의 아내와 함께 진상 카드를 배포하러 나갔는데, 배포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말했습니다.

‘나는 곧 배포가 끝납니다.’

저도 말했습니다.

‘나도 배포를 끝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한 장 더 드리죠.”

내가 받아서 습관처럼 자료를 만져보니 확실히 한 장이었다. 나는 속으로 배포가 꽤 빨라서 오늘 가져간 게 부족하니 다음에 더 가져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손에 카드가 한 장 더 있는 것을 보고 멍해져서 만져보니 또 한 장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두 장을 그녀에게 주었는데 손으로 만지작거리자 한 장이 또 나와서 둘 다 멍해졌습니다. 저는 즉시 사부님께서 공능으로 저를 격려해 주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악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들은 모두 공능(功能)이 있고 사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부님께서 다시 한 번 신적(神跡)으로 저를 격려해 주셨고, 제게 지혜와 힘을 주셨습니다. 저는 용기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현지 동수들과 교류하고 법 공부와 반성을 하면서 나는 신속하게 애초 삽입방송을 할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특히 사부님께서 공능을 드러내 점화해 주셨을 때 내심이 더욱 확고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은 우주에서 가장 큰 일이고 가장 바른 일이며 누가 우리를 체포하면 그는 우주에서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임을 청성하게 인식했습니다.

‘사악은 나를 잡을 수 없다!’

이런 일념이 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내가 마땅히 감당할 조사정법(助師正法)의 책임속으로 돌아가, 생사를 함께한 동수들 속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순정(純正)한 심태를 품은 지 십여 일 후 저는 동수들의 만류를 거부하고 의연히 그 도시를 떠나 하얼빈으로 돌아왔습니다.

삽입 방송 전에 내 주변에는 유리실소(流離失所)하던 많은 대법제자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미 하나의 정체(整體)를 구성해 일부 지역에서 진상 자료를 제작하는 일을 담당했고, 심지어 시내 빌딩가나 교외 촌(村), 둔(屯), 진(鎭)에 가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자료점이 아직 도처에 꽃을 피운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하얼빈에 돌아온 후 방송 후 유리실소하는 대법제자를 모아 그들과 함께 나가 각 진이나 촌에 자료점을 세우고 진상자료를 배포하도록 도왔습니다.

당시 삽입방송 일에 협조했던 장충은 경찰에 체포돼 불법으로 1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을 지경까지 고문을 당해 온몸의 근육이 위축되고 일부 신경이 마비되어 겨우 숨만 남아 있었습니다. 경찰은 장충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판단해 그를 석방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동수들의 도움을 받아 법을 공부하고 연공했으며, 신속하게 생명위험에서 벗어나 한 달 후 건강이 회복되어 역시 우리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어느 지역 자료점 건설을 돕기 위해 외지로 갔습니다. 우리는 자료가 담긴 상자 3개와 기타 물품을 챙겨서 아침 일찍 버스표를 샀습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다른 시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또 이미 버스표를 샀고 현지 동수들과 약속도 잡아놓았기 때문에 약속을 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고 있으므로 모든 것이 이를 위해 양보해야 하며 모든 교란을 제거해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과연 10여 명의 경찰이 사람을 가로막고 소지품을 검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즉시 발정념을 했고, 잠시 후 우리가 탄 차는 경찰들에 둘러싸였습니다. 차 문이 열리자 7, 8명의 경찰이 시끄럽게 우리 소지품을 검사하러 왔습니다. 저는 아주 차분한 마음으로 일념(一念)을 내보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주에서 가장 바른 일이니 누구도 우리를 조사할 수 없다! 모두 내려라! 내려! 내려! 내려!’

그러자 한 경찰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내리자.’

경찰은 아무것도 수색하지 못했고 마치 지령을 받은 것처럼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렸습니다.

또 한번은 우리가 가목사의 어느 자료점 동수에게 기술을 지도하러 갔습니다. 우리 일행은 4명인데 운전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이 모두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총을 든 경찰 12명이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을 가로막고 검문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어느 감옥에서 집단 탈옥 사건이 발생해, 곳곳에서 경찰이 이들을 막고 체포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차를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경찰은 마치 큰 적을 마주한 듯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경찰은 우리 차량의 문 4개를 동시에 열었습니다.

저는 담담한 표정으로 오렌지를 손에 쥐고 껍질을 까면서 강력한 정념을 내보냈다.

‘사악이 우리 공간장에 들어와 우리를 건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누가 건드리면 그가 죄를 짓는 것이다!’

마침 내 옆에 앉은 동수는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머리카락이 없었습니다. 경찰은 그의 사진을 찍고 앞모습과 옆모습을 비교해 보았으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정념의 강력한 공능으로 사악을 제약하자 경찰은 모두 눈 뜬 장남과 같았고, 누구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은 줄곧 정념을 지켰고, 기적적으로 관을 넘어 중생을 구도했습니다.

여러 차례 정념과 공능의 위력을 펼쳐낸 경험을 거치며 엄혹한 환경은 우리가 더욱 정념정행하고 침착하고 지혜롭게 만들었습니다. 그 지역 향진(鄕鎭)과 촌둔(村屯)을 두루 다니며 곳곳에 자료점을 만들었습니다.

삽입방송 3개월이 지난 8월 29일, 나는 경찰이 우리 집에서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 겁난에 빠진 남편과 아들을 만나 오직 중공의 사악한 박해 때문에 엄마를 원망하거나 대법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당부하려고 결정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잠복한 경찰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집 문을 열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저를 보고는 단번에 겁에 질린 새들처럼 깜짝 놀라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저를 밀어내며 말했습니다.

‘빨리 나가! 빨리 가! 빨리 가! 다신 오지 마! 돌아오지 마!’

저는 닫히는 문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 1999년 7월 20일부터 경찰은 곳곳에서 보도소장과 협조인들을 체포해 왔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유리실소했고 집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든 대법제자들은 다 중공이 우리를 박해하기 전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수련 환경과 화목하고 가정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2년 후 어느 날, 나는 다시 남편과 아들을 만나기 위해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날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문을 열었는데, 아들 혼자 집에 있었다.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고 저는 말했습니다.

‘엄마는 네가 보고 싶었단다, 너와 아빠를 보러 왔어.’

그러면서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죠. 그는 겁에 질려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더니 나더러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떠나지 않는 것을 보자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땅에 던지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엄마, 제발 빨리 가세요! 다시 아빠를 보러 오면 아빠는 죽어버릴 거예요. 그들이 잡으러 올 거예요.’

저는 아들의 두려움을 이해했습니다. 악경의 일반적인 수법은 대법제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법제자들의 가족들을 위협하고, 강요하고, 고문하는 것이니까요. 삽입방송 후, 아들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마난을 겪었습니다. 저는 아들을 끌어안고 빨리 말했습니다.

‘언제든지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기억해야 해. 엄마는 좋은 사람이고 엄마가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란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했다.

‘빨리 가요! 빨리 가세요!’

그 장면은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습니다.

삽입방송 이후 경찰의 박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도 경찰은 결국 저와 저와 함께 했던 동수들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와 무한한 보살핌은 우리에게 그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낼 수 있는 정념과 용기, 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매번 위난에 처할 때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깊이 명심하며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홍음 2》〈정념정행〉)

4. 잊을 수 없는 기억

“각지에서 발생하는 유사한 TV 삽입 방송 사건을 엄중히 처벌하라”는 강택민의 사악한 명령에 따라, 진상 삽입방송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해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박해가 가해졌다. 진상 방송이 나간 모든 지역에서는 미친 듯이 사람을 체포했고 심지어 참여자들의 친지, 친구, 직장 등을 연루되었다. 체포된 파룬궁 수련생들은 모두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사악한 정책을 겪어야 했다! 파룬궁 수련자들을 때려죽여도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극단적이고 잔혹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고 불법 판결과 노동 교양을 가했다.

왕옥광은 하얼빈, 가목사, 대경, 쌍성 4개 시 진상 방송 조직자로 자신이 참여한 하얼빈, 가목사, 대경, 쌍성 4개 시의 방송 전후 일부 개인적인 경험과 과정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줄곧 유리실소(流離失所) 했기 때문에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필자 그녀가 제공한 정보와 사이트 검색을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추가했는데, 보다 많은 수련생들이 박해받은 내막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우선 인터뷰에서 왕옥광이 언급한 황민을 보자. 필자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황민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그가 왕옥광을 찾아가 하얼빈, 가목사, 대경 및 쌍성 4개 도시에 삽입방송을 협조하기 전에 황민과 다른 동수들은 이미 학강, 쌍압산, 치치하얼, 목단강 및 계서 시의 삽입방송 일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었다. 이에 하얼빈, 가목사, 대경, 쌍성 등 4개 도시 삽입방송 준비를 마친 뒤 2002년 4월 20일 오후 7시 황금시간대에 흑룡강성 9개 도시에 파룬궁 진상을 동시에 방송하는 영웅적 위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방송을 마친 후 황민은 무사히 대피해 산동성에 도착했다. 산동성에서 황민은 또 산동 파룬궁 수련자 장낙금(張樂金), 여계령(呂桂玲), 강로광(姜魯廣) 등 3명에게 삽입방송 기술을 가르쳤고, 위해(威海), 영성(榮成), 유산(乳山), 문등(文登) 등지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리는 영상을 성공적으로 삽입 방송했다. 하지만 황민은 이번에 불법 체포됐다.

2003년 6월, 산동 경찰은 불법으로 황민에게 20년, 장낙진에게 20년, 강로광에게 20년, 여계령(여자)에게 징역 19년형을 선고했다.

흑룡강성 9개 도시에서 삽입 방송에 성공한 후 경찰은 도처에서 황민을 체포하려 했고 그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며, 24시간 감시했다. 황민의 가족과 자녀들도 수시로 추적 감시당했다. 종종 한밤중에 공안국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고, 황민의 친척들도 연루되어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의 모든 전화 통화는 수년 동안 감시되어 가족에게 큰 압력과 정신적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런 박해 방식은 왕옥광 가정과 다른 모든 대법제자들을 박해한 것과 동일하다.

황민은 산동성에서 불법 감금된 기간에 경찰이 방교(邦敎)와 다른 죄수들을 사주해 다양한 고문 방법으로 그를 괴롭혔고, 황민은 장기간 엄격한 관리와 학대를 당했다. 황민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40여 차례 단식 항의했다. 가족들이 산둥성 제남(濟南) 교도소 병원에 그를 보러 갔을 때 그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가족들은 줄곧 그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2017년 8월에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는 출옥한 후 얼마 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박해가 더욱 심한 곳은 학강 시였다. 당시 학강 시 시 위원회 서기 장흥부(張興富 장싱푸)는 다음과 같은 악랄한 명령을 내렸다.

“한 명을 실수로 놓아주기보다는 차라리 5천 명을 잘못 체포하는 것이 낫다!”

학강 시에서는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고 시 공안국, 흥안 분국, 할구(轄區) 파출소, 광구(礦區) 파출소, 구(區) 정부 및 “610”이 모두 출동해 600~700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을 7일 밤낮으로 납치해서 집단으로 고문해 수백 명에게 불법 자백을 받아냈다. 당시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감옥에 갇힌 수련생 중에는 78세 노인도 있었다. 삽입방송에 참여한 수련생들은 잔인한 극형과 중형을 받았다.

학강 삽입방송에 참여한 파룬궁 수련자 5명은 모두 불법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왕수삼(王樹森)은 불법으로 징역 18년을 선고받았고, 장요명(張耀明)은 불법적으로 징역 19년을 선고받았다 2022년 4월 고문으로 사망했다. 곽흥왕(郭興旺)은 불법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2009년 6월 3일 고문으로 사망했다. 양영잉(楊永英)은 불법적으로 17년 형을 선고받았고, 곽충관(郭忠權)은 불법으로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왕수삼의 아내 이효봉(李曉峰)도 불법적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집에는 겨우 7살 어린 아들만 남았다.

또 대경시 삽입방송에 참여한 파룬궁 수련자 장충은 35세 남성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대경 라화 직원이었다. 삽입방송을 협조한 혐의로 붙잡혀 불법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생명이 위험할 때까지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동수들의 도움을 받아 법을 공부하고 연공해서 빨리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2006년 10월 16일 두 번째 체포돼 하얼빈 공안병원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주수민(朱秀敏)은 30세 여성으로 2002년 4월 불법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해(李海)는 1988년 하얼빈 사범대 생물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대경 시 제64중학교 교사로 재직인데 불법적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계서 시에서는 파룬궁 수련생 40세 남성 왕학세(王學世)가 불법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쌍압산 시에서는 공상주(孔祥柱)가 불법으로 징역 8년을 선고 받았다. 경찰은 그에게 각종 고문을 가해 자백을 강요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경찰에게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악경이 철제 도구로 그의 배를 찔러 구멍이 뚫렸고 장에 밖으로 흘러나왔다. 2007년 4월 그의 가족이 그를 감옥에서 집으로 데려갔지만 두 달 후 사망했다. 향년 39세.

하얼빈 시에서는 파룬궁 수련생 류호명(劉昊明)이 불법으로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우리는 목숨을 버리고 의연히 아직도 형을 선고받거나 감금된 동수들을 잊을 수 없다. 이외에도 당시 체포된 수련생들이 아주 많은데, 그들은 몇 년에서 10여 년, 20여 년 이상 중공 감옥에서 끔찍한 박해를 겪었다. 더 많은 잔혹한 박해, 사망사건, 실종 사례들이 있지만 상황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우리는 언젠가는 그 전체 사항이 완전히 드러날 것임을 믿는데 하늘 그물은 넓고 커서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는 사악은 없다.

왕옥광은 당시 아들을 몇 분 만난 후 더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지만 이 일은 그녀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그녀는 2014년 해외로 망명했고 인도네시아에서 유엔기구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으며 지금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지금은 이미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강택민 범죄 집단의 거짓말과 기만에 속아 넘어간 많은 사람들을 자비롭게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의리를 위해 나서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생명을 대가로 무수한 희생을 감당하며 중생을 구하고 있다. 설사 아홉 번 죽어도 후회가 없다.

지금은 인류 역사상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으로 중국 공산당은 언제든지 해체될 것이며, 박해는 언젠가 끝날 것이다. 파룬따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박해를 거친 후 반드시 인류를 위한 가장 위대한 진리가 되어 인간 세상을 빛출 것이다! 파룬궁 수련자들의 명예와 존엄도 결국에는 회복될 것이다! 그 노래는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2024년 10월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3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