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부동한 층차에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음”에 대한 작은 깨달음

중국제자

【정견망】

1. 번거로움과 마난(魔難)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번거로움[麻烦 성가시고 귀찮은 것]과 마난을 겪는다. 감수(感受)의 각도에서 보자면, 번거로움과 마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번거로움과 마난은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내원(來源)’이 다르고 여기에 사람마다 경험과 형성된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번거로움과 마난을 만나게 되는데 감당 능력 역시 다르다.

기왕에 번거로움과 마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럼 이런 번거로움과 마난은 또 어떻게 생긴 것인가? 그것이 생겨난 근거는 또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2. 업력

번거로움과 마난의 내원과 해결 방법을 똑똑히 알고 싶다면 오직 고층차의 이치로만 의혹을 해결할 수 있다. 속인 층면(層面)에서는 의혹을 풀 방법이 없다. 사람보다 높은 이치로 보자면, 한 생명이 전에 좋지 않은 일을 해서 업력이 생겼다. 번거로움과 마난을 통해 스스로 빚을 갚고 업력을 없애는 것이다. 그렇다면 업력은 또 왜 생길 수 있는가?

3. 심성(心性)

고층차에서 보면 한 생명의 사상이 서로 다른 행동을 만든다. 좋은 사상은 좋은 행동을 낳고, 나쁜 사상은 나쁜 행동을 낳는다. 나쁜 행동이 곧 업력을 생기게 하는데, 즉 ‘심성(心性)’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또 무엇이 심성을 나쁘게 하는가?

4. 우주의 법칙

더 높은 층면에서 보면 우주의 모든 것은 우주가 운행하는 규칙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이 법칙이 바로 ‘성주괴멸(成住壞滅)’이다. 그렇다면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생명의 심성이 나쁘게 변한 것 역시 이 법칙의 운행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그렇다면 이 법칙의 원인은 또 무엇 때문인가? 또 어떻게 해야 개변할 수 있는가?

5. “위사(爲私)”의 기본 속성

더 높은 층면에서 보면, ‘성주괴멸’ 법칙은 또 ‘위사(爲私)’라는 근본 속성에서 초래된 것이다.

6. 가장 높은 곳에서 문제 보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번거로움과 마난은 단지 표상일 뿐이고 근본원인은 바로 업력이다.

더 높은 이치로 보면 업력은 표상이고 근본원인은 심성문제다.

더더욱 높은 이치로 보자면 ‘심성’ 문제 역시 표상일 뿐이고 근본 원인은 우주 ‘성주괴멸’의 법칙에서 비롯된다.

더더더욱 높은 이치로 보면 ‘성주괴멸’의 법칙 역시 표상일 뿐이며, 근본 원인은 ‘위사(爲私)’란 근본 속성에서 비롯된다.

구우주(舊宇宙)든 신우주(新宇宙)든 법리는 모두 위에서 아래로 관통된다. 층차가 높을수록 우주대법에 더 가까워진다. 층차가 낮을수록 문제를 보는 것 역시 고층차에 보는 것처럼 똑똑하게 보고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며 미혹도 더 크다. 즉 ‘진리’와 더 멀어진다.

구우주의 근본 속성이 ‘위사’하기 때문이다. 이 ‘위사’는 전반 구우주를 관통한다. 이는 부동한 층차, 부동한 시공 생명의 몸에서 모두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 체현된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면 이 ‘자아’와 이 ‘사(私)’가 아주 강해지는데, 당신의 층차가 높고 자신이 더 대단하다고 더 위대하다고 느낄수록 자아도 더 강해진다!

그러나 신우주의 근본 속성은 ‘위공(爲公)’한 것이다. 이 ‘위공’ 역시 전반 신우주를 관통한다. 부동한 층차, 부동한 시공 생명의 몸에서 체현되는 것은 바로 남을 위하는 상태다. 층차가 더 높을수록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상태가 더 강해진다. 더욱이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7. 어떻게 해야 가장 표면적인 “번거로움과 마난”을 해결할 수 있는가?

현실 속에서 우리는 부동한 층차에 함몰되어 우리가 마주한 ‘번거로움’과 ‘마난’을 바라볼 것이며 가장 높은 곳에서 문제를 보지 못한다. 부동한 층차에서 문제를 보면 모두 ‘미혹’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층에선 고층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인데 고층의 ‘지혜’가 없다.

개인적인 이해로 원만하기 전이라면 여전히 ‘번거로움’과 ‘마난’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사존께서 우리에게 남겨진 ‘업력’을 이용해 우리의 ‘심성’과 ‘층차’를 제고시키기 때문이다. 수련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러한 ‘번거로움’과 ‘마난’이 나타날 때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직면하는 가이다.

‘위사위아(爲私爲我)’의 기점에 서는가 아니면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기점에 서서 대하는가! 명확히 말하자면, ‘구법리(舊法理)’의 관할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신우주’ 법리의 관할로 돌아갈 것인지의 문제다. 기점이 다르면 가장 표면의 ‘번거로움’과 ‘마난’의 결과도 분명히 달라진다.

사존께서는 《전법륜》에서 연공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을 말씀하셨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수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신우주로 가려 하는데 그럼 신우주의 법리를 알아야 하는 동시에 구우주 법리의 결함도 똑똑히 알아야 한다. 게다가 끊임없이 자신을 대조해서 신우주의 법리로 바로잡아야 한다. 장기간 견지(堅持)한다면 반드시 신우주 속으로 동화할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3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