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안과 밖은 서로 반대이며 또한 피차 상극(相克)이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의 법보(法寶)인 “안으로 찾음”을 알려주셨는데 왜 자신은 안으로 찾으려 하지 않는가? 마치 법리(法理)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는데, 마치 나는 그 속에 없는 것 같고 자신은 마치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으며, 눈에 가득 찬 것이란 전부 상대방의 잘못이고, 나는 위대하고, 광명하며, 올바르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공산사령(共産邪靈)의 독소가 깨끗이 제거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찾고 싶지 않을 때를 돌아보면, 흔히 사람의 이치에 따라 가늠하고,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이 자신을 찾는 것을 장애하고, 관념이 이런 장애을 수호해서 사람이 온통 이런 부면(負面)적이고 변이된 관념에 “맡겨진” 것처럼 보이고, 사람이란 이 육신(肉身)은 그저 마비된 것처럼 표현된다.
그 어떤 일이든 다 양면성(兩面性)이 있는데, 사람은 또 다른 공간에 생명이 있다. 즉, 사람 역시 명백한 그 일면이 있지만 사람 마음이 너무 강하면 명백한 그 일면이 억제당하고, 사람 마음이 적어지면 명백한 그 일면이 부활해 양성(良性)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바로 정념(正念)이 있는 것으로 법(法)에 따라서 자신을 가늠해 안으로 찾을 수 있다. 법리가 눈앞에 펼쳐질 때면 마치 큰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배가 전방에 등대를 보고, 희망을 보고, 광명을 보는 것과 같다.
구우주(舊宇宙)의 변이는 그 특성이 위사위아(爲私爲我)하기 때문이며, 변이의 원인은 안에서 밖으로 변화한 것이다. 즉 마음이 오염되고 사상이 불순(不純)해져서 우주 진선인(真善忍) 표준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좋게 변화하려면 마음을 개변하고, 사유 이념을 조정하고, 사람의 관념을 개변해서, 좋지 않은 요소를 제거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점차 더 좋게 변할 수 있다. 이것은 안에서부터 개변인바, 다시 말해 미시적인 것에서 오는 개변이다. 안으로 찾음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기제(機制)로, 만약 우리가 시시각각 안으로 찾을 수 있다면 그럼 이 기제는 갈수록 더 강해지는데, 안으로 찾음이 법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 기제가 양성 순환하기 때문이다. 법의 가지(加持)하에 당신 신체 전반을 개변할 것이다.
수련이란 마치 껍질을 벗는 것과 같아서, 사람 이 층 외각(外殼 겉껍질)을 벗으면 본성의 일변이 곧 드러나는데 상응하는 법리 역시 당신에게 펼쳐진다. 마음에 법(法)이 있으면 법을 견고하게 지킬 수 있고, 대법이 지혜를 줄 수 있으며, 사람이 이성적이게 하는데 견수(堅守 견고하게 지킴)하는 정도는 또한 신사신법(信師信法)의 검증이다. 사부님의 자비는 내게 무궁한 힘을 가져다주는데 법을 견고하게 지키고 선을 지키고 심성을 지키면 일체는 다 화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은 무소불능(無所不能)하기 때문이다.
밤에 아주 선명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속에서 뱀 껍질이 떨어진 것 같았는데 꿈속에서 그 떨어진 껍질을 아주 똑똑히 보았다. 나는 사람의 관념이란 그 층의 껍질이 떨어진 것임을 느꼈는데 왜냐하면 모순 속에서 내가 법을 지키고 관념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가상에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 이 층의 껍질이 벗겨진 것이다.
수련이란 끊임없이 사람의 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안으로 찾아야만 사람의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자신의 부족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사람 이 층 껍질의 장애가 있어서 관념에 가로막힌다. 왜냐하면 이런 변이된 물질이 해체되고 소각당하지 않기 위해 뛰쳐나와 교란하기 때문이다.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수련인이 모순을 만날 때 늘 사람의 방식으로 하고, ‘자아(自我)’를 둘러싸고 고려한다. 이렇게 하면 곧 법(法)의 위력이 없고 또한 법의 가지(加持)를 얻을 수 없다. 안으로 찾으면 곧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데 즉 사부님 말씀에 따르는 것이다.
작은 수련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