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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경의 난을 통해 악을 제거하려면 끝까지 해야 함을 말하다

운방(雲芳)

【정견망】

1. 후경(侯景)의 난

남조(南朝)의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은 한 시대를 풍미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문학, 음악, 서법(書法), 바둑, 고금 연주, 무공, 승마, 검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유석도(儒釋道), 삼교 이론에도 정통했으며 특히 불교를 높이 숭상했다. 개인 생활 방면에서도 자기 규율이 아주 엄격했지만, 친근하고 검소하며 소박했다. 늘 아침 일찍 일어나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주로 채식 위주로 소식(小食)했고 심지어 여색조차 멀리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2년 동안 한 이불을 쓰고 5년 동안 같은 모자를 쓸 정도였다.

양 무제는 직접 천하를 차지하고 왕조를 수립한 인물로 제위(帝位)에 오른 후에도 정사에 근면했고, 조정에 충실했으며, 재능 있는 사람들을 등용하고, 교육을 확립하여 양조(梁朝)가 모든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했다. 그는 나라를 어질게 다스렸고, 관대하고 인자해서, 신하나 백성들에 대한 처벌을 줄이고 감화(感化)와 교육을 중시했다. 때문에 그의 통치 하에서 양조는 40년 이상 번영을 유지했다. 남북조 시기 많은 황제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황제가 최후에 굶어 죽는 비참한 결말에 처했고 단지 자신이 세운 나라만 망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거대한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후경(侯景)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교활하고 간사하며 변덕스런 위인이었다. 그는 애초 동위(東魏)에 반란해 서위(西魏)에 투항했지만, 나중에 다시 서위를 배반하고 남쪽인 양(梁)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후경은 양 무제의 은혜를 원수로 갚아 소정덕(蕭正德)과 연합해 모반했다. 사실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누군가가 양 무제에게 이를 보고했다. 하지만 양 무제는 후경을 철저히 조사하고 처벌하는 대신 그에게 상을 주었고, 결국 후경이 반란에 성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소정덕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양 무제의 조카였다. 도덕이 패괴(敗壞)했고 품행이 좋지 않아 일찍이 양 무제를 배반하고 적국에 투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되자 다시 양 무제에게 투항했다. 원래 반역죄는 대역죄였지만, 양 무제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작위를 주고 상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그를 감화하긴커녕 오히려 화란(禍亂)을 일으킬 조건과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다.

이렇게 후경은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수도인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을 공격했다. 그는 휘하 군인들이 식량, 재산, 부녀자를 약탈하고 대대적으로 살육하도록 방임했고 건강성은 곧 기근에 시달렸으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공포 국면이 나타났다. 불과 두세 달 만에 도성이 황폐해졌고 신하와 백성, 사병들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대개 피살되거나 굶어 죽었으며 시신을 묻어줄 사람조차 없어 시신이 썩어갔다. 또 큰 역병(疫病)이 발생해 그야말로 인간 지옥으로 변했다. 양 무제도 후경에 의해 독방에 감금당한 채 음식을 주지 않아 결국 산채로 굶어 죽었다. 향년 86세였다.

후경은 괴뢰 황제를 세운 후, 자신을 “우주 대장군”에 봉하고 권력을 독점하며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다. 걸핏하면 사람을 고문해 코를 자르거나, 혀를 자르고, 사람을 때려죽였다. 자신이 직접 나서 많은 사람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휘하 병사들을 시켜 대대적인 학살을 하도록 방임했다. 4년간 지속된 후경의 난은 남량(南梁)에 거대한 겁난(劫難)을 초래했다. 건강 성안의 웅장한 건물들은 초토(焦土 불에 타고 남은 잿더미)가 되어 폐허로 변했다. 태자의 동궁에 있던 수백 개의 서가가 모두 불에 타서 땅속에 묻혔고 황궁마저 잿더미로 변했다.

건강성의 수십만 명이 죽었고, 왕조도 멸망해 얼마 후 진(陳)으로 대체되었다.

후경의 난이 발생한 원인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남겨주었다. 실제 상황을 보면, 양 무제가 덕이 없거나 지혜가 없거나 무능하진 않았지만, 악도(惡徒 악의 무리)들을 무절제하게 포용해 결국 자신도 죽고 나라도 망했고, 백성들에게 재앙을 일으켰다. 그는 비록 독실한 불교 신자였지만, 황제로서 완전히 개인 수련의 각도에서 출발해 오로지 자신의 선행(善行)에만 전념했고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법 집행이 엄격하지 않았고, 상벌(賞罰)이 명확하지 않았으며 악인과 반역자들을 지나치게 비호(庇護)했기 때문에, 사악을 억제하고 선량을 보호할 수 없었으며 안전 위험을 근절하지 못했으니 실로 자사자리(自私自利)한 표현이자 또한 일종의 죄악이다.

인간 세상에는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고, 좋고 나쁨이 공존하기에 역대로 악을 징벌하고 선을 장려하는 도통(道統)이 있었음에도 도(道)에 어긋나 반대로 한 것은 이 층차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이 선량할 수는 있지만, 매사에 법도가 있어야 하며, 너무 지나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만 못하다. 사악에 대한 무절제한 포용은 실질적으로 선량이 아니라 방종이며, 이렇게 해선 정의(正義)를 펼치고 선량을 보호할 수 없다. 때문에 나라에는 국법(國法)이 있고, 집안에는 가규(家規 가문의 법도)가 있으니, 오직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 악을 효과적으로 다스려야만 국가 질서가 정연해지고 백성이 재난을 벗어날 수 있다.

2. 유다와 간첩특무에 대한 원칙과 태도

현재 법난 속에서, 동수들은 유다와 중공의 간첩특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교류하고 있다. 어떤 동수들은 포용하고 용서하며 기회를 주자고 하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다.

사부님께서 비록 자비하시지만, 법에는 표준이 있고, 정법(正法)은 곧 결속되며, 기회는 무한하지 않다. 20여 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유다와 특무간첩들은 오랫동안 대법제자 속에 있었고 대법을 인식할 시간과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들이 진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또한 중국대륙 동수들처럼 중공의 강력한 위협에 직면한 것도 아니고 정보도 완전하고 환경이 느슨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우주의 이치는 공평한 것으로 누구에게나 다 마찬가지다. 신(神)은 일이 아니라 사람 마음을 본다. 이는 단지 구도(救度)에서만 체현되는 것이 아니라 도태(淘汰)에도 체현된다. “특수한 일”은 무슨 호신부가 아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했다면 반드시 후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한 평범한 사람이 사부님과 대법, 대법제자에 대해 마음속에 악념(惡念)을 품는다면 모두 도태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거운 죄를 저지른 이런 사람들을 무한히 포용해야 하는가? 설마 죄를 저지르는 것에도 이치가 있단 말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은 더 많은 우대를 받고 마땅히 특권을 누려야 한단 말인가? 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변칙적으로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대법제자들은 수련 중에서 “선(善)과 인(忍)”의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이 하나의 원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부님께서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법을 말씀하셨다. 2006년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나와 뭇 신들은 인류의 이런 직업의 앞길(前程)을 완전히 없애버릴 것이며, 99년 ‘7.20’이후 중공악당이 만들어낸 모든 깡패 특무들의 인생에서 타고난 복을 없애버릴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은 죄악을 갚는 중에서 극히 짧은 인생을 마치게 할 것이다. 특히 애틀랜타 사건에 참여하고 획책한 모든 사람은 그들의 인생에서 타고난 복을 전부 없애버릴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장차 악업(惡業)을 갚는 중에서 삶이 죽느니만 못할 것이며, 게다가 아주 빨리 하나하나 사망한 후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중국과 해외의 모든 중공특무는 다 동일한 끝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일체 중생을 구도하고 있으며, 미래를 원하지 않는 자들 역시 그것들에게 중생이 구도 될 기회를 훼손하게 할 수는 없다.”(《정진요지 3》〈사악을 제거하자〉)

비록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사악의 조종을 받긴 하지만, 사악이 찾는 대상이 되는 사람은 우연이 아니다. 왜 다른 사람을 찾지 않는가? 아마 그 사람이 사악이 배치해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사부님과 대법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하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구도 받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즉 구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주 많다. 악인들에게 악행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중생에 대해 책임지는 것으로 몇몇 악인들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훼멸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사악이 아니겠는가?

최근 들어, 해내외(海內外)에서 많은 난법자(亂法者 법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나타났다. 어떤 수련생들은 구체적으로 이들을 대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그 사람을 멀리하고, 그에게 시장을 주지 말 것을 건의한다.”(《다시 방할하노라》)라고 하신 사부님 말씀을 단호하고 과감하게 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관용해야 하며 기회를 주어야 한다”면서 개인의 높은 경지를 드러내는 데 집착하면서 오히려 난법자들이 대법과 대법제자에게 심각한 피해를 조성하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한다. 이는 사실 자아에 집착하는 과시심의 표현이다. 개인의 경지와 이미지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을 수호하는 것만이 대법제자의 근본적인 책임임을 망각한 것이다. 이는 난법자가 일을 크게 꾸미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만든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다.

정법이 추진되고 사악이 깨끗이 제거됨에 따라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끝장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대법제자들 중 아직도 “유다와 간첩, 특무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사상을 갖고 있다면 악을 철저히 제거할 수 없고, 사악이 숨 쉴 기회를 주어 법난 시간을 연장하고 사부님의 부담을 가중 시키고, 대법제자들이 악을 제거하는 어려움을 증가시켜 중생 구도에 영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사악에게 “당신들 대법제자가 허락한 것이다”라며 존재할 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체에서 하나의 큰 누락이다! 사실, 이것은 아마 절망에 처한 사악한 생명이 억지로 심어놓은 사상염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존재할 기회를 얻기 위해 극히 교활한 수단을 총동원해 발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여기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에게 慈悲(츠뻬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 생명이 정말로 그 좋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법으로 가늠하는 것이며 더 慈悲(츠뻬이)하다면 바로 무절제한 것으로, 스스로 훼멸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런 생명은 도태하기로 정해질 것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오직 정법의 원칙만 따를 뿐 의식하든 하지 않든 도태되기로 정해진 사악한 생명을 보호해선 안 된다. 악을 제거함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선량, 관용, 양보”를 극단화시키는 것은 공산사령의 음모

오늘날 중국에서는 중공이 중국인들의 활로를 막아버리자 많은 사람이 일어나 반항하고 있다. 통제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중공 위선적으로 “전통문화 회복”과 “조화”란 기치를 치켜들고 사람들을 기만하며 억지로 참고 복종하게 하면서 중공의 이런 뒤집힌 행동을 무제한 포용하고 참으라 강요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폭도, 공공질서 파괴, 사회 치안 교란, 국가안보 파괴 등의 죄명으로 손을 본다는 것이다. 이는 그것들의 뻔뻔한 음모다.

서방 사회에서 공산사령(共産邪靈)은 자유를 구실로 삼고 자유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 모든 도덕, 법률과 전통의 단속을 부정하고, 민중의 마성(魔性)을 방임하고, 사회 안전과 질서를 파괴하도록 방임하면서도 오히려 법적 제재를 피하게 한다. 공산사령은 “다양성, 포용, 평등”이란 기치 아래 절대 평등주의를 추진하며 “모든 사람이 신 앞에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기회가 균등하다”는 단편적인 결과를 평등으로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일부 사람들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혜택과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박애(博愛)를 무원칙하고 무한한 “관용”으로 변질시켜 범죄자, 마약범, 테러분자 등을 보호한다.

공산사령의 변이된 법률에 의해 변칙적으로 선량을 제재하고 죄악을 보호하기에 이르자, 많은 정상적인 행동에 가혹한 비난을 받고 오히려 도덕에 반하는 행동은 극도로 너그럽게 방종되어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고 소위 “평화”를 구실로 법의 집행을 제한했다 이는 범죄자들에게 녹색등을 비추고, 범죄자들에 대한 효과적인 처벌을 가로막고, 범죄자들의 권익을 과도하게 보호해, 범죄자들을 무원칙하게 비호하고, 처벌을 완화하거나 일찍 풀어주는 것을 “인도(人道)”니 “관용”이니 “생명 존중” 등의 명분으로 사형을 폐지한다.

이렇게 법이 약화되어 틈이 생기면 공정성, 신성함, 합리성을 잃고, 적절한 효력을 잃게 되거나 심지어 사악(邪惡)으로 이끈다. 이는 단지 민중들에게 실질적인 피해와 심각한 안전 위험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가치관을 뒤집어 인류의 사상을 어지럽게 변이시키고 정통문화를 뒤엎어 인류 도덕을 훼멸하고 사회질서를 파괴해 사회 혼란을 조성하고 국가 기관을 마비시켜 공산사령이 인류를 장악하게 만들어 한 걸음씩 훼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공산사령은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저지르고도 뜻밖에 여전히 정법(正法)을 회피하려 한다. 대법제자들의 몸에도 유사한 수단을 사용하는데, 겉보기에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구실을 사용해 속이면서 “선량, 관용, 양보”를 극단화시켜 대법제자들에게 변이된 사상을 주입해, 천칭이 사악 쪽으로 기울게 하고, 대법제자들이 정법 원칙을 포기해 사악 제거를 느슨하게 하며, 인간 세상의 법률을 정확히 운용해 악인을 제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부님과 대법이 세상에서 억울한 모욕을 당하게 했다.

4. 선량을 합당한 위치로 되돌려야

대륙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착하면 남에게 괴롭힘당하기 쉽고, 말이 착하면 사람이 올라타기 쉽다”는 말을 알고 있다. 이 문장은 현대인들이 도덕이 패괴(敗壞)한 후의 변이된 관념을 드러낸다. 선량에 대한 인식은 흔히 연약, 무능, 어리석음, 괴롭히기 쉽고, 무시당하는 것과 섞여 있다. 심지어 경멸이나 마땅히 있어야 할 적절한 존중과 보호 부족으로 나타난다. 과거 장마두(江魔頭)가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대법에 크게 손을 쓴 이유 중 하나였다. 그것 휘하의 수많은 악인·악경들도 우리의 선량한 빈틈을 탔다. “당신은 선량하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선량을 이용해 당신의 이런 선량을 공격하는데 한 명씩 쓰러뜨려도 보복당할 걱정이 없다. 사악은 곧 선량을 타격하려 하며 선량을 훼멸하려 하는데 인간 세상에서 선량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들고자 한다.

대법제자들이 진상을 알릴 때, 어떤 세인은 비꼬는 말투로 “당신들 사부님은 왜 중국에 돌아오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중공이 박해하고 있으니 사부님께서 귀국하시면 사악한 당의 박해를 받으실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는데 선의(善意)가 없는 것으로 그저 우리를 비웃을 뿐이다.

또 어떤 경찰은 청원하러 온 대법제자들에게 이렇게 질의한다.

“당신들은 선(善)과 인(忍)을 강조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또 (참지 못하고) 청원하러 오는가?”

분명히 우리가 법에 근거해 정당한 권익을 수호하고 있음에도, 마치 우리가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서 마치 중공이 정당하고 무고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가족들은 고의로 대법제자에게 마난을 만들어 대법제자가 정상적인 생활과 수련을 할 수 없게 만들고 대법제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면 “당신은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지 않는가? 당신이 이렇게 하면 선(善)하지 않은 게 아닌가? 왜 참지 못하는가?”라고 한다. 그들의 관념속에는, 선량한 사람은 괴롭힘을 당해야 하고, 마땅히 무제한으로 죄악을 용인해야 하며 죄악을 막고 제거하는 것은 마땅치 못한 것이다!

선량이 죄가 되는가? 선량한 사람들은 저급(低級)해서 마땅히 비난받고 의심당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중생은 평등한 권리가 있다. “선량하기 때문에 권리가 없다”는 그런 설은 없고 “선량한 사람에 대한 범죄는 제재당하지 않는다”는 도리는 더욱 없다! 선량은 우주 특성의 하나이자 일종의 아름다운 덕(德)이다. “하늘은 선한 사람를 돕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선량한 사람은 하늘의 상을 받고 보호를 받으며, 세상에서 존엄이 있으니 마땅히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비록 대법제자는 일에 부딪히면 자신의 원인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높은 경지이지, 우리가 정말로 인간 세상의 법률을 어겼다거나 누구에게 무엇을 빚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만약 이 일이 대법에 영향이나 손상을 끼쳤다면 당신들도 엄숙하게 속인의 법을 이용하여 해결해야 한다. 사악은 확실히 독일경찰들에게 나쁜 것들을 많이 부어 넣었는데 당시 우리에게 아주 좋지 않게 대했다. 한 민족이 대법을 대함에 있어, 사악과 정의(正義) 앞에 서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내가 장차 그들의 장래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이 지난 뒤에 마땅히 제때에 그것을 처리하여 법률에 호소했어야 했다. 당신의 국가는 민주국가로서 대통령이 죄를 범해도 법정에 기소할 수 있는데, 국민이 선출하기 때문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세간의 법률을 어긴 사람은 마땅히 제재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某) 신문과 일부 사람들이 사부님과 대법 항목에 대한 근거 없는 무함과 공격에 대해 법에 근거해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정법(正法)이란 모든 바르지 못한 요소들을 바로잡는 것으로, 이는 천리(天理)와 정의의 체현이며, 세상의 변이된 가치관을 되돌려, 인간 세상의 정도(正道)를 회복해 세상 사람들에게 광명과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선량(善良)이 올바른 자리를 되찾아야만 세상 사람들이 신심을 지니고 용기있게 선(善)을 행하며, 악(惡)을 버리고 선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