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小宇)
【정견망】
주지하다시피 《서유기》의 당승(唐僧 현장)은 역사상 확실히 존재했던 인물이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 이하 ‘자은전(慈恩傳)’으로 약칭》의 기록에 따르면 당승은 서쪽 여행을 위해 사막, 설산(雪山), 삼림을 지났고 수시로 죽음과 각종 고난에 직면해야 했다. 그의 비범한 의지력은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실제로 《서유기》의 취경(取經) 과정은 역사적으로 추적 가능한 당승 본인의 실제 경험과 많은 점이 일치하고 또 연관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들이 부동한 공간에서 부동(不同)한 층면에서 서쪽 여행으로 법을 구한 부동한 펼쳐짐이라고 말한다. 가령 《서유기》에서는 흔히 손오공을 ‘마음 원숭이[心猿]’로, 백룡마(白龍馬)는 ‘의마(意馬 의지라는 말)’로 표현되고, 또 손오공은 금(金), 팔계는 목(木)으로 묘사되는데, 합하면 성(性)이 되고 정(情)이 되니 이런 것들은 모두 한 수행인의 각기 다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현실에서든 소설에서든 당승은 모두 많은 험난한 장애물을 거치고 온갖 어려움을 돌파해 마침내 법을 구하는 서역 여행을 마치고 정과(正果)를 얻어 공성원만(功成圓滿)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고 모든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었던 강한 의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자은전》과 《서유기》에 모두 이런 대목이 있다.
《자은전》에서 당승이 사막에서 길을 잃고 물을 보충할 수 있는 야마천(野馬泉)을 찾지 못했는데, 이때 실수로 물주머니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더 걷다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원래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때 갑자기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한 서원(誓願)이 떠올랐다.
“이번에 법(法)을 구하는 서쪽 여행에서 진경(真經)을 얻지 못하면 절대 동쪽으로 한 걸음도 돌아가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계속 서쪽으로 걸어갔고 4박 5일만에 결국 기절해서 의식을 잃었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경을 외웠다. 결국 그는 기절했고 밤에 한 차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체력을 좀 회복했다. 보니 말 한 마리가 갑자기 달리며 그를 샘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말하자면 아주 신기하지만 마치 도리가 있는 것 같다.
《서유기》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제20회에서 당승 사도(師徒)들이 숙소를 찾기 위해 어느 집에 찾아가자 그 집 노인이 앞길에 황풍령(黃風嶺)에 요괴가 있어서 지나가기 어려우니 “이번에 길을 가다 도중에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반드시 저희 집으로 돌아오세요”라고 권한다.
이때 행자(行者 오공)가 말한다.
“영감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우리 출가한 사람은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법이오.”
마침내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짐을 들고 서쪽으로 떠났다.
물 없는 사막에서 길을 잃은 이런 상황에서는 원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원래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소위 “청산을 남겨 놓았거늘 땔감이 없을까 두려워하랴!” 사실 이것은 “물러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법(法)을 구하는 서쪽 여행에 대한 의지가 견정한지 닳아 없어지는지의 문제다. 수행하는 사람은 일사일념(一思一念)의 순정(純淨)을 중시하는 것으로 자신이 진심으로 내보낸 소원을 중시한다. 당승에 대해 말하자면 동쪽으로 한 걸음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결심이며 또한 신불(神佛)에 대한 그의 믿음이자 맹세였다. 그의 머리는 청성(淸醒)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았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속인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돌아갈 길”을 말하자니, 늘 고로장(高老莊)에 돌아가고 싶어 했던 저팔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취경의 길에서 팔계는 늘 안일함을 추구해 서행취경(西行取經)의 의지를 가로막았는데 이런 가로막음은 고로장에서 팔계를 도제로 거둘 때 아주 분명하게 표현된다. 행자는 그에 대해 “영성(靈性)은 아직 남아 있다”고 평가했지만 나중에 팔계가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취경인을 기다려왔다는 말을 듣자 행자는 팔계에게 스스로 요괴의 동부(洞府 운잔동)를 불태워버리게 했다. 그러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불태운 후 한마디 한다.
“이제는 아무 것도 걸릴 게 없어요.”
하지만 당승의 제자가 되어 고로장을 떠나기 전에 처가 식구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자 행자가 소리쳤다.
“멍청아, 헛소리 말아라!”
하지만 팔계는 여전히 “형님 헛소리가 아닙니다. 어쩌다 잠깐 일이 잘못되어 중도 못되고 마누라도 얻지 못하면 그때는 정말 어쩌지요?”라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퇴로를 남겨놓으려는 팔계의 이런 심태(心態)는 바로 주동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불순한 것으로 사람 층차를 벗어나려 하지 않고 미련을 남긴다. 수행인이 걸어야 할 길과는 정반대다. 다행히 마음 원숭이 오공의 조력을 받아 마침내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
오공이 팔계를 거둔 후 “성과 정이 안정되니 여러 인연이 모이고(情和性定諸緣合)”와 “성과 정이 함께 즐거워하니 정과 원이 모인다(性情並喜貞元聚)”는 두 구절의 시가 있는데, 여기서 성과 정은 오공과 팔계 둘을 지칭한다.
오공은 한 생명의 본성(本性)과 내원(來源)을 더 많이 체현하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돌 속에서 뛰쳐나온 생명이다. 어디서 왔는지 내력을 모른다는 것은 이미 그가 높은 층차에서 내려왔음을 설명한다. 사람이 소재하는 삼계(三界)의 모든 생명은 다 그의 내원을 볼 수 없다.
한편 팔계는 정(情)을 더 표현하는데 정이란 삼계에 특유한 것으로 취경단에서 팔계의 희로애락이 가장 두드러지고 또한 호오(好惡 좋고 나쁨)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당신이 취경의 길을 보면 절대다수는 오공이 주도하고 오공의 인도하에 팔계 역시 그의 역할을 발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취경의 길이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완전히 개체의 관점으로 돌아가면 여기서 바로 속인과 수행인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정(情)이 주도하는가 아니면 본성(本性)이 주도하는가?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 많게는 일종 편안하고 안일함인데 때문에 늘 팔계에 대해 공감하고 인정하지만, 사실 당신이 어떻게 느끼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며 더욱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력을 알 수 없는” 오공만이 진정한 자기이자 본성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늘 자신을 단속하고 정(情)에서 파생된 각종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자신의 주인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만 자신이 되어야만 당신 최초의 내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것은 높은 층차로 “천국세계”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천국세계”를 사람의 말로 하자면 곧 “자기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것이다.
수행인이 절대 ‘돌아가는 길’을 걷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삼계에 들어온 후 더럽혀진 것, 자신의 본원에 속하지 않는 것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이는 사실 “원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지금 시대에 수련과 수행은 더는 예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출가해서 사찰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거나 도사가 되어 세속과 단절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아울러 당신이 생각만 있다면 당신의, 계급, 재산, 성격, 외모 등과는 상관이 없다. 오직 당신이 내심으로 수련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기연(機緣 기회와 인연)이 있다. 말하자면 바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전파되고 있는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있다.
2023년 새해를 맞아 파룬따파를 창시한 리(李) 선생님은 공개적으로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경문을 발표해 생명의 내원과 인류의 의미를 명확하고 깊이 있게 밝혀주셨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주위 친지들에게 이 글을 전달해 읽게 했는데 이는 마치 1992년 대법이 처음 전해질 때 아무런 선전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수련하려 했고 이때부터 수련의 길에 들어선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의 내심 깊은 곳에 모두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데, 진흙에 묻힌 진아 본성이 서서히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3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