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7.20 이전. 병(病)으로 대법 수련에 입문한 일부 동수들이 정법(正法) 수련이 오늘까지 이르렀음에도 과거 병의 증상이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그리 큰 마난(魔難)을 조성하진 않지만, 병 증상이 시종 철저히 없어지지 않았다.
최근에 나는 이런 상태에 있는 대법제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 대부분이 개인 수련 경지에 머물러 있고 정법 수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또는 구우주의 근본 속성인 사(私)를 줄곧 전변(轉變)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의 동수들은 잠재의식 중에 한가지 관념이 존재하는데, 바로 이렇게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부정확한 상태는, 수시로 수련 중에서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해서, 나태하거나 느슨해지지 않게 하고, 너무 안일하지 않도록 일깨워준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늘 이런 부정확(不正確)한 상태를 방임하거나 심지어 어쩔 수 없다고 느낀다. 오늘날 정법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위에서 말한 이런 관념은 구우주 생명 사상 관념의 체현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일정일부(一正一負)는 구(舊) 우주의 일체를 평형 시키고 있다.”(《2010년 뉴욕법회설법》)
“우주 중에는 허다한 더욱 높은 최후의 생명이 아직도 있으며, 비록 구세력의 요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것 역시 구(舊) 생명이며, 그것도 그것이 변이된 후의 관념을 품고 있다. 대법제자들에 대하여 그것은 과거 우주의 선천적인 부족함과 변이된 특성을 안고 그 일체를 수호하고 있다. 대법제자에 대하여 그것들은 이런 박해가 그들을 수련시킬 수 있다고 여겼으며, 그것들의 관념은 저애 작용을 일으켰다. 또한, 그것들은 표면 세간과 각계의 간격을 조성하였으며, 또 세인들의 법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였다. 그것들은 이런 상태에서 걸어나가야만 비로소 되며, 하계(下界)의 중생과 세인들은 이런 정황에서 태도 표시를 해야만 비로소 남겨질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상태에서의 선택은 이 생명이 대단함을 표현해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정법의 상태가 이를 필요로 하는지 않는지를 인식하지 못했고, 가장 관건적인 것은 미래의 우주가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정법 중에서는 또 이런 부면(負) 적이고 반대(反)의 요소를 승인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기에 한 생명의 정법에 대한 태도야말로 비로소 지극히 관건 적이며, 중요한 것으로, 그중에는 이른바 정법을 좌우지 한다는 최후 최고의 이런 생명을 포함한다.”(《2005년 캐나다법회설법》)
그렇다면 우리가 구우주에서 층층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구우주 부동한 층차의 생명과 약정(約定)과 서약(誓約)을 맺지 않았겠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그 당시 삼계로 내려올 때, 십악독세(十惡毒世)로 내려갈 때, 붉은 먼지에 미혹되지 않고 훼멸당하지 않기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역사상 모종(某種)의 것을 이용해, 때가 되면 모종의 인연과 모종의 방식으로 수시로 우리를 경고하고 일깨우기로 배치했을 수 있다. 구(舊) 법리 속에서 구우주 생명의 가장 큰 지혜는 바로 이런 일정일부(一正一負)의 이치를 사용해 균형 잡는 것으로, 보다 큰 지혜는 있을 수 없으며, 아울러 부적(負的)인 요소에 의존해 단속하는 이런 종류의 방식을 다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구우주의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우주에 법이 있음을 몰랐고 과거에는 생명이 이를 아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부님께서는 우주의 근본 대법을 널리 전하시고, 우주 최고 특성을 드러내셨기에, 신우주(新宇宙)의 균형은 생명이 법에 동화된 후 대법 지혜를 드러내는 것으로, 구우주 생명이 이해하는 범위를 완전히 초월한 것이다. 때문에 대법제자들은 정법 중에서 신우주 표준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역사상의 서약과 약정을 부정하고 배척해야 한다. 우주에서 아무리 높은 신(神)들이라도 모두 정법(正法)이란 이 일을 마주해야 한다. 만약 그러한 구우주 생명들이 그것들이 배치한 그 일체를 내려놓지 못하고, 오늘날 정법 중에서 일단 정법에 대해 부면(負面) 작용을 일으키기만 하면, 누가 참여했든, 누가 배치했든, 누가 조종했든, 누가 이용했든, 누구의 요소가 작용을 일으켰든 모두 역사적인 책임을 감당하고 도태될 위험에 직면한다.
사부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표면의 신체를 전화(轉化)시켜 수련이 잘된 부분과 협조하게 하여 신체로 하여금 수련 중에서 사람의 상태를 벗어나게 하고, 수련 제자로 하여금 자신의 정념을 사용하여 사람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하려고 했다. 바로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그것들과 1년이라는 시간을 맞섰다. 그때 나는 바로 이 일로 인해 나와서 전하지 않았으며 1년의 세월을 맞섰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들이 견지하는 것을 승인할 수 없고 장래에도 나는 절대 승인할 수 없는데,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과 관련된 일체 생명은 모두 이 때문에 장차 빚을 갚는 중에 해체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설령 역사를 되돌려 다시 시작한다 해도 나의 일을 완성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법 중에 필수적인 내용과 과정이며 이것은 법정인간(法正人間)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개인적으로 “정법 중에 필수적인 내용과 과정”은 대법제자들이 세간(世間)에서 실증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떻게 구세력의 아득히 먼 배치를 부정하고, 어떻게 정법에 대해 부면 작용을 일으킨 이런 구세력의 교란 요소를 해체하는 동시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그런 중생을 구도할 것인가 하는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으로 우리가 세간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또 《휴스턴 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개별적인 사람은 당신의 수련에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아마 아직도 당신에게 좀 소업(消業)해야 할 것과 병이 있는 감각을 남겨둘 수 있다. 왜 좀 남겨두는가? 왜냐하면 어떤 수련인은 오성을 제고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만약 한 사람의 표면신체에 모두 병이 없을 때면 바로 초상적인 것으로서 소업하는 감각마저 다 없다면 그것은 수련이 아니다. 그럼 물론 믿게 되는데 이래도 아직 믿지 않겠는가? 끝까지 믿을 것이다. 때문에 어떤 개별적인 사람은 정황에 따라 수련에 쓸 고만한 일부 요소를 남겨둘 필요가 있는데 당신이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본다. 목적은 수련인으로 하여금 깨달음으로써 걸어 나오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아닌가?”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일부 대법제자들은 내가 보기에 오성(悟性)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관념을 전변해, 속인의 사유 방식을 닦아버려야 한다. 이를 통해 현대 실증과학의 관념, 무신론 관념 속에서 걸어 나오고 생명의 영성(靈性), 생명의 존재 형식과 표현 형식 등의 방면에 대해 마땅히 더 깊은 이해와 인식을 가져야 한다.
개인의 작은 깨달음이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