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원(淳源)
【정견망】
2025년 션윈 월드 투어가 수련 중의 사람에게 다시 한번 법광(法光)에 잠기는 행운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무용극 《정각(正覺)》은 내함이 아주 크고 넓어서 보고 난 후 깊은 충격과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이 무용극의 주인공은 성공한 장군이지만, 주위에 시체가 널려 있는 가운데 자신의 성공 뒤에는 무수한 생명의 죽음과 고통이 있었음을 깨닫고, 생명 본성 중의 선량(善良)이 그의 양심을 괴롭게 했고 심지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든다. 이 장면은 인간 세상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 평생 아귀다툼만 일삼다 결국 무수한 업(業)을 짓는데 이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생임을 보여준다.
이때 한 불가(佛家)의 사부가 그를 사찰로 인도해 불법(佛法)을 수련하게 했다. 또한 다른 세 승려와 함께 7일 동안 가부좌하고 선정에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가부좌 과정에서 먼저 다른 세 승려가 찾아와 교란했다. 그들은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그들 네 사람이 입정(入定)하지 못하게 했지만, 다행히 이들 네 사람 모두 흔들리지 않았다. 이 장면은 사찰에 출가한 승려들이 다 수련하려고 온 것이 아니며 또 문제를 일으키러 온 사람도 있음을 보여준다. 마왕(魔王)이 정법(正法)을 파괴하는 수단은 변화무쌍한데, 그중에는 마자(魔子) 마손(魔孫)들이 전생해서 사찰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 가장 사악하고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부좌 중의 네 승려는 오직 사부가 시킨 대로 자신의 수련 과제를 잘하기만 하면 이런 교란을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 이치로 대법을 수련하는 대오(隊伍) 속에도 모두 수련하러 온 것이 아니며, 수련인은 오직 법(法)을 스승으로 삼고 견정하게 법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따라 자신의 심성을 지켜야만, 가짜 동문(同門)의 교란을 받아 자기 수련의 길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이어서 네 승려를 고험(考驗)하러 온 이는 불감(佛龕) 위에 있던 보살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온화한 여인으로 변신해 보시 공덕(功德)을 쌓기 위해 승혜(僧鞋 승려들의 신발)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첫 번째 승려는 여인을 보자마자 확실히 색욕심(色慾心)이 먼저 움직였고 고험 앞에서 아주 쉽게 패배했다. 그는 여인에게 자신에게 신발을 신기도록 수줍게 응답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승려에게 새 신발이 아주 편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두 번째 승려도 저항하지 못하는데, 아마 또 호기심에 이끌려 그 여인의 신발을 받는다. 세 번째 승려는 도반들의 행동을 보고 속으로 줄곧 배척하려 했지만, 두 동문의 열정적인 설득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고, 동수 정(情)에 미혹되어 결국 사부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자발적으로 신을 신는다. 오직 장군 출신의 승려만이 시종 흔들리지 않았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가부좌 입정에 집중했다. 그는 유일하게 심성(心性)을 굳게 지켜, 무사히 관(關)을 넘긴 수련인이 되었다.
‘신발 신음[穿鞋]’은 ‘사를 전파[傳邪]’하는 것과 발음이 같다. 대법 수련인들은 20여 년의 법난에서, 초기 노교소의 각종 왜곡된 이치와 삿된 설에서부터, 다년간 대륙에서 끊임없이 난무한 각종 가짜 경문을 겪었고, 오늘날 또 해외로 전해져 수련인들의 환경속에서 션윈을 공격하고 각종 정법(正法) 항목을 공격하는 각종 유언비어에 이르기까지, 사실 아무리 변해도 늘 ‘사를 전파하는’ 고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邪)’라는 글자는 이(牙)와 귀(耳)로 구성되는데, 도처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 정법 수련과 중생 구도에 불리한 온갖 소문을 전파하는데, 이런 것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이면 즉시 사에 적중[中了邪 역주: 여기서 中은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라 적중되거나 중독된다는 뜻]되는데,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깊이 이해할 수 있다시피, 사에 적중된 사람은 즉시 완전히 딴 사람이 되는데, 입, 얼굴, 표정, 말투, 심태가 전부 다 변해서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들조차 깜짝 놀라게 만든다.
전통문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요해(了解)하고 명백히 알다시피, 사(邪)를 전파하고 사를 믿으면 그 즉시 사악한 힘의 부체(賦體)를 초래할 수 있다. 신체와 사상이 흑화(黑化)되는 것은 단지 한순간이다. 노교소에서 전화(轉化 사상전향)하거나 전화당한 과정을 거친 사람은 믿을 수 있겠지만, ‘사를 전파하는’ 거대한 살상력은 절대로 평생토록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 법난(法難)의 중심인 해외 대법 수련인들 중에서 몇이나 이 관(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당시 노교소에서 사(邪)를 믿고 사를 전하며, 배반했던 많은 대법 수련인들이 해외로 나왔다. 비록 사부님의 자비는 무한해서 그들에게 엄정성명을 쓰면 다시 수련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셨지만 구세력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난(難)을 크게 만들어 관을 넘게 한다.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이 당시 자신이 사부님을 배반한 근원을 진정으로 찾지 않았다. 도대체 구하려는 마음으로 수련에 걸어들어와 만족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신(神)을 믿지 않아 생긴 두려운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교활하게 군중심리를 따른 것인지, 이도 아니면 견정하게 수련하는 사람에 대한 질투심 때문인지 등등.
이런 사람 마음은 해외로 나왔다고 해서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이런 사람들이 ‘사를 전하는[傳邪]’의 주력이 되어 내부에서 수련환경을 파괴하고 정법 항목을 공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무용극에서 신발을 신은 세 승려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관을 넘는 과정에 수련을 포기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비록 아직 수련인의 옷을 입고는 있지만 사실 보통의 속인과 별 차이가 없는데, 사악한 힘에 이용이 끝난 후에는 자신이 억만 년간 기다려왔던 정법 수련의 기연을 잃게 될 것이다.
무용극에서 승려들에게 “신발을 신겨준”[穿鞋] 사람은 보살의 화신이고, 《전법륜》에서 색욕심을 고험한 이는 노자와 아미타불이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수련인의 도심(道心)이 순정하고 견정한지 여부는 반드시 고험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를 전하는[傳邪]” 미혹성은 결코 쉽게 이해하거나 돌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사람 마음이든 모두, 마치 노교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충분히 폭로되고 이용될 수 있다. 왜 이런 고험을 당하는 사람은 남의 수련에 관심을 갖고, 남의 행동에 이끌리며, 왜 동수를 비방하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흥분하는가? 왜 마음속으로 동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길 기대하는가? 이런 심태는 진선인(真善忍) 표준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
무용극에서 오직 진심으로 생명의 진상을 찾고 목숨을 바쳐 진리를 실천한 장군만이 ‘사를 전파하는[傳邪]’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이어서 그는 또 보살이 배치한 가족 정, 명예, 이익, 생사의 고험까지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부처님의 가지(加持)를 받아 자신의 층층 공간의 불체(佛體)와 불위(佛位)를 닦아내 최종적으로 천녀(天女)의 영접과 선악(仙樂 선계의 음악)이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날아올라 떠나간다. 아울러 각종 부동(不同)한 마음 때문에 ‘사를 전파한’ 승려들은 단지 인간 세상에 남아 하늘을 바라보면서 탄식만 할 뿐이다.
2025년은 이토록 특별한 한해인바, 사부님께서 지금 시각에 무용극 《정각》을 수련인들에게 드러내신 것은, 내가 깨닫기에 우리 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보고, 수련이란 이 단체에서 대체 어느 정황에 속하는지 보게 하신 것이다. 사실 사부님의 자비는 무한해서, 사부님께는 마(魔)조차도 구도할 방법이 있는 생명이고, 교란을 일으킨 세 승려 역시 당연히 진수(真修)할 기연(機緣)이 있고, 보살이 ‘사를 전파하는’ 방법으로 승려들을 고험한 것도 본래 의도는 그들을 성취시키기 위함이다. 진수자에 대한 고험은 반드시 전방위(全方位)적이며 어느 한 관(關)이 부족해도 안 된다. 일곱 명의 승려 중에 최종적으로 원만한 것은 오직 한 사람인데, 부처님이 사람을 제도해 원만 시킬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사람 마음을 버리지 못한 승려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정각》을 본 동수들이 진심으로 선심(善心)으로 매 한 동수를 축복해서 모두 정법 중에서 가장 좋은 수련 기회를 얻고 자신을 성취해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위 내용은 션윈 무용극 《정각》을 보고 난 후 개인적으로 느낀 작은 깨달음에 불과하며, 무용극에는 더욱 심오한 내함(內涵)이 있어서 수련인을 개발하고, 인류 미래에 장차 발생할 일 배후의 진상을 드러낼 수 있다. 단지 교류 목적으로 쓴 것이니, 부당한 부분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