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신(墨宸)
【정견망】
다년간의 수련으로 속인의 고락(苦樂 고생과 낙)을 보면 모두 너무 얕아서 실질을 돌파하고 한순간에 깨닫고 나면 그저 그럴 뿐이다. 이에 늘 감사와 칭찬의 말을 듣는다.
어저께 처남의 장인 장모를 방문했다가 헤어지는데 노인이 진심을 담아 처남에게 말했다.
“자네 자형(姊兄 누님의 남편)의 말은 정말 좋아, 마음에 쏙 들고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 두 분을 뵈러 오면 집에 들어서자마자 지난번에 제가 무엇을 써드렸는데 라고 할 겁니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어느 층차에까지 수련되었는지에 관계치 않고, 당신 층차 이하는 당신에게는 모두 미혹이 없으며, 일체가 다 눈 아래에 있는바, 이 모든 진상을 볼 수 있다.”(《스위스 법회 설법》)
“사실 당신들이 알다시피 석가모니 부처이든 다른 신불(神佛)이든 그들은 소나 말의 사상마저 알 뿐만 아니라, 더욱 낮은 생명의 사상도 알며 일체를 다 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 들어가지는 않고 무엇이든 알 뿐이며, 단지 이에 불과하다.”(《각지 설법 2》〈2003년 캐나다 밴쿠버 법회 설법〉)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으니 세속을 떠나려는 마음으로, 법안(法眼)으로 세상을 보고 매사에 육안의 장애를 받지 말아야 하는데, 속인의 심사(心思)를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가져야 할 능력이다.
우리는 다년간 대법 속에서 수련해 왔고, 생명의 내원 또는 특징이 더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 그럼 ‘백아’를 만나면 ‘종자기’ 역할을 한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람은 집단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해하고 이해받지 못하면 외롭고 적막함을 느낀다. 설사 번화한 도시에 산다 해도 고독감을 느끼며 사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이 무형의 유감(遺憾)은 거의 모든 사람 마음 속에 많든 적든, 수시로 존재하거나 심지어 평생 떨쳐낼 수 없다. 이에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는 욕망(특히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사회적으로 ‘이해 만세[理解萬歲 역주: 사회적으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자는 구호로 80년대 북경 대학생들이 처음 제창한 후 중국에서 널리 확산됨]를 외쳤는데 이는 사람의 본성이다.
때문에 우리는 “효과적인 의사 소통”에 대해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속인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일을 하면서, 특히 경력이 있고 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모두 효과적인 의사 소통을 대단히 중시한다. 본인뿐만 아니라 사람을 선발하고 채용할 때도, 특히 관리직에서 ‘팀 정신’과 ‘의사소통 능력’이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 사이의 “비효율적인 소통”이 오늘날에는 일상적인 상태가 되었고 아울러 없는 곳이 없다. 때문에 상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종종 반복적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표현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소위 “소통”이란 고문이든 백화문이든 공자가 한 말과 같다.
“말이란 뜻이 통하기만 하면 충분하다(辭,達而已矣.)”
즉, 말하는 사람이 명확하고 듣는 사람이 똑똑히 알아들으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사족에 불과하다. 속담에도 “어떤 사람을 보면 어떤 말을 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의 상태에 따라 하는 말이 정해진다는 뜻이다. 고대 속담에 “말이란 흥이 올라오면 그치고, 술이란 흥이 오를 때면 족하다”는 말이 있다. 즉 적당히 분수를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소위 “분수”란 즉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 표현이 적당하고 적당히 억제해야 한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는 또한 매 사람에게 있어 평생의 수행이다.
듣는 사람은 아무런 선입견이나 관념을 갖지 않고 조용히 듣고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삼계(三界) 속에서 육신의 제한 때문에 누구나 진정으로 100%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상대방을 알 수 있겠는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일부 정보를 간과하거나 이해에 편차가 생길 수 있다. 소위 내 몸처럼 똑같이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속세에 태어날 때 사람마다 다 고독한 개체이기에 남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기대한다. 기왕 내 몸이 남의 몸이 아니라면 더욱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며 오직 “선량(善)”해야만 남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하는 과정에서 또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마음에 기복이 있어서 평온하기 어렵거나 논쟁이 끊이지 않거나, 칼을 뽑아 들고 화가 잔뜩 났을 때, 심지어 말이 입까지 나왔어도 참을 수 있거나 또는 잠시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자신과 타인을 위해 보다 광활한 사유의 공간을 열 수 있다.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강렬한 감정을 지닌 말투는 어느 정도 사악한 당 문화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할 때 감정이 담담해지며, 생활 속에서도 침묵을 많이 하면 마음을 움직이거나 감정을 움직일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 정(情)이 담담할수록 말수도 더 줄어든다.
말이란 마음의 소리[心聲]다. 모든 대화의 기교는 다 말하는 사람의 내심과 신분 및 듣는 사람의 각종 요소가 일치해야 하는데 “서로 어울리고”, “적절해야” 한다. 진실한 감정, 진실한 말을 하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 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앵무새처럼 무조건 모방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일부 업종의 ‘전문 용어’나 ‘말투’를 알고 나서 늘 그 기술을 인정하면서도 반감을 느낀다. 유창하게 “토크” 쇼를 하는 사람을 보면 늘 인위적인 꾸밈의 흔적을 보게 된다.
수련에서도 중점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성(心性)의 전변(轉變)과 수련에 있다. 수련자에게 있어 사(私)의 기점에 서면, 자신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이 얼마나 남을 수 있겠는가? 이는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경지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해받지 못하고 절망적인 고독은 진수자(真修者)가 수련하는 길에서 거쳐야 할 관문일 뿐만 아니라 고생스런 수련의 필연이기도 하다. 이렇게 깨닫고 나니 원망과 슬픔이 줄어들고 정에서 점차 멀어진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8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