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
【정견망】
세간 속세의 일은 사람을 한순간도 평화롭지 못하게 방해하며 고통스럽게 만든다.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교란하는 것은 외부 세계인가, 아니면 우리의 내심(內心)이 본래 편안하지 못한 걸까? 당조(唐朝) 시인 노조(盧肇)가 살던 시대는 당파 싸움이 심했던 시대였다. 시인은 본래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총애를 받는 제자였지만, 오히려 당파 싸움에 관여하거나 참여하지 않고 이익을 담담히 보았다. 이는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누가 목동의 마음처럼
소 등에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는가
때로 오가며 한 곡 부르면
어찌 남북에 지음이 없음을 근심하랴
誰人得似牧童心
牛上橫眠秋聽深
時複往來吹一曲
何愁南北不知音
이 시는 노조의 시 《목동(牧童)》이다. 이 시가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시인이 목동을 썼지만 사실 사람 마음을 쓴 것이다. 즉 사람은 마땅히 목동처럼 소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목동의 마음처럼
소 등에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는가”
누가 목동과 같은 심경으로 소 등에서 자면서 가을이 오는 줄도 모를 수 있는가. 이런 경지는 사실 사람이 번뇌를 잊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혹은 명예를 위해, 혹은 이익을 위해, 혹은 정(情)을 위해 산다. 늘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람이 속세에 살면서 어떻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이는 사실 시인이 자신에 대한 요구이자 자문이다.
“때로 오가며 한 곡 부르면
어찌 남북에 지음이 없음을 근심하랴”
번뇌 속에서 그래도 한 곡을 연주하면 자신을 도야(陶冶)할 수 있다. 또한 하필 남북에 지음(知音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없음을 근심할 필요가 있는가? 목동이 피리를 분 것은 지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기기 위함이다. 아울러 남에게 잘보이려는 마음이 없다. 이렇게 마음가는 대로 자유롭게 생활하면 자연히 자유롭고 즐겁기 마련이다.
인생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 마음에 구함이 없으면 자연히 행복해진다.
사람들은 흔히 “작은 은자는 들판에 숨고, 중간 은자는 시장에 숨으며, 큰 은자는 조정에 숨는다”고 말한다. 시인은 비록 조정에서 살았지만 오히려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며 외부 세계 이익에 교란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시인은 “목동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