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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真修)하고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우리 대법 제자들에게 ‘안으로 찾는’ 법보(法寶)를 주셨다. 내가 안으로 찾을 때, 수많은 오묘(奧妙)와 많은 집착을 발견했고, 마침내 아주 깊이 숨겨진 하나의 집착심을 발견했다.

안으로 찾는다고 말은 하지만, 아주 많은 때 나는 망각하는데, 흔히 사부님의 자비하신 점화였다. 특히 포륜(抱輪)할 때 수시로 사부님의 점오(點悟)를 깨닫는다. 동시에 또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와 사람을 구하는 마음 씀이 진실로 고달프신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묘함을 말하자면, 정말 아주 현묘하다. 동수의 몸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마치 내 몸에 맞춤 제작된 것과 같다. 당신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데, 좋지 않다고 여겨서, 안을 들여다보면 전부 다 당신 자신의 집착이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상태였다.

수련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수련하는가?

오늘 제7강을 공부하는데 ‘일파조(一把抓)’를 배울 때 이런 한 층의 법리를 보았다.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왼손에는 항마극(降魔戟)을 들고 뇌 가공 공장 중에서 각종 관념을 붙잡아 하나의 집착심을 움켜쥐고, 오른손에는 정곤유리검(淨坤琉璃劍)을 들고 각종 관념 중에서 그것을 벗겨내 제거한다. 이것은 집착이지 진아(真我)가 아니니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마치 포정(庖丁)이 소를 해부하는 것처럼 뼈와 살을 분리한 후 정념(正念)을 발해 그것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이 과정이 바로 마음을 닦고 욕망을 잘라내고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한두 번의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수련자가 여러 차례 반복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마치 일파조 과정과 같다. 하나의 집착심이나 하나의 사념(私念)을 발견했을 때 당신이 먼저 그것을 고정시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런 다음 모든 염두 중에서 그것을 분리해 잘라내야 한다. 오직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야만 그것을 제거할 수 있고, 그런 다음 정념을 발하여 그것을 소멸할 수 있다.

나는 많은 동수들이 안으로 찾고 찾아 한 무더기 집착심을 찾아내지만 그것들을 모두 그곳에 내려놓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소멸하는 절차가 없다면 결과적으로 집착심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닦음이다!! 또한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정진요지》 〈무루〉)

“동작은 원만의 일종 형식으로서,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쇠뿔 끝을 파고들지 말고 心性(씬씽)에 더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정진요지》 〈금강〉)

“당신이 만약 당신 자신을 제고하려면 당신은 안에서 찾아야 하며, 당신의 이 마음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전법륜》)

“많은 사람이 공이 자라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어떻게 연마(練)하는지를 중시할 뿐 어떻게 닦는지는 중시하지 않는데, 사실 공은 완전히 心性(씬씽)을 닦아서 수련해 내는 것이다.”(《전법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성(心性)에 공력을 들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심성이 한 사람의 층차와 과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심성이 조금이라도 제고되면 법을 배울 때 보게 되는 법리(法理)도 비로소 새로운 층이 된다. 심성이 제고되지 않으면 설사 몸에 한 세트의 기제가 있다 해도 원래 층차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성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心性(씬씽)이란 무엇인가? 心性(씬씽)은 德(더)[德(더)는 일종 물질이다]를 포괄하고, 참음(忍)을 포괄하며, 깨달음(悟)을 포괄하고, 버림(捨)을 포괄하는데, 속인 중의 각종 욕망과 각종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며, 또한 고생을 겪을 수 있어야 하는 등등 여러 방면의 것을 포괄한다. 사람의 心性(씬씽)이 여러 방면에서 모두 제고되어야만 당신은 비로소 진정으로 제고되어 올라올 수 있는데, 이는 공력(功力)이 제고되는 관건적인 원인 중 하나다.”(《전법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 법은 부동한 층차가 있으므로 법에 대한 수련자의 인식도 자신이 이 한 층까지 수련된 인식이며, 매 수련자의 법에 대한 이해가 부동함도 매 사람이 있는 층차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정진요지》 〈무루〉)

나는 자신에게 “너는 수련에서 승화했는가? 아직도 모순이 닥쳐야 겨우 인식하고 비로소 안으로 찾는데 머물러 있는가?”라고 묻는다.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따라가려면, 내가 보기에 여전히 평소 버릴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사상 중에서 당신이 아주 좋아하는 것, 아주 고집하는 것, 아주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하루에도 여러 번 배척하고 여러 번 부인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하루에 아홉 번, 열 번 이런 나쁜 것들을 배척하고 부인할 수 있다면, 그럼 당신이 아홉 번, 열 번 수련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시시각각 心性(씬씽) 수련하나니 원만은 묘하기 무궁하여라”(《홍음》 〈진수〉)

그러므로 모순이 올 때까지 기다려 수련해선 안 된다.

사실, 우리 주변의 환경은 직장이든, 가정이든, 사회든, 매 한 사람과 매 하나의 일은 모두 우리의 한 가지 마음과 대응한다.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곰곰이 연구해 보고 또 한번 생각해 보라. 정말로 “상유심생(相有心生)”이다.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반드시 공(空)하고, 반드시 무(無)일 것이다. 당신의 그 마음을 반영하는 일은 보증하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뉴스를 봤는데, 늘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그것의 알고리즘도 이와 같다. 당신이 무엇을 보면 곧 당신에게 그것을 보여준다. 당신이 한 번 보면 당신에게 세 번 보여준다. 당신의 취향에 따라 고치 속에 당신을 가둘 것이며 최후에 그것이 당신을 포위해서 당신이 그 껍질에서 뛰쳐나오기 힘들게 할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는 옳지 않다! 이것은 내게 쟁투심(爭鬪心)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전쟁, 전쟁이라, 쟁투가 없다면 무슨 전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세상, 사람의 껍질은 바로 “병사로 천하를 다툼”(《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이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쟁투심이 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업을 없애려는 것이다. 이 방면의 보도가 나타나면 나는 곧 배척하고 승인하지 않고 자신의 쟁투심을 버렸다. 이렇게 몇 차례 하고 나서 사람의 껍질에서 뛰쳐나왔다. 쟁투심을 버린 후로는 다시 뉴스를 봐도 이 방면의 보도를 보지 못했다. 아울러 이런 버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일념(一思一念)을 관통하는 것으로 당신의 법 공부, 연공, 발정념, 진상 알림까지 포함한다.

수련은 정말로 아주 간고(艱苦)하고 엄숙한 것으로 마치 고인(古人)이 말했듯이 “살얼음판을 걷고 깊은 못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지금 나는 확실히 이렇게 느끼고 감수한다. 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특징이 있고 매 사람마다 자신의 특성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방면에 장점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저 방면에 장점이 있다. 자신의 상황에 근거해 자신의 길을 걷는 이것은 모두 정상적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가급적 빨리 성숙해져야 하는데 이는 바로 정법(正法)의 요구이자 또한 사부님의 바람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