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월(新月)
【정견망】
《서유기》를 볼 때, 우리는 흔히 오공(悟空)의 입장에 서서 당승(唐僧 현장)이 눈이 멀어서 좋은 사람(오공)을 탓한다면서 비난한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매 하나의 인물은 어쩌면 모두 현실 속 누군가의 축소판일지 모른다. 내가 비난할 때, 사실 자신을 수호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그런 사람 관념을 수호하는 것이다.
당승의 문제는 확실히 그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는 당승이 다른 공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선 《서유기》 제27회 원문을 읽어보자
〖삼장(三藏)이 (팔계의) 이런 말을 듣자마자 불행한 기운이 덮쳐왔다. 과연 그 멍텅구리의 추측을 믿어버리고 손가락으로 결을 맺어 주문을 외웠던 것이다.
행자(行者)가 소리쳤다.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머리 아파! 제발 그만 외세요 그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좋은 말로 하세요.”
당승이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이냐! 출가인은 늘 방편을 쓰더라도 선심(善心)을 떠날 수 없고 땅을 쓸더라도 개미 목숨을 해치지 않기를 생각해야 하며 나방이 호롱불에 뛰어드는 것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움직일 때마다 나쁜 짓을 하느냐. 이렇게 아무런 이유 없이 평범한 사람을 때려죽인다면 경(經)을 구한들 어디에 쓴단 말이냐? 너는 돌아가거라!”〗
당승은 주견(主見)이 없어서 팔계의 도발에 넘어가 긴고주(緊箍咒)를 사용해 오공을 제재했다. 이것이야말로 당승의 가장 큰 문제다. 그가 만약 좀 더 이지적이고 청성할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팔계의 문제는 바로 색심(色心)이다. 그는 또한 기어코 문제를 도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고한 사람도 해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의 마성은 곧 악(惡)으로서, 살생하고, 훔치고 빼앗고, 이기적이고, 사념(邪念)적이며, 시비를 걸고, 선동하며 요언을 날조하고, 질투하고, 악독하며, 발광하고, 게으르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등등으로 표현된다.”(《정진요지》 〈불성과 마성〉)
팔계의 질투와 시비를 도발하고 게으른 것은 모두 마땅히 제거해야 할 사람 마음이다.
사승(沙僧 오정) 또한 주견이 없다. 비록 자신의 지위가 낮더라도 무언가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자신의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오공의 문제 역시 아주 엄중한데 여기에는 과시심의 성분이 있다. 그는 당승에게 자신이 가장 대단하고 내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알리고 싶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속인의 표면적인 것을 중요시한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집착이고 당신의 사람 마음이다. 이러한 것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당신이 본 부족한 점을 당신이 묵묵히 잘 완성해 나가고, 묵묵히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잘 하며, 당신이 그 한 가지 일 중 완전하지 못한 부분을 스스로 묵묵히 잘 한다면, 뭇 신들은 크게 탄복할 것이며, 이 사람은 너무나 대단하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법제자가 해야 하는 것이다.”(《각지 설법 10》 〈더 정진하자〉)
만약 오공에게 과시심이 없었다면 백골정이 요괴임을 발견한 후 당승이 보지 않는 곳에서 청리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당승이 보는 앞에서 죽이려 했는가? 당승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진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또 이렇게 했는가? 본래 과시심이란 대단히 두려운 것이다.
우리도 마땅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는가? 왜 이렇게 심하게 불평하는가? 이는 어떤 마음인가?
문제가 생기면 각자 마땅히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서유기》는 수련 이야기이지 수련의 표준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있다. 세간의 그 어떤 일에 대해서든 늘 정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청성하고 이지적으로 문제를 보는 것만이 수련인의 태도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