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현대 병원에서 병 치료를 말하다

대만 고웅(高雄)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우리 지역 교육병원에서 근무하는 내과 의사다. 평소 나의 수련 환경은 병원과 집이다. 다년간 수련을 통해 의학과 과학에 대한 적지 않은 심득(心得)이 생겨 개인의 인식을 나누고자 한다. 사부님의 원 말씀에서 발췌한 내용은 단지 현 단계에서 이들 법리에 대한 자신의 제한적인 이해에 불과할 뿐, 이 단락의 법을 설명하거나 정의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하길 바란다. 대법에는 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더 깊고, 더 높고, 더 광활한 인식이 많이 있다. 교류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동수들의 지적과 시정을 바란다.

평소 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업(病業)의 표현을 관찰하는 사례가 비교적 많다. 개인적인 인식으로, 현재 양방의 병 치료 방식은, 비유해서 표현하자면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육안통(肉眼通)”의 가장 낮은 층차다. 비록 가장 낮은 층차의 수단임에도 양의사들은 여전히 환자를 치료할 때 가져온 일부 직업적인 피해와 치료할 때 직면하는 생사에 대한 심리적 압력이란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병을 치료할 때 환자에게 나타나는 합병증은 질병이 변화해서 왔든, 약물 치료로 인한 것이든, 모두 환자의 병업(病業)이 외부에서 다른 배출구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업력을 감당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인데 다른 공간에서 그 업력의 채권자가 그렇게 해야만 인정한다.

물론 무신론과 진화론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일부 합병증은 또한 의료 분쟁의 도화선이 된다. 왜냐하면 일부 현대인들은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맹신하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반드시 책임을 추궁하려 하기 때문이다. 의사와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아서 의사와 환자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 이는 말후(末後)에 흔히 나타나는 상황이다.

내 기억에 경험 많은 선배 의사가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분명히 문헌에 기반한 표준적인 치료법을 사용했음에도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부 합병증은 사실상 그 환자를 이런 방식으로 더 이상 치료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그 후과(後果)를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임상에서 일부 환자들의 상태는 의사들조차 다루기를 꺼린다. 현재 내 인식으로는 반영된 업이 너무 커서 현재 병원의 치료 능력을 뛰어넘는 범주에 속한다. 사실, 내 생각에 더 깊은 의미는 사람들에게 인과를 존중하고 업을 적게 짓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동시에 의사들에게 기술적인 수법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도 있다. 왜냐하면 우주 법리가 모든 것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간담 소화기 내과의사로, 병원에 진찰받으러 오는 환자들에게 소화기 내시경 검사를 자주 시행한다. 이 ‘내시(內視)’경(鏡) 관찰은 나름 의미가 있다. 중의학에서는 입이나 코처럼 외부와 접촉하거나 배설에 사용되는 신체 부위를 ‘규(竅)’라 한다. 소화기 내시경 검사에서 우리는 소화관 주변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바로 혈관이다. 우리가 미시적으로 혈관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미시적인 곳으로 들어가 관찰하는 것이 아닌가? 현재 양방에는 혈관 표면을 명확히 볼 수 있는 장비가 없다. 그저 혈관이 어느 정도 협착되었는지 감지할 수 있는 혈관 조영술 및 방사선과 조영제를 사용해야만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혈관을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본다면, 혈관 주변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각종 세포와 세포 사이 공간이다.

이러한 관 속으로 무엇이 흐를 수 있는가? 정답은 포도당, 콜레스테롤, 전해질과 같은 분자들이다. 물론 분자도 크기가 다양하다. 그렇다면 이 분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의학 이론에서 답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氣)다. 중의학에서는 “기(氣)가 움직이면 혈(血)도 움직인다”고 말하니 분자는 기를 따라 움직인다. 혈(血)은 혈관 속을 흐르고, 기(氣)는 경락안으로 흐른다. 개인적인 이해로 이것이 바로 중의학에서 말하는 기혈(氣血)이다.

중의학은 기분병(氣分病), 혈분병(血分病) 및 기혈동병(氣穴同病) 등을 말한다. 일부 병은 혈분에 있는데 이런 것들은 양방 혈액 검사로 진단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병은 양방 혈액 검사로는 정상으로 나오지만 환자는 아주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대개 이런 병이 기분(氣分)의 병이고 중의학 치료가 효과적이다. 이러한 기는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중시한 것과 관련이 있다.

맹자는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고 말했다. 이 기는 사실 사람의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의학에서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정신을 각각 오행(五行)에 귀속한다. 이러한 정신의 요구에 부합하는 경락의 기만이 올바른 것이다. 우리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정기(正氣)인데 정기만이 인체에 건강을 가져다줄 수 있다. 또한 칠정(七情)은 인체 정기를 해칠 수 있으므로 적당히 절제해야 한다.

남송(南宋) 말년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은 《정기가(正氣歌)》에서 자신이 어려서 몸이 아주 약했다고 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에 의해 약 2년 동안 감옥에 감금되었고, 위생 조건이 아주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에 아무 병도 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충(忠)”이 가져다준 정기(正氣)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파룬따파 수련자로서 우리가 알다시피 이는 당시 이런 역사적 요구를 남겨야 했고, 후세에 이런 정신을 남겨 참조하게 만들어,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통을 인식하고 전통의 길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정법이 보고 있노라 (송사)

한(漢) 나라 천하는 한신(韓信)이 개척했고
대당(大唐) 태종은 강토를 넓혔으며
육랑(六郎) 악비는 중원을 보위했도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중생이 여기에 와 법 얻게 하기 위함이로다
(《홍음 2》)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충(忠), 효(孝) 등의 전통문화의 정신적 가치는 또한 오늘날 사람들에게 사람이 되는 준칙을 제공한다. 사실 전통 중의학에 따르면, 이러한 정신 역시 양생(養生)이나 신체 단련에 사용할 수 있다. 중공사당(中共邪黨)이나 현대 무신론,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고대 통치자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아니다. 이는 전통문화의 본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하고 완전히 사람을 해치는 주장이다. 전통문화의 정신(精神)은 진정으로 인류 건강에 상당한 이로움이 있다. 따라서 전통을 불신하는 현대인들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젊은이들에게는 노인성 질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직간접적으로 현대 사회의 관념 및 교육 등과 관련이 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초월하면, 즉 남이 나를 불친절하게 대해도 내가 어떻게 인(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더 높은 층차의 정신으로 대할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은 이미 속인을 초월한 범주에 들어갔다고 본다. 즉 수련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모든 세인(世人)과 중생을 위해 준비된 것이 바로 파룬따파(法輪大法)라는 이 법이다. 진정으로 파룬따파에 따라 수련을 지도하고 요구해야만 해낼 수 있다. 수련에 따라 집착심을 내려놓으면 경락과 경맥 역시 갈수록 더 넓어질 것이다. 이것은 내가 말한 병원치료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이는 진정한 고층차의 것이다.

중국 고대의 중의학은 기(氣)의 측면에서 병을 치료했다. 따라서 《본초강목》에는 어떤 음식을 먹으면 기(氣)가 어떤 경락으로 들어가는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중의학자들이 천안통(天眼通) 천목으로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 발전으로 도덕이 추락하고 부패함에 따라 중의학자들이 보는 층차도 갈수록 낮아졌다. 청조(淸朝)의 어의 오겸(吳謙)이 편찬한 《의종금감(醫宗金鑑)》에 나오는 설명은 서양 해부학에서 내장 기관을 보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당시 의사들은 아마 고인(古人)이 본 것이 정확하지 않다고 느껴 이를 보충하고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고인은 이미 일찍부터 보다 깊은 층의 경락과 경맥의 표현을 파악하고 있었다.

명조의 대의학자 이시진(李時珍)은 《기경팔맥고(奇經八脈考)》를 저술했다. 자연계에서 물은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기가 많은 곳에서 기가 부족한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전법륜》 제7강 〈병원치료와 기공치료〉에서는 이를 뽑는 내용이 있다.

“그 약물은 매우 짙은 누런 기(氣)를 내뿜었다. 이를 뽑을 때, 약병 마개를 열고 밖에서 뺨을 사이에 두고 아픈 이에 대고는 사람에게 누런 약물의 기를 몇 모금 빨아들이게 했다. 약물이 얼마 소모되지도 않았는데, 마개를 닫아 거기에 놓았다. ”

제8강에 〈기를 채집하다〉에서는 “소나무의 기는 누런 것이며”라고 했다. 또 제2강에서는 “어디 기와 기 사이에 제약작용이 있는가?”라고 했다.

개인적인 이해로 약물의 누런 기는 매우 강렬하고, 또 식물의 기이기 때문에 음성(陰性)에 속하니 음성인 업력장에 들어갈 수 있다. 병기(病氣) 역시 음성이다. 따라서 사람이 그 기를 흡입하면 음성의 식물의 기가 사람의 병기와 섞여 희석되는데, 이렇게 하면 병기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사람의 “병”에 대한 느낌도 그리 심하지 않게 된다.

사실 양방에서 사용하는 항생제의 대부분은 음성(陰性), 냉성(冷性), 한성(寒性)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약을 가루로 맛보면 곧 알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병을 치료하는 원리는 이렇게 비슷하다. 물론 양방에서 약을 사용할 때면 여전히 이 표면 공간 현대 과학에서 배운 물리와 화학의 이치에 부합해야 하며, 현재 일반인들도 아주 엄격하게 이를 이해하고 있다. 때때로 필자는 동수들이 수련하면서 현대 의학 치료를 무시하는 듯한 것을 보는데 이는 사실 법리에 대해 오해하는 심태다.

대법 수련자가 초상적인 표현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에, 대법과 창세주의 무변(無邊)한 법력(法力)에 따른 것이지, 우리 개인이 어떠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속인 속에서 수련하는 대법 수련자다. 게다가 대법은 확실히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병을 치료하려는 마음으로 이렇게 비교해서는 안 된다. 이것 역시 “병”에 대한 집착심이다.

물론, 사부님께서 《전법륜》 제7강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 고대의 과학은 인체ㆍ생명ㆍ우주를 겨냥하여 직접 이것을 향해 연구했기 때문에 걷는 것은 다른 한 갈래 길이었다. 그때 배우러 다니는 사람은 모두 가부좌를 중시했으며, 앉는 데는 자세를 중시했고, 붓을 잡는 데는 기를 운행하여 호흡함을 중시했으며, 각 업종은 모두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고, 호흡 조절(調息)을 중시했는데 전반 사회는 모두 이런 상태에 처해 있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이 공능이 나온 후 기의 흐름을 보고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