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白雪)
【정견망】
남송의 애국 영웅 악비(岳飛)는 죽기 전 “천리소소(天理昭昭)”라는 단 네 글자를 남겼다. 악비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설문해자》에서는 “소(昭)란 해가 밝은 것이다. 일(日)을 따르면 소(召)는 발음이다.”라고 했다. 즉 글자 그대로 풀면 ‘천리소소’란 하늘의 이치는 아주 분명하고 명백해서 쉽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모든 사람이 무엇이 옳은지 아는데 왜 또 틀린 것에 따라 행동하는가?
당시 황제나 재상 진회(秦檜) 등 어느 누구인들 악비가 억울한 누명을 썼음을 몰랐겠는가? 하늘의 이치란 너무 깊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한 것이다. 단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동수와 교류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교류하는 동안 나는 점차 이 속에 담긴 이치를 알게 되었다. 오늘날 대법이 널리 퍼지고 있는데, 권력자들 중 어느 누가 대법이 박해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여전히 함께 대법을 모욕하는가?
순전히 이익을 위한 것이다. 관리는 승진해서 돈을 벌려 하고, 사업가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며, 일반 백성들은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모두 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시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몰랐노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막 말을 하다 머릿속에 영감이 하나 떠올랐고, 27년 전 법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나를 미혹시켰던 한 단락의 법리를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공법을 수련하는 그 자체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층차를 제고하는 자체도 무슨 어려울 것이 없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여 그는 비로소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실이익 중에서 그것을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해 보라. 이 이익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그는 어렵다고 여기는데, 실제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법륜》 〈제9강〉)
몇십 년 동안 나는 줄곧 이 단락의 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 마음을 없애는 자체가 수련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려움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러다 ‘천리소소’를 읽고 나서야 문득 명백해졌다. 원래 이런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수련의 표준은 사실 바로 그곳에 있고(마치 하늘의 이치가 아주 명확하고 명백하듯이) 매우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道)를 깨달을 때 종종 자신의 목적을 위해 깨닫는데,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할 때 비로소 아주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곧 안으로 찾을 수 있다. 해결하기가 아주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스스로 몹시 고민하며 왜 대법이 우리에게 점화해 주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수련인이 진정으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익에 대한 집착임을 모른다. 우리가 진정으로 집착하지 않으면 곧 해결된다.
자신의 집착(이익과 돈)을 위한 해결 방법을 찾는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본래 제거해야 할 것들이 아닌가!
수련인은 법에 부합하는 이치를 선택해야 하는데 사실 이는 아주 간단하다. 어려움은 집착을 위한 깨달음을 세우는데 있으니 이 자체가 틀린 것이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언제든 우리는 늘 진리는 아주 분명하게 그곳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번거로움에 부닥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우리는 원래 신이었다》에서도 이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광명(光明)과 뭇신들이 모두 천체의 안위(安危)를 위해 삼계로 들어왔는데 이것이 바로 정념(正念)이다. 하지만 해악신군(海嶽神君)은 자신의 위덕을 세우려 했다. 이 역시 해악이 수련 성취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출발점이 잘못되었다. 사심(私心)이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악은 천체의 안위를 제1위에 놓아야 한다는 걸 몰랐겠는가? 명(名)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을 뿐이다.
진리는 아주 단순해서 누구나 볼 수 있다. 명예와 이익은 아주 실제적이라 내려놓기란 오히려 어렵다. 진리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면 원만은 눈 앞에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1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