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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私心)·사념(私念)에 대한 작은 인식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남편은 3형제 중 장남이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형제들이 시어머니를 번갈아 모시는 일을 의논했다. 셋째 시동생은 외지(外地)에 살아서 어른을 모시기 불편했기 때문에, 평소 우리 집과 둘째 시동생 집에서 함께 모셨다. 대신 셋째 시동생은 경제적인 형편이 좋아 자신이 받는 복지 혜택의 일부를 형들이 받게 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시어머니 병세가 악화되면서 돌보는 업무량이 늘어났다. 그러자 셋째 시동생이 형들에게 돈을 보태 주기 시작했다. 올해 설 연휴 때 셋째 시동생이 집에 오자 형제들이 시어머니를 모시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세 사람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남편이 큰형이니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남편이 이 문제를 내게 상의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의견을 말하지 말고 두 사람더러 상의하라고 하세요. 두 사람이 상의해서 결과가 나오면 당신이 따르면 되잖아요. 우리는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요.”

남편도 내 말에 동의했다. 사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는 사람 마음의 집착이 있는 것으로 남편이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에 대한 정(情)이 너무 많아서 늘 남편이 나쁜 짓을 할까, 업보를 쌓을까 걱정했다. 이 역시 남편에 대한 정이다. 또 가족끼지 모순이 생길까 두려워 늘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길 원했고 속인 중의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했다. 가족끼리 모순이 생기면 보기면 해도 불편했고 견디기 힘들었다.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똑똑히 아는데, 수련인이 모순이 없다면 어떻게 수련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제고하는가? 가족도 모두 인연 관계가 있는데 어찌 모순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다음 날, 머릿속에 한 구절 법이 떠올랐다. 나는 사부님께서 돈을 받지 말라고 점화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내심 돈을 원하진 않았고 단지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 수련인이라면 이런저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내 생각을 남편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셋째 시동생 돈은 우리 받지 말아요. 그동안 두 달이나 잘 모셨는데도 아무 표시도 하지 않으니 그럼 우리에게 덕을 주고 복을 준 거잖아요. ‘잃지 않으면 없지 못한다!’(《전법륜》)고 했어요. 만약 우리가 돈을 달라고 했는데, 너무 많이 받으면 덕과 복으로 바꿔줘야 해요.”

내 말에 남편이 갑자기 화를 냈다. 그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상관하지 마! 당신하고는 상관이 없어.”

나는 그가 화내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 일에 신경 쓰지 말았어야 했나.’

마음속으로 또 둘째 시동생 부부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당신들이 일이 많아서 셋째 시동생이 물건을 사라고 돈을 줬는데도 불만을 품고, 또 주는 돈이 적다고 하는가?’ 나는 이렇게 심하게 불평하면서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은 왜 이렇게 화를 낸 걸까? 내가 한 말에 뭔가 잘못이 있는가? 나는 내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겉으로 보면 우리가 돈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이익심을 내려놓고, 따지지 않는 높은 자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돈을 요구하지 않으면 그가 우리에게 덕과 복을 준다고 여겼으니 이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닌가. 돈을 많이 요구하면 대신 덕과 복으로 주어야 한다고 여겼으니 이는 덕과 복을 잃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뭔가 깨달은 듯했다. 덕과 복을 구했으니 이는 구하려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덕과 복의 득실에 집착한 것이 아닌가? 이는 여전히 이익심이 아닌가? 이는 여전히 사심(私心)이 아닌가? 여전히 위사(爲私)한 기점에서 문제를 생각한 것으로 완전히 위타(爲他)한 각도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이 순수하지 않았고, 출발점도 틀렸다. 비록 우주 특성과 우주 기제가 이러한 것들을 전환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것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제1기 북미 법회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수련하는 사람이 단지 표면상으로만 내려놓고 내심 속으로는 아직도 지닌 채, 한 가지 것을 고수하면서, 당신 자신의 그 가장 본질적인 이익을 다른 사람이 해치지 못하도록 고수하고 있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바 그것은 가짜 수련이다!”

나는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하든, 완전히 위타(爲他)한 기점에 서서 자신의 그 어떤 사심(私心) 사념(私念)이 없어야만 수련인의 표준에 부합할 수 있고 신우주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대법 홍전 25주년 뉴욕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어떤 때 대법제자가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의 일사일념, 당신의 표현에 대해, 나는 아예 당신의 표면, 당신의 행위를 보지 않고, 나는 당신의 진정한 그 동기를 보며, 나는 당신의 진정한 사상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다.”

이번 일을 통해 나는 구우주의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속성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자신의 수련을 돌이켜보면, 나는 마치 위사위아한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아(自我)에 집착한 것 같다. 마치 염두를 움직이기만 하면 이 자아를 위한 것 같고, 무엇을 생각하거나 무엇을 하든 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같다. 모든 집착심은 다 이 자아를 중심으로 돌며, 모두 이 자아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고 이 자아를 수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 자아는 오히려 후천적으로 형성된 가아(假我)일뿐, 진정한 본성의 내가 아니니 반드시 그것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하면서 나는 몹시 부끄럽다. 이렇게 다년간 수련하면서 매번 모순에 부딪힐 때마다 습관적으로 먼저 사람 생각으로 대했고, 그리고 나서야 법으로 가늠할 것을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몹시 후회했고, 수련이 착실하지 못했다. 나는 다년간 이런 상태에 있었고, 층차 제고가 아주 느렸다. 이는 후천적인 이 자아(自我)에 너무 집착해 후천적인 자아를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수련이란 엄숙한 것으로 일사일념에서 모두 한 수련인의 심성이 반영되어 나오는데 위사(爲私)한 지 아니면 위타(爲他)한 지다.

이렇게 다년간 수련해 오면서 내가 여러 번 넘어지고 자빠진 것이 시종 이 ‘사(私)’란 한 글자를 뛰쳐나올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자비하시어 나처럼 못난 제자도 포기하지 않고 매번 내가 잘하지 못할 때마다 제때 나를 점화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때로 여전히 멋대로 행동했고, 뻔히 잘못임을 알면서도 저질렀고, 자신의 관념에 따라 행동했다. 정말로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부끄럽다.

사부님께서는 《불성무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

앞으로 나는 반드시 이 사아(私我)를 닦아버리고 중생을 많이 구도해 우주 특성에 동화해 신우주로 들어가고 자신의 천국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이상은 현재 자신이 있는 층차에서 얕은 인식으로 이를 써서, 동수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기 위한 것이다. 옳지 않은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