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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매매범이 대법제자가 된 이야기

운남 대법제자 설매(雪梅)

【정견망】

저는 1969년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빠가 넷에 남동생이 세 명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외동딸이었기에 가족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기억에 만성 위장염, 축농증, 잦은 콧물 때문에 항상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련 서적을 읽고 어른들의 수련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비구니가 될 것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더 이상 처녀가 아니라서 수련에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비구니가 되지 않아도 되는 수련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0년 5월, 저는 형사 사건으로 산동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파룬궁 수련생 한 명을 만나 대법(大法) 수련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대법은 죄인이었던 저를 진선인(真善忍) 수련을 통해 좋은 사람, 초상(超常)적인 사람으로 점차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진선인 수련을 견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알렸기 때문에 여러 차례 납치당했고, 중공의 눈에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혀 투옥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경험은 중공의 반인류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전통적인 사악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아래에서 제가 수련한 과정을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동수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법에 없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1. 감옥에서 행운으로 대법을 얻다

2000년 5월, 저는 산동성의 어느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막내딸은 생후 10개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제게 있어 자유를 잃은 것은 극심한 고통이었고, 삶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매일 밤 감방 철창 밖에서는 부엉이들이 마치 수십 명의 억울한 영혼이 저를 사로잡은 듯 애처롭게 울부짖었습니다. 마치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죽음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한 파룬궁 수련자를 만나 파룬따파를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대법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상을 똑똑히 알고 나자, 마치 시든 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듯 마음의 등불이 밝게 빛났습니다. 원래 사람이 사는 것에 참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수 언니는 매일 《홍음》 시 다섯 편을 외우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심한 복통이 왔습니다. 언니는 제가 파룬따파와 인연이 있어 사부님께서 저를 돌봐주신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좀 웃겼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만성 위염과 복통도 자주 앓았는데, 미국에 계신 사부님께서 어떻게 저를 돌봐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사부님의 시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한 줄 한 줄이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언니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대법은 성명쌍수(性命雙修)의 공법이라 연마할수록 젊어져.”

저는 생각했습니다.

“상관없어요! 설령 팔순 노파가 된다 해도 괜찮아요. 더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윤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복통은 3일 만에 가라앉았습니다. 그날, 운동장에서 우연히 다리를 만져봤는데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팔을 만져보니 역시 따뜻했습니다! 세상에! 파룬궁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산후풍까지 낫게 해줬습니다. 그 후 약을 쓰지 않았지만 모든 병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밤, 강풍이 불어 유치장 문이 열리고 경찰서장이 직접 제 수갑을 풀어주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린 딸을 업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대한 파도가 연이어 밀려왔습니다. 만약 제가 사다리를 놓친다면 저와 딸은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사다리 양쪽을 꽉 붙잡자, 마치 엘리베이터처럼 저절로 위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저는 법 공부가 얕았고, 사부님께서 저를 지옥에서 꺼내주셨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고 그저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가끔 악몽을 꾸면서 저는 대법의 위력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사부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전생에 까마귀 둥지를 습격한 업력을 지었으니, 금생에 이런 난(難)을 당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업을) 없앨 수 있겠느냐?”

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손을 뻗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 내 손바닥에 흰빛을 쳐내셨습니다. 저는 온몸에 통증과 마비가 느껴졌습니다. 그 모든 불편함 속에서 온몸이 투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굵고 가는 수천 개의 혈관이 뻗어 나와 피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몸이 떠올라 천장에 거의 닿을 뻔했습니다. 사부님께 “빨리 저를 구해 주세요!”라고 외치자 곧 멈췄습니다.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며 졸음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제가 금생에 사부님과 대법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저는 파룬따파 수련에 대한 결심과 신심(信心)을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2. 나는 대법 수련자

2000년 말, 저는 5년 형을 선고받고 산동 여자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저는 그 감옥 2감구에 배치된 무명(無名)의 대법제자였습니다. 당시 저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모를 거야”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착실하게 수련했습니다. 저는 감옥 생활의 고난을 소업(消業)으로 여겼는데 날마다 행복해서 펄쩍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과 깨어나면 《홍음》과 제가 이미 외고 있던 《정진요지》의 몇십 편을 외웠습니다.

교도관이 제게 파룬궁에 대한 생각을 묻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정말 다 아주 선량합니다. 구치소에서 다른 수감자들처럼 변기에 음식을 버리거나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수감자들을 자주 돕고, 사비를 들여 낯선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사주기도 합니다. 저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도 따라 배우고 싶은가?”

처음에 저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속으로 당신이 모르게 하면 나를 박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제가 기르던 병아리들이 마취약에 취해 죽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나쁜 심보를 가진 사람이 그랬냐며 욕을 했습니다. 병아리를 안아 보니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병아리들도 약에 취해 죽었지만, 얼마 후 돌풍이 불자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제 병아리들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뚜껑을 덮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꿈은 사부님께서 제게 무엇을 말씀하신 걸까요? 저는 완전히 어리둥절했습니다.

작업실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작업하던 중 문득 깨달았습니다. 병아리의 심장이 아직 뛰는 것은 제가 수련하고자 하는 열망을 상징하고, 병아리를 덮은 뚜껑은 자신의 수련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병아리는 사부님께서 내려주신 치지(氣機)를 상징하며, 다른 수련생들은 숨김없이 솔직하게 수련했기에 치지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가는 순간, 교도관이 사람을 시켜 저를 불렀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어떻게 수련의 세계에 들어왔는지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파룬궁은 참으로 좋고 나라와 백성에게 이롭습니다. 나중에 교도소 측에서는 파룬궁을 비방하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했고, 저는 고발 집회 등에 참석해 심득체험을 써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매번 진실을 말했고, 교도소 측에서는 저의 사상 개조가 미흡하고 정부와 배치한다고 했습니다.

2001년이 되자 형을 선고받는 동수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제가 있던 감옥에는 거의 20명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다른 감옥 동수에게 사부님의 경문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경전을 제대로 숨기지 못해 교도소 수색 과정에서 발각되었습니다. 박해를 견뎌낼 수 없었던 그녀는 제가 주었다고 누설했습니다. 그러자 교도관들은 저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북부의 가장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교도관들은 얇은 상의만 입혔습니다. 다섯 명의 경비병이 내 입과 코에서 피가 날 때까지 발로 차고 때렸습니다. 전기봉 하나는 손바닥에, 다른 하나는 목덜미에 충격을 가했습니다. 그런 광경은 처음 봤습니다. 그들의 심한 위협에 굴복해 저는 마지못해 더는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썼습니다.

그날 밤 꿈을 꿨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을 하나 메고 저를 맞이하러 왔습니다. 무수한 중생들이 강을 건너는 다리 앞에 무릎을 꿇고 겁난(劫難)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관의 작은 쪽이 다가왔을 때는 두렵지 않았지만, 큰 쪽이 다가오자 저는 겁에 질려 강둑으로 향했습니다.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저는 물 위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간신히 강둑으로 헤엄쳐 갔고, 마침내 수초를 붙잡고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허벅지에는 두 개의 깊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상처의 잔해를 입김으로 후벼 파고 고통속에서 잠에서 깼습니다.

이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제가 마난에서 작은 관(關)은 넘겼지만 큰 관은 넘지 못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는 《정진요지》를 외웠는데 특히 〈위치〉를 반복해서 외웠습니다.

“수련하는 사람이 겪는 고험(考驗)은 속인으로서는 감당해 낼 수 없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련 성취하여 원만(圓滿)한 사람은 너무나 적어 몇 사람에 불과하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 관건적 시각에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기가 몹시 어렵다. 오히려 늘 구실을 찾아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위대한 수련자는 바로 중대한 고험 속에서 자아, 속인의 일체 사상에 이르기까지 내려놓을 수 있다. 나는 원만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고험 속에서 걸어온 대법(大法) 수련자에게 축하한다. 당신들의 영원불멸한 생명과 미래에 있을 층차, 그것은 당신들 자신이 창립한 것이고, 위덕은 당신들 자신이 수련해 낸 것이다. 정진(精進)하라!, 이것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수승(殊勝)한 것이다.”

법을 외우며 정념(正念)이 일어났습니다. 속으로 내가 설령 박해받아 죽고 이 육신을 버릴지라도 나는 파룬을 지니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을 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저는 오성(悟性)이 높지 않았고 쟁투심도 매우 강했습니다. 일하러 나갈 때 교도관들의 구령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하나, 둘, 하나”라고 외쳐도 저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작업장으로 향할 때도 구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도착해도 교도관이 작업 도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구역장이 와서 저를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처음 저를 때렸던 다섯 명의 교도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솜옷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겁먹지 않고 재빨리 벗어 바닥에 던졌습니다.

한 교도관이 저를 놀리며 “네가 유호란(劉胡蘭)이냐?!”라고 말하며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엄하게 물었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잘못이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두 개의 전기봉이 동시에 제 민감한 부위에 꽂혔습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곤봉이 작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도관이 중얼거렸습니다.

“어젯밤에 완전히 충전했는데 왜 작동하지 않는 거지?”

그는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화가 나서 저에게 사무실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구역장이 교도소장을 부른 후, 교도소에서 제게 일주일 동안 독방에 수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삼서(三書)”를 쓰지 않자, 일주일이 더 연장되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쓰지 않으면 독방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마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먹고 마시고 말하는 것을 멈추고 ‘전향 소조’의 헛소리에 전혀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상부 기관에서 교도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 제가 파룬궁 수련으로 독방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자, 자료를 수집해 형량을 늘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감옥 자체의 압박은 이미 엄청났지만, 여기에 상부의 압박까지 더해지자 마치 감당할 수 있는 극한에 다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때 꿈속에서 사부님께서 다시 한번 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꿈속에서 하늘에서 경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알아볼 수 없는 금빛 글자들이 아주 빠르게 떨어졌습니다. 제 눈에는 그저 큰 글자 네 개만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천방득지(天訪得地)”였고 ‘訪’의 ‘言’ 부분이 몇 번 반짝였습니다.

[역주: 방(訪)은 상방(上訪)과 연결되니 언(言)은 진상을 널리 알리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하라는 사부님의 점화인 듯.]

저는 또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고, 저를 강제로 그들에게 합류시키려는 갱단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고기와 술을 사주고 요리까지 해주며 저를 풀어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들은 제가 그들과 합류하지 않는 한 저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구치소에서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것도 보았습니다. 교도소 행정관이 구치소에 “당신들은 수감자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왜 파룬궁 수련생들까지 독방에 가두고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구치소장이 “누군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독방에 제가 있는 것을 알고 그녀는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젠장! 너는 애 딸린 엄마인데 네 딸들은 누가 돌보냐? 너는 집에 가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으냐? 아니면 여기에 파룬궁을 연마하러 온 것이냐!” 이 말이 제 귀에 꽂혔고 쓰디쓴 눈물 두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천천히 눈물을 삼켰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조용히 《도법》을 외웠다.

“다시 말해 당신들이 이미 수련 성취된 그 부분을 억제하여 신의 일면이 법을 바로잡는 것을 저애하였다. 아직 수련 성취되지 않은 일면이 어찌 주사상(主思想)을 억제하며, 이미 법을 얻은 일면을 억제할 수 있는가?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를 자양(滋養)하여 그것이 법의 틈을 타게 한 것이다. 제자로서 마난이 올 때, 정말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거나 또는 부동한 층차에서 당신에 대한 부동한 요구에 부합하도록 마음을 둔다면, 충분히 고비를 넘을 수 있다. 끝없이 끌고 내려간다면, 만약 心性(씬씽) 또는 행위에 다른 문제가 없다면, 사악한 마(魔)가 당신들이 방임(放任)한 틈을 탄 것이 틀림없다. 수련하는 사람은 필경 속인이 아닌데, 그럼 본성의 일면이 왜 법을 바로잡지 않는가?”

사부님의 말씀은 단번에 나를 깨어나게 했고 나는 자신이 “고기와 술을 사주며” 사악한 마(魔)를 자양했음을 알았습니다. “본성의 일면이 왜 법을 바로잡지 않는가?” 이 법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그 방(訪)이란 글자의 ‘言’이 계속 반짝인 것은 정법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동수들은 왜 상방하러 갔는가? 이는 북경 최고 권력자를 향해 대법은 바르고 대법이 좋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생사를 내려놓고, 전기충격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이 가중될까 두려워하지도 말고, 딸을 돌볼 사람이 없을까 두려워 말며, 압력을 무릅쓰고, 모든 것을 다 사부님께 맡기자.

독방에 갇힌 지 12일째 되는 날, 저는 포협(包夾 감시원)에게 “종이와 펜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삼서(三書)를 쓰는 것이라 생각해, 즉시 종이와 펜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아주 가지런한 글씨로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 사부님은 중생을 구도하러 오셨고 정치적인 목적이 없습니다. 공부와 연공을 멈출 수 없습니다.” 내가 대법제자라고 서명을 하기도 전에 감시원이 낚아채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당신 형벌이 가중될 겁니다.”

구역장이 제 교육 상태를 확인하러 보러 오자 감시원은 제가 쓴 글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말했습니다. “왜 전혀 진전이 없는 거야?”

그녀가 나타난 순간부터 저는 정법구결(正法口訣)을 외웠는데 그녀는 제 앞에서 연이어 재채기를 했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젊은 경찰 한 명을 데리고 저를 다시 감옥으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그녀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대장(隊長)님,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감기에 걸렸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게 아니라 보응을 받는 겁니다. 더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십시오. 마에게 이용되면 당신에게 해롭습니다. 앞으로는 대법제자들을 잘 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헛소리! 다른 사람들은 다 마(魔)이고 당신은 부처란 말이야.”라고 욕했습니다. 비록 말은 강경하게 했지만, 그녀는 더는 다른 대법제자들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도관들이 대법제자들을 상대로 악행을 저지를 때도 그녀는 못 본 척했습니다. 저를 박해하던 교도관 중 한 명은 오토바이에서 떨어져 진흙투성이가 된 채 작업장에 도착했습니다. 또 다른 교도관은 배가 아파 며칠 동안 휴가를 냈는데, 두 사람 모두 다른 보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악을 강력하게 두려워 떨게 했고, 나중에 더 편안한 수련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저는 이 특수한 시험장에서 13일 동안 극심한 압박을 견뎌냈고, 합격 답안지를 제출했으며, 체중이 많이 줄었습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 《길》, 《역시 두세 마디를 말하다》라는 3편의 경문이 전해지자, 저는 눈물을 흘리며 경문을 외웠습니다. 법리가 끊임없이 나타났고 “정법(正法)”이라는 두 글자를 외울 때는 더욱 수승(殊勝)하고 위대해서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꿈에 사부님께서 제게 열쇠를 선물로 주셨는데, 저는 사부님께서 제 공능의 일부를 열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현실 생활에서 연공하거나 경문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중대하고 큰 일도 제가 몇 마디 말만 하면 바르지 못한 요소와 저에 대한 교란을 해체할 수 있었습니다.

3. 좋은 사람이 억울하게 투옥

5년 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저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보소 《전법륜》을 얻었습니다. 동수들의 도움으로 자료점을 설립했고, 우리 집에 작은 꽃을 피웠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의 인구는 150만 명입니다. 마을 장터가 열릴 때마다 저는 동수들과 함께 큰 자루의 진상 자료를 나눠주었고, 지역 경찰서에서도 공개적으로 진상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때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거리와 골목길, 모든 마을 장터를 돌아다녔습니다.

2014년, 한 동수가 미행당해 자료점이 발각된 후, 저와 다른 한 동수가 납치되었습니다. 저는 협조를 거부했고 자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저는 의연하게 진술했습니다.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좋은 사람이 된 것으로 잘못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진선인(眞善忍)의 선을 행하라고 말한 것도 잘못이 없습니다. 법에 따라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한 것도 잘못이 없는데, 정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저는 어떤 법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파룬궁을 탄압하여 법을 어긴 것은 장쩌민입니다.

불법 재판과 선고 이후, 판결이 지연되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이 매우 논란이 많고 법원 단독으로 판결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보 대대에서 세 번이나 구치소를 찾아와 서류에 서명을 요구하며, 직접 상관에게 관용을 호소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두 줄짜리 글을 읽고 그들에게 문서를 던지며 말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과 대법을 배반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사실적 근거도 없이 불법적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저는 법에 따라 항소했습니다.

항소하는 동안 변호사는 구치소에서 저를 면회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 시간에 저는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구치소는 불법적으로 변호사 접견권을 박탈했고, 천안문 분신 사건 당시 파룬궁에 누명을 씌웠습니다. 한 남자 수감자는 “그녀는 강인한 여자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이 제 다리에 족쇄를 채우러 왔을 때 저는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다른 수감자들에게 저를 체포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경찰을 붙잡고 “그녀는 좋은 사람이니 족쇄를 채우지 마라.”라고 간청했습니다. 경찰이 격노해 욕설을 퍼부으며 수감자들을 겁에 질리게 했습니다. 마침내 경찰이 저를 붙잡아 감방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 공산당이 좋은 사람을 박해한다!”라고 외쳤습니다. 부소장은 전선으로 만든 채찍으로 저를 때렸고, 여러 명의 경찰이 저를 누르고 족쇄를 강제로 채웠습니다. 저는 박해에 항의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다섯째 날, 부소장은 수감자들에게 족쇄를 풀고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불법적으로 제 법적 권리를 박탈했고, 심지어 저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변호사에게 저를 만나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고소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가안전국의 명령이라며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자, 그는 저를 병원으로 보내 링거를 맞도록 했습니다.

설 전이라 저를 담당하던 경찰관이 말했습니다.

“아들이 설날에 집에 오는데, 같이 있기가 힘들 것 같아요. 당신이 밥을 안 먹어서 상관들이 제 휴가를 취소하고 당신이 링거 맞을 때까지 당신 곁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녀는 또 말했습니다. “문제는 위에서 일으키고 뒷감당은 우리가 하네요. 나중에 자유를 얻으면 딸아이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세요. 이 사람들이 당신을 찾지 못하게 하세요. 당신은 열흘 넘게 연공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하루 빨리 일어나 연공하길 바랍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저도 울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선량을 선택해서 감사합니다. 막내딸은 겨우 열네 살입니다. 두 자매가 부모의 보살핌 없이 어떻게 한 해를 보낼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제 식사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제가 먹겠습니다.”

그 후, 구치소는 저에게 보름 동안 영양가 있는 아침 식사를 제공하고, 구치소에서 판매하지 않는 음식도 살 수 있는 특별 허가를 내주었으며, 여자 감방 어디든 방문할 수 있는 특별 허가도 내주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마련해 주신 사람들을 구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구치소의 모든 사람들이 제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저를 “파룬언니”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능력자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안전을 위해 중공과 그 산하 조직에서 탈퇴하라고 하자, 모두들 기꺼이 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출소 후 대법 서적을 찾아 읽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삼퇴한 수십 명의 이름을 천 조각에 적어 숨겨두고, 짧은 형을 선고받고 풀려난 수감자들에게는 그것을 동수들에게 가져가 탈퇴 절차를 밟도록 했습니다.

4. 감옥에서 이지적으로 박해에 반대

저는 원래 형이 유지된 채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은 수감자들을 돈벌이 도구로 취급합니다. 과중한 업무와 초과 근무로 인해 수감자들은 기진맥진하여 서서 졸기도 합니다. 한 노년 동수는 공기 스위치를 설치하던 중 손이 벗겨지고 상처에서 피가 났습니다. 작업을 끝내지 못해 수감되었지만 씻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른 수감자들이 씻는 것을 마칠 때까지 TV실에서 행동 규칙을 공부해야 했고, 그 후에야 다시 감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수련생들은 서로 대화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끊임없이 감시당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저는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저는 다른 수련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법 제자들은 이런 식으로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악을 폭로하고 박해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도 모두 제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소장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며 공정하고 합리적인 대우를 요구합니다.

둘째, 노동법에 따라 근무 시간은 8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됩니다.

소장은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일 특별 감독관에게 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논의 끝에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단식 투쟁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 날, 파룬궁 책임자가 우리를 사무실로 불러 강연을 듣게 했습니다. 우리 여섯 명은 모두 함께 갔습니다. 대화 중에 나이 든 동수가 피가 흐르는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수감자가 아닙니다. 이 부당한 박해로 우리는 정부와 정반대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활동을 지지하지만 불법적인 요구에는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과 근무도 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수련생들과의 교류를 제한하지도 않을 것이며, 노동 과제를 완수하지 못하면 공부도 하지 않을 것이며, 제때 휴식을 취할 것입니다.”

마침내 경찰관이 말했습니다.

“제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교도소에 보고하고 3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3일 후, 교도소는 우리의 요구에 동의했습니다. 동수들에게 할당된 업무도 가벼웠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이틀 쉬고 금요일에는 공부했습니다. 경찰이 와서 두 시간 동안 수업을 해 주었는데,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독서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지정된 수감자들과 함께 작업실에서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공부 시간 동안 수감자들이 우리를 감독하도록 했고, 우리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수감자들이 우리를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두 명의 수련생이 교대로 역사 이야기를 읽어주고, 감시 수감자들에게 전통 이야기와 불교 수행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점차 감시 수감자들과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경찰관 한 분이 우리 수업 시간에 와서 항일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어주며 우리를 세뇌하고 당 문화를 주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분은 울먹이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정중하게 일어서서 눈물을 닦아줄 휴지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경관님, 당신은 남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제가 우리 가족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 친삼촌은 북한에서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유골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순교자 가족에게 수여되는 명예 훈장까지 받았지만, 조부모님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할머니는 우울증에 빠져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셨습니다. 가족들이 관련 부서에 갔지만 삼촌의 이름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중국 인민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훼손하는 체제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1999년 파룬궁 박해 이전까지 파룬궁 수련생들은 공산당을 비난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걸어나와 공산당의 거짓말과 기만을 폭로했고 공산당은 죽도록 부려먹다 이용 가치가 없으면 사람을 죽이고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또 다른 동수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사랑합니다. 제 딸은 해외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며 중국 전통문화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파룬궁 수련생들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삼촌 몇 분이 날조된 혐의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저와 형제자매들이 또 날조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직장에서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로 인정받고 학력, 기술, 예의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공산당의 매 차례 정치 운동은 늘 중국 인민에게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경찰들은 조용히 경청했다. 한 경찰관이 말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설교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서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재다능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누구의 신념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는 데이트 중에 꾼 이상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은 인과와 인연을 믿는다고 했다. 경찰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원만해졌고, 느슨하게 수련하고 진상을 알릴 환경을 조성했다.

…중략…

저는 원래 인신매매범이었지만, 법을 얻은 후 점차 대법 제자가 되어 부지런히 수련하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대법제자가 되었습니다. 대법 수련을 통해 제가 겪은 변화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구치소에서 법을 얻었고, 이처럼 특수한 환경 속에서도 법을 외우고 배우며, 꾸준히 착실하게 수련해 왔습니다. 사부님의 보호 아래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진상을 알리고 세인을 구하고 있습니다.

가장 깊은 깨달음은 수련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고, 반드시 착실히 수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해내야만 비로소 대법의 법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부님의 매 한 구절 말씀은 마치 모두 하나의 시험 문제와 같으니, 당신이 오직 그에 따라 해야만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고 배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