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圆明)
【정견망】
현재 중년인 나는 20년 넘게 대법을 수련해왔다. 최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난관에 부딪혔고,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우연히 어떤 사건을 통해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고, 끊임없는 갈등과 의심, 말다툼과 눈물이 이어졌다. 멜로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장면들, 과거 오만하게 경멸했던 그런 모든 감정과 행동들이 내게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속고, 배신당하고, 원망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부면(負面)적인 감정들이 나를 공격했다. 나는 울기 시작했고, 불안해졌으며, 남편 말을 의심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고, 이후 살아가는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전례 없는 압박감과 미망(迷茫)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법 공부를 중시하지 않게 되었고, 차분히 연공할 수 없었으며, 진상을 알릴 마음도 없었다.
수련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이 난(難)이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가? 나는 자신의 내심(內心)을 조사해 보았다. 무조건 안으로 찾는 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수련인이라면 아무 이유가 없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동시에 갑자기 직장에서 직위를 잃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회사 구조 조정으로 일반 직원으로 직급이 강등된 것이다. 회사 일를 그토록 중시하던 내게는 그야말로 무슨 농담처럼 들렸다. 오랜 세월의 노력과 초과 근무, 그리고 얻은 성취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듯했다.
인간 세상에서 “캐릭터”의 붕괴
일단 이 용어를 사용해 보겠다. “캐릭터[人設]”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만들어낸 온갖 허위적인 설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좋은 가정, 좋은 직업, 그리고 괜찮은 수입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자산이다.
이 3개월 동안 나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든든한 가정을 잃었고, 남편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이 역할에서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직업도 예전의 명성을 잃었고 더 이상 나를 자랑스럽게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나는 이러한 일들이 사부님의 안배이니 반드시 좋은 일이고 나의 제고를 돕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만한 마음
나는 비로소 내가 남편을 얼마나 오만하게 대했고 내심으로 그를 얼마나 얕보았는지 깊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나의 무시가 남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는 내게 위대한 신앙이 있고, 자신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다고 여겼으며, 알코올 중독자나 인색하고 째째한 사람들을 얕보는 마음 때문에 자신이 남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자신에게 빛나는 아우라[光環]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줄곧 내심에서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다가가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거만하고, 남을 무시하며, 극도로 이기적이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남편의 필요와 일상에 대한 무관심으로 드러났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에게만 온 신경을 쏟았지 남편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았다. 남편과는 소통하기 어렵고 그의 성격에 결함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부님 말씀처럼, 나는 중생에게 자비한 것처럼 그렇게 남편을 대하지 못했다. 내가 대법을 수련해 남편에게 심리적 압력을 주었으나, 나는 늘 그의 감수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고 당연히 여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점차 멀어졌지만,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한번도 대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가늠해 본 적이 없었고, 지금은 이미 법의 요구와는 차이가 아주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업무 중에 팀원이 제때 피드백을 주지 않으면, 속으로는 그들을 무시하고, 나는 똑똑하지만 그들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지 몰라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는 모두 오만(傲慢)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남들을 얕보며, 아주 작은 기회만 있어도 자신을 치켜세웠다.
사심(私心)과 이익심
나는 오만과 이기심[自私]이 서로 한 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중심적인데, 즉 이기적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만 있고 오로지 자신의 감수와 욕구에만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은 우습게 여기며 개의치 않는다. 때로는 자신의 경지가 높아 다른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주 작은 실수가 천 리의 차이가 날 수 있다. 만약 출발점이 자신을 위하고 위사(爲私)한 것에서 비롯된다면, 겉으로 보이는 부동심(不動心)은 단지 자기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껍질에 불과하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착을 가려 줄곧 가짜로 수련하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는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구세력이 틈을 타게 했다.
경제적으로도 나는 자아 수호를 우선시했고, 가족에게 많은 것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돈을 썼다. 가족의 생계는 늘 남편에게 의존했음에도, 나는 오히려 전혀 감사할 줄 몰랐다. 사부님께서 부부 사이의 “은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나는 늘 자신을 먼저 생각했다. 자신에게 좋으면 기뻐했고, 좋지 않은 점이 있으면 원망하거나 미워했다. 전혀 수련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타격을 통해 나는 결국 안으로 찾아야 함을 인식했는데, 표면에 떠 있을 수는 없고 자신의 내심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私)의 뿌리를 찾아내, 법의 요구에 따라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 할 수 있어야 한다.
과시심
이 과시심도 내게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평소 자신이 명(名)을 위하고 이(利)를 위하면서 좋은 점을 조금 얻어도 널리 자랑하고 자랑하며, 과시하고 과시한다. ‘나는 능력이 있고 강자다.’”(《전법륜》) 이 말은 완벽하게 나를 말씀하신 것이다! 구체적인 표현은 바로 옷 쇼핑을 좋아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사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꼈고, 종종 돈을 많이 썼다. 자신의 강점을 과시하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의 감수를 고려하지 않았고 남의 칭찬 받기를 좋아하고 불쾌한 말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면(負面)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서서히 원한심이 자라났지만,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비판 받으면 쉽게 원망하고 협조를 거부하는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사유를 바로잡고 스스로 자신의 염두(念頭)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깨울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은 미묘(微妙)하고 또 아주 길기 때문에 끈기 있게 견지하면서 제거해야 한다. 법(法)으로 꾸밈 없이 자신을 가늠해야 하며, 때로는 자신을 보더라도 그런 더러운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런 부정확한 집착을 인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첫걸음이다. 나는 또 동수 문장을 한 편 읽었는데 요지는 집착을 인식했다면 곧 그것을 제거할 수 있으며, 굳이 이 집착에 무슨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또한 법 공부가 부족한 문제도 있었다. 나는 점차 겉으로는 엉망진창으로 보였던 이런 일들이 실제로는 내 수련에 아주 좋은 일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압력 속에서 나는 마침내 내심 깊이 숨겨져 있던, 마주하려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수많은 집착들, 오래전에 알아차렸어야 할 뿌리 깊은 사심(私心)과 이익심(利益心)을 찾아냈다. 안타깝게도 나는 여러 차례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이번에 이렇게 크게 곤두박질친 것이다.
곤두박질친 후, 나는 다시 기어 일어나 단점을 보면 고쳤고 집착하지 않았으며 솔직하게 마음을 열었다. 나는 남편과 이러한 연분이 있고 그는 또 나의 제고를 돕고 있다. 대법제자로서 나는 잘해야 하고 바르게 해야 하며, 주변 사람들의 바르지 못한 행동을 바로잡아 그들이 좋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진정으로 그들이 구도 받게 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다. 인간 세상의 얻음과 잃음, 옳고 그름은 미혹의 안개 속에서 덧없이 지나가는 구름일 뿐이다. 수련인은 반드시 청성(淸醒)해야 한다.
진정한 선(善)을 닦아내다
진정한 선(善)은 정(情)이 아니다. 정(情)은 위사(爲私)한 것이고, 선(善)은 위타(爲他)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진정하게 순수한 선(善)으로 남편과 모든 중생을 대했는가? 나는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할 수 있었는가? 이익에서나, 일 처리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진정으로 사심 없이 감당할 수 있는가? 매번 내가 한 감당은 그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을 뿐, 내심으로 보답을 계산한 것은 아닌가? 만약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실망하고 원망하지 않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숨겨진 이기심과 악(惡)이 바로 사악이 틈을 탄 곳이다. 이렇게 했으니 내 주변의 중생인 남편이 어떻게 대법의 자비를 느낄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다 소중하고 모든 생명은 다 평등한 것이다. 생생세세(生生世世) 윤회 속에서 금생에 사람 몸을 얻어 대법제자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생생세세 닦은 연분이다. 만약 내가 잘하지 못해서 이 생명이 대법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럼 나는 또 무슨 구실로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고 대법에 따라 자신을 닦지 않는가? 안으로 찾는 것만이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전법륜》)가 되는 동시에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고, 내 가족에 대한 구세력의 박해를 제거해야 한다. 나는 자신을 잘 수련하고, 주변 환경을 개변시켜, 내 주변의 모든 생명이 바른 길을 걷고 아름다운 미래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사부님의 가지하에서, 대법을 통독하면서, 명혜(明慧) 교류 문장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여러 번 넘어지면서 오늘까지 이르렀다. 수련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라 참으로 엄숙한 것이다. 心性(심성)을 제고하는 것은 진실해야 하고 착실해야 하며, 법에 대조해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 하고, 그 어떤 사람 마음도 감추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곳이 있다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5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