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역(石驛)
【정견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95년에 법을 얻었다. 법을 얻은 후 대법에서 생명이 세상에 온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고 심성이 단번에 승화되었다. 법을 얻은 후 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여 법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동수에게 설법 및 교공(敎功) 비디오를 틀게 했고, 그 후 우리는 매일 함께 모여 법공부를 하고 교류했다. 동수들이 서로 비학비수(比學比修)하며 심성을 제고하고 정체적으로 제고했으며, 모두 수련 중에서 비약적으로 위를 향해 정진했다.
그러나 99년부터 사악한 장쩌민(江澤民) 일당이 대법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수련 환경이 변했다. 우리의 수련 역시 개인 수련에서 정법 수련으로 전환되었다. 우리는 박해에 반대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며 그들이 진실을 이해하도록 하기 시작했다. 시 정부에 대법을 청원하는 것부터 천안문에 나가는 것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부터 장쩌민을 고소하는 일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행히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에 감사드린다!
다음으로 내가 최근에 깨달은 법리인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수련하다’라는 주제로 동수들과 내 심득(心得)을 나누고자 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상이 연공(煉功)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방법이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개인적인 체득으로 우리가 자신을 잘 수련하려면 반드시 ‘고층차’의 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안으로 수련’하는지 이 두 가지 문제를 알아야 한다. 먼저 ‘고층차 중의 법’에 대해 말하겠다.
1. 무엇이 고층차 중의 법인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고층차의 법이라면 단순히 우리가 처음 입문했을 때 알았던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는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가 등의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법리에 대조하여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지구에 와서 무엇을 하는지, 수련이란 무엇이며 왜 수련해야 하는지, 삼계(三界)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지, 정법시기 대법제자란 무엇인지 등 고층차의 법리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법에서 법을 인식해야 하며, 이러한 법리들을 자신이 처한 층차에서 명백히 깨닫는다면 자연스럽게 정념(正念), 즉 법에서 비롯된 정념이 생기게 된다.
2. 어떻게 안으로 수련하는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안으로 수련하는 것’은 단순히 ‘안으로 찾는 것’과는 다르다. 안으로 수련하는 전제는 법에 대조하는 것이며, 법에 대조해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우리의 생명은 법에서 왔고, 세상에 내려와 수련하는 것 역시 이 대법에 동화되는 것이며, 시시각각 이 법을 떠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법으로 가늠하고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수련할 것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밖에서 진상을 알릴 때, 우리는 삼퇴 인원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심태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찾아야 한다. 상대방의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심태가 기복이 생기는 것을 어떻게 수련했는지,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수련하면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일 처리 중의 어투, 선한 마음, 도리(道理)를 더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정진요지》)에 도달했는지, “진상을 명백히 알림”에 도달해 진정으로 이 생명이 진상을 알고 구도되게 했는지, 아니면 그저 건성으로 일을 처리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 11》에서 “중생을 구도하는 일, 진상을 알리는 일에서, 많은 사람이 깊이 있게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두어 마디 하고는 듣든 말든 안 들으면 그만두고 또 다른 사람을 찾는다. 어떤 일을 하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잘해서 사람을 구도하려면 그를 구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예로 우리가 단체 법공부 소조에 가서 공부할 때, 우선 법에 대조하여 가늠해 본다. 단체 법공부가 맞는지, 법에 부합하는지 본다.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 6》 〈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설법〉에서 “단체 법 공부는 내가 당신들에게 열어 놓은 일종의 환경이자 남겨 놓은 이러한 형식이다.”라고 하셨고, 《각지 설법 14》 〈2016년 뉴욕법회 설법〉에서는 “단체 법 공부는 내가 여러분에게 남겨 준 것이고”라고 말씀하셨다.
법을 통해 우리는 소조에 가서 법공부하는 것이 법에 부합하며 옳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부님 말씀에 따라 단체 법공부에 참가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법에 대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수련하는 것’은 어디서 나타날까? 바로 단체 법 공부에 참가할 때 발생하는 일에서 자신이 어떻게 수련하는가에 있다. 예를 들어 오늘 단체 법 공부에 가려는데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 못 가게 만든다면, 당신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법 공부 중에 동수 사이의 모순을 자신이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런 것들이 바로 수련이다.
법회를 개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선 법에 대조하여 가늠해 보아야 하는데 법회를 여는 것이 법에 부합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스위스법회 설법》에서 “우리가 법회를 여는 주목적은 법회를 통해 여러분이 수련 중에서 서로를 살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도록 함으로써 여러분이 공동으로 제고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 《북미 제1기 법회 설법》에서는 “우리가 법회를 여는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욱 빨리 제고할 수 있게 하고, 하루빨리 원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법에서 우리는 사부님께서 법회 개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법에 대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수련하는 것은 어디서 나타날까? 바로 당신이 법회에 참가하려 할 때 이런저런 교란이 생겨 못 가게 할 때, 스스로 어떻게 교란을 돌파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수련이다. 물론 다른 교란들도 있겠지만 일일이 서술하지는 않겠다.
이상의 예시들은 법리 중에서 어떻게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수련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물론 속인 속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살 때 값을 흥정할 경우 어떻게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수련’할까? 우선 자신이 이렇게 흥정하는 것이 대법에 부합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대답은 부정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 어떻게 수련하는가? 반드시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겪으며 이익을 탐하는 마음 등 좋지 않은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것들이다. 만약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고다. 물론 다른 많은 일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우리 이 한 법문은 속인 사회에 열어 놓고 닦는 것이기에 각종 심성을 제고하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일을 만났을 때 우리는 우선 법에 대조해 보고, 법으로 가늠하여 대법에 부합하는지 본 후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여 진정으로 법 위에서 제고해야 한다. 시시각각 자신을 법 속에 녹이고 대법에 동화되어 합격된 대법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정진이다.
이상은 나의 최근 짧은 수련 체험이다. 부적절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지적을 부탁드린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0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