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1990년대 중국에 《혼인과 가정》이라는 잡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아직 가정을 이루기 전이라 당연히 ‘나의 가정’에 대해 논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 잡지를 몇 번 들춰보긴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모호하면서도 깊은 인상 하나만 남았다. 즉 가정은 마치 하나의 성城)과 같아서, 성 안의 사람들은 번뇌를 많이 말하며 심지어 “당시에 왜 그(그녀)를 선택했을까?”라며 한탄하곤 한다는 점이다. 마치 모든 가정의 이야기가 그 시대에 가장 유행하던 말인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다”라는 문장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후 나 자신도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으며, 고락과 번뇌는 여느 중생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속에 처해 사방을 둘러보니 다들 그러하여 오히려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그 근심을 알지 못했다. 만약 법을 얻지 못했다면 혹시 흐리멍덩하게 일생을 지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박해가 갑자기 일어났고,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으며 가정 역시 그에 따라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졌다. 그 시절 가정에 대한 가장 깊은 기억은 대략적으로 견정한 신념과 법을 수호하기 위해 변호했던 것뿐일 것이다. 그런 상태는 고통이라 하기도 즐거움이라 하기도 모호해서 일시적으로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저 줄곧 견지하고 감당해 왔으나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후 아내도 수련의 길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른바 ‘노제자’인 내가 오히려 아내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어떻게 적절한 선을 지켜야 할지 몰랐다. 그 원인을 세밀히 따져보니 단지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사람의 곤혹스러움 때문에 멈추지 않았기에, 수련과 생활이 엇갈리고 부부와 동수가 융합되면서 우리는 현실과 수행 사이에서 서툴지만 열심히 각자의 역할을 전환해 나갔다.
요점만 말하자면, 최근 2년에 이르러서야 무수한 마찰과 반성을 거치며 서로 점차 이성적으로 변했고 부부 동수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선을 천천히 체득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가끔 다툼은 있지만 대체로 평화로우며 근본을 해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은 바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각지 설법 7》〈미국수도법회 설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수(實修)’ 두 글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른바 실수란 바로 모순 속에서 안으로 찾고 스스로 반성하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에 수행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할 때 흔히 대법을 잣대로 삼아 타인을 가늠하기 쉽다. 일단 상대방의 부족함을 발견하면 곧바로 질책하는 마음이 생겨 입으로는 항상 “당신은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말하게 된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변하지 않으면 더욱 불만이 생긴다. 입으로는 ‘선의(善意)’라고 말하지만 말투에서 온화함을 찾기 어렵다. 상대방이 느끼는 것은 압박과 강제이기에 자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특히 개성이 좀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항거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른바 ‘선의’는 사라지고 충돌이 뒤따라 일어난다.
만약 마음이 선하지 않다면 설령 언사(言辭)가 아무리 온화하더라도 그 안의 긴장감을 감추기 어려우며 상대방 역시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사람이 수련 중에는 사람마음(人心)이 남아 있기에, 일단 선하지 못함과 배척을 느끼면 흔히 본능적으로 반격하거나 차가운 말로 맞서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심지어 더 큰 충돌을 빚기도 한다.
타인의 집착을 볼 때 내심으로 늘 불만과 질책을 품는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반드시 간격이 생기고 원망이 쌓여 풀기 어렵게 된다. 이것이 바로 수련 중의 커다란 누락이다. 상대방이 동수라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기준을 높여 그 부족함을 집착으로 간주하고, 이로써 반감과 혐오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혐오는 그 자체로 선하지 못한 것이다.
상대방의 집착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또한 하나의 집착이다. 진정한 수련은 자신을 닦는 데 있다. 혐오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면이 원융(圓融)하고 청명(淸明)해져 자비가 생겨나면 자연히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밝고도 원만(佛光普照 禮義圓明)’한 경지가 나타난다.
함께 수련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상대방의 부족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다만 사람마음을 제거하기 어려울 뿐이며 이는 본래 수련 중의 상태다. 만약 자신을 잘 닦는다면 상대방은 무형 중에 ‘비학비수(比學比修)’하게 될 것인데 어찌 늘 마음에 걸려할 수 있겠는가?
수련하는 사람은 모두 ‘상유심생(相由心生)’을 알고 있다. 만약 내심이 청정하여 잡념(雜念)의 방해가 없다면 상대방 역시 무형의 제약을 받아 그 집착이 자연히 점차 옅어질 것이다. 타인의 부족함에 집착하지 않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지 않으며, 도리어 내심(內心)을 돌아보고 착실히 수행하며 하되 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홀가분하고 자재(自在)할 것이니 번뇌가 어디서 오겠는가?
참으로 다음과 같다.
만천 가지 번뇌 모두 스스로 부른 것이니,
숨 막히는 무거움도 일념 사이로다.
본래 내 것 아닌 것을 끊어버리고,
안으로 닦고 반성하니 절로 평안하구나.
萬千煩惱皆自惹
窒息沉重一念間;
割舍本非己所有
內修內省自安然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1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