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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의 잊지 못할 ‘4·25’ 상방

——1999년 4·25를 회상하며

명법(明法)

【정견망】

나는 1996년 10월에 법을 얻었다. 1998년 봄이 되어서야 외부 연공장에 나가 연공하기 시작했는데, 단체 연공 환경에 들어서니 제고가 매우 빨라 일주일 정도 만에 가부좌 시간이 10여 분에서 1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연공장의 한 동수가 북경 텔레비전 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에서 파룬궁에 대해 사실과 다른 보도를 했다며, 상황을 알리러 가고 싶은 사람은 가도 좋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연공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이를 중시하지 않았다. 사실 수련인으로서 법을 수호하고 중생이 대법을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큰 선(善)이자 자비의 표현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머릿속에 좁고 이기적인 관념과 생각이 짙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단체 법공부에 참여하고 끊임없이 법을 공부하면서, 사람의 전반 수련 과정이 바로 집착심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과정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대법을 수련하는 일원(一員)으로서 법에 책임을 지고 중생을 고려하며,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정각(正覺)으로 닦아 나가야 함을 깨달았다. 수련이란 사람의 관념을 닦아버리는 것이며, 대법을 통해 우리의 모든 행위는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진선인(眞善忍)’을 지도 원리로 삼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1999년 4월 24일, 당시 연공장에서 소식을 들으니 천진 공안국이 40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했다고 했다. 발단은 당시 천진 교육학원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과학기술박람》 잡지에 파룬궁을 근거 없이 비방하는 기사가 실린 것이었다. 일부 천진 동수들이 이를 알고 관련 기관에 실정을 알리러 갔으나, 천진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구타당하며 40여 명이 체포되었다. 천진 파룬궁 수련생들이 천진시 정부에 사람을 풀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자, 공안부가 이 사건에 개입했으니 북경에 가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우리 연공장 동수들은 천진의 이 소식을 듣고 다음 날인 4월 25일 아침, 버스를 타고 중남해 근처 부우가(府右街)에 있는 국무원 신방국으로 상방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4·25 당일 아침, 우리 연공장에서도 많은 동수가 갔다. 우리가 부우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동수가 와 있었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섰다. 우리가 신방국에 상방하러 간 목적은 매우 간단하고 명확했다. 정부는 당시 기공에 대해 ‘3불 정책(논쟁하지 않고, 선전하지 않으며, 비판하지 않는다)’을 갖고 있었으나, 하조휴는 굳이 이 정책을 어기고 사단을 일으켰으며 천진 경찰은 고의로 사람을 잡아 사태를 확대했다. 우리는 천진 경찰이 체포한 수련생들을 즉시 석방하고, 파룬궁 서적의 출판을 허용하며, 수련생들이 자유롭게 수련할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아침 7시경 부우가에 도착했는데, 도착 후 우리는 도로 서측에 조용히 서 있었다. 가끔 부우가를 따라 살펴보니 사람은 많았으나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고, 모두가 도로 서측에 정연하게 서 있었다. 당시 경찰들이 좀 보였는데 그들도 매우 여유로워 보였고 수련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도로에는 평소처럼 공공버스가 다녔고 승용차들도 지나갔다. 당시 상방하러 온 수련생들은 정말 다양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상방 인파 속에 있었고, 임신한 여성과 남녀노소 모두가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연공장은 상대적으로 젊은 층인 30대 정도가 많았는데, 젊은이들은 모두 앞쪽에 서 있었다.

오전 10시경, 당시 국무원 총리가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몇 명을 들어가 대화하게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룬궁 수련생 몇 명이 들어갔고, 밖에 있는 동수들은 인내심을 갖고 결과를 기다렸다.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파룬궁 수련생들이 도착해 인원은 점점 늘어났다. 점심에는 모두 간단히 음식을 먹고는 스스로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 현장을 청결하게 유지했다. 오후쯤이었을까, 일부 동수들이 파룬과 사부님의 법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아 모두 무척 감격했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사부님의 법신이 지켜보고 계신다고 믿었으며, 이는 모두의 정념정행(正念正行)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했다.

저녁 9시경이 되어 북쪽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안으로 들어갔던 수련생 대표들이 나와서 천진에서 사람들을 풀어주기로 했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모두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문제가 해결된 것을 보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내 동생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하북성 고향에서 올라왔기에 아마 그날 밤 바로 돌아갔을 것이다.

4·25 이후에도 사람들은 평소처럼 밖에서 연공했으나, 7·20 이전까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연공장에 와서 사진을 찍거나 간섭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 후 6월 10일 파룬궁 박해 기구인 610 사무실이 설립되었고, 강택민은 질투와 두려움 때문에 독단적으로 파룬궁을 소멸하려 했다. 결국 7월 20일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와 유언비어, 비방, 탄압이 발생했는데 그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겠다.

4·25 평화 상방 사건 이후 내가 알기에 국제 여론의 영향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모두 중국 정부가 개명된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중국이 더욱 문명화되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4·25 만인(萬人) 평화 상방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가장 훌륭한 만 명 규모의 평화롭고 이성적인 집단 상방의 효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북경과 주변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서로 다른 연령과 직업의 수련자들이 상방 과정에서 시종일관 교통을 방해하지 않고, 구호를 외치지 않으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함부로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다. 시각장애인 유도블록까지 비워두었으며, 떠날 때 지상은 매우 깨끗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여준 수련자들의 소양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이 사람들이 모두 같은 법을 닦고 있으며, 대법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심지어 좋은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먼저 타인을 고려하고 법에 책임을 지며 사회에 책임을 졌기에 이러한 소양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선량한 사람들은 대법 ‘진선인(眞善忍)’이 사회와 직장, 가정 등에 주는 유익함을 볼 수 있었으며, 참으로 국가와 인민에게 백 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도 없는 큰 선행이었다.

생각해보면 만약 이후의 탄압이 없었다면, 파룬따파의 ‘진·선·인(眞·善·忍)’은 중국 정부와 심지어 중국 공산당에도 복이 되었을 것이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우리 수련인에게는 적이 없으며, 진·선·인을 수련하는 사람은 모든 중생에 대해 선(善)하고 자비롭다고 가르쳐 주셨다. 설령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파룬따파 서적을 본다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인류 사회에도 유익한 일이다. 상방(上訪)은 겉으로는 우리를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생이 파룬따파의 진·선·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파룬궁은 불가(佛家) 수련 대법이기에, 중생이 불법(佛法)을 비방하여 큰 업(業)을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대선(大善)과 자비(慈悲)의 표현이다.

27년이 흘렀으며, 역사는 4·25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세계가 파룬궁 진·선·인을 알게 했으며, 세상 사람들이 진·선·인의 위대함과 광휘,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게 했다!

4·25의 진상을 보고 듣는 모든 이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기원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