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법제자
【정견망】
1. 종점과 반성
1994년 수련을 시작한 후,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잊지 않고 늘 마음속에 간직해 온 말씀이 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은 고관대작이든, 지식인이든, 평범한 백성이든 상관없이, 사회적 계층의 경계도 없고 입문한 선후나 귀천의 구별도 없다. 누구나 저마다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손에 쥐고 동일한 출발선에 서서, 중국의 사방팔방 모든 곳으로부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리켜주신 길을 향해 정정당당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대법 수련은 공평하며 기회는 균등하다. 《전법륜》을 저마다 한 권씩 가졌으니 모든 법리와 수련의 층차가 그 안에 들어 있다. 탁 트인 큰길과 지고한 진리가 하늘의 정점까지 곧바로 통하고 있으므로, 남은 것은 온전히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다(修在自己)’는 사실뿐이다. 종점을 향해 달리는 속인의 마라톤 경기처럼 우리는 수련인의 원만(圓滿)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이 말을 들었을 때 무척 큰 충격을 받았고, 이 구절에 담긴 남다른 무게감을 체감했다. 파룬따파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자, 동시에 험난한 수련의 길이기도 하다. 사부님께서 시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
몸 고생은 고생이 아니나니
마음 수련이 가장 어렵도다
고비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데
곳곳마다 마(魔)로다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겠노라
세상 고생 겪을 대로 겪나니
세간 벗어나면 부처로다
(《홍음》 〈마음 고생〉)
1992년부터 시작해 우리는 차례로 길을 나섰다. 어떤 이는 차를 타고, 어떤 이는 걸어서 가며, 어떤 이는 거금을 지녔고, 어떤 이는 빈털터리였다. 어떤 이는 온 가족을 데리고 가고, 어떤 이는 넓은 길을 홀로 걸어갔다. 그 여정에는 맑게 갠 날도 있었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도 있었으며, 이리·호랑이·표범이 나타나거나 썩은 귀신과 인간 요괴가 출몰하기도 했다. 험산준령과 악한 물줄기를 지나기도 하고 무릉도원을 만나기도 했으며, 사람의 마음이 가로막고 만 가지 마(魔)가 방해하기도 했다.
10년, 20년, 3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만 가지 마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속에서 관마다 모두 넘어야 하고 곳곳마다 마가 나타나며, 백 가지 고난이 일시에 내려앉는 수련의 상태를 겪어왔다. 중국 공산당의 잔혹한 박해를 겪었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엄준한 시련도 거쳤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대법 수련의 가없이 높고 위대함을 깊이 체감했고,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는 층차의 제고를 경험했으며, 생명이 매번 다시 창조되는 듯한 끝없는 감사함을 느꼈다. 나아가 심성(心性)의 경계가 승화하는 신기한 느낌도 겪었다. 저마다 가슴 미어지고 노래와 같은 수련의 길을 엮어내며 생명 왕국의 무지개 같은 세월을 걸어왔고, 창세주께 때해 서약을 실천한 각자의 생명 답안이 있다.
지금 우리는 종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만 가지 감회가 교차한다. 위안감과 더불어 부끄러움과 후회, 그리고 제대로 닦지 못한 시린 아픔이 반씩 섞여 있다. 구구 81난 중에서 우리는 도중에 멈추어 서서 구경하기도 했고, 지체하며 정체하기도 했으며, 제대로 걷지 못해 비틀거리기도 했다. 대열에서 이탈한 적도 있고, 따뜻한 물에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나태해지기도 했다.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는 지금, 우리는 뒤를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미혹되지 않는 밝은 지혜로 자신의 부족한 점이 어디에 있는지 청성(淸醒)하게 알아야 한다. 아직 몇 개의 난과 관이 남아 있는지 헤아려 분발하여 따라잡아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바르게 수정하고 대열에서 낙오된 동수를 부축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안으로 찾아야만 최후의 길을 잘 걸을 수 있다.
2. 수련 중의 모순 특질
예전에 내가 수련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일깨움을 주었던 한 가지 일이 있었다. 이를 통해 모순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인식하게 되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중국 대륙을 탈출해 해외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동수가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대륙으로 돌아가 엄혹한 환경의 시련을 견딜지언정, 해외에서 동수들 간의 모순으로 상처받는 것은 더는 견디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정말로 가버렸다. 제가 이 일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그녀가 돌아간 뒤였기에, 무척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해외 대법제자들은 대부분 대륙의 반박해와 법을 실증하는 환경 속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다. 대륙의 엄혹한 환경 속에서 사부님께서는 여러분의 업력을 주로 박해에 반대하고, 진상을 알리며,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 속에서 순차적으로 소멸되도록 안배하셨다. 그렇기에 동수들 사이는 마치 수족(手足)과 같았고, 반박해 속에서 고난을 함께하며 협조하고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외의 평화로운 수련 환경에서는 우리가 모든 사회적 계층에서 아무리 진상을 알리고 파룬따법하오를 외쳐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고 고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우리를 원만으로 성취시키고자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아직 산과 같은 업력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심성관(心性關)’을 넘음으로써 업을 소멸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듯이, 모순과 마난(魔難) 앞에서는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아야 하며,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도 내주어야 한다. 이것이 모순의 한 가지 형태다. 또 다른 형태가 바로 동수들 사이에서 연화(衍化)되어 나타나는 모순이다. 서로 형님 동생 하며 좋게만 지내서는 안 되며, 상호 마(魔)의 역할을 해가며 서로 업을 소멸해 주어야 한다. ‘당신’의 업력을 한데 모아 ‘그’의 머리 위에 얹어두면, ‘그’가 당신을 향해 펄쩍 뛰며 심지어 책상을 치고 의자를 던지며 대립할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대드는 그 사람이 사실은 우리의 업을 소멸해 주고 제고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닌가? 그는 바로 자신의 어깨로 우리를 받쳐 들고 위로 기어오르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사부님께서 고심스레 해주신 모든 것은 다 우리의 원만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업력을 소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사부님의 고심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모순을 속인들 사이의 ‘시비곡직(是非曲直)’, 속인들 간의 ‘쟁투’, 혹은 속인들 간의 ‘은원정구(恩怨情仇 은혜 원한 사랑 증오)’로 취급해 버린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맺고, 화가 나서 참여하던 항목을 떠나거나 사직하며, 심지어 대륙으로 돌아가 버리기도 한다. 사부님께서 고심하여 안배해 주신 제고의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닦고 심성을 제고하는 이 길에서 견실하게 관을 넘지 못했으니, 이 관은 사부님께서 헛되이 마련해 주신 꼴이 된다.
과거 대륙에서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는, 주변의 동수들이 한동안 모순을 겪지 않으면 안달이 나서 “내가 요즘 왜 ‘관’이 없는지 모르겠다, 사부님께서 나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인가”라며 걱정하곤 했다. 그때 수련생들이 모순을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간절히 구해도 얻기 힘든 것을 대하는 심태였다.
우리는 왜 모순 속에서 이렇게 닦아야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이러한 일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초기에 사부님께서 한 번은 사천 북부에서 화산(華山)을 지나실 때, 수천 년간 수도하던 이들이 사부님을 뵈러 온 적이 있었다. 기차 안에서 사부님께서 곁에 있던 수련생을 가리키며 도인에게 이 수련생이 어떠냐고 물으시자 도인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不可思議)입니다!”라고 답했다.
사부님께서 다시 “당신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시자, 도인은 “우리 중에 비길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됩니다!”라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그들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많게는 수천 년에서 일반적으로 수백 년 이상을 닦았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부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지 불과 2년이 되었을 때이니 수련생들은 기껏 2년을 배웠고, 적게는 고작 한두 달을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도인들은 어떻게 이토록 빨리 닦을 수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매번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깊은 감회에 젖곤 한다. 불과 2년의 수련이 수천 년간 고생스럽게 닦은 도인들보다 나을 수 있다니! 무엇 때문인가? 무엇에 의지한 것인가?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고 가장 지름길인 통천대도(通天大道)를 안배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심성관을 넘는 것이며, 모순 속에서 수련해 제고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1강에서 “당신에게 한 가지 진리를 알려주겠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전법륜》 제4강에서는 심성관을 넘을 때 일거사득의 법리와 그 원인, 덕(德)과 업(業)이 전환되는 연유를 전문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제8강에서도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가장 편리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우주특성에 따라 직접 연마(煉)하므로, 수련함이 가장 빠르고, 가장 가까운 길로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사부님께서는 간곡하게 타이르시며 눈물겨운 정성으로 말씀해 주셨다. 모순 속에서 마음을 닦아야만 가장 빠르게 제고할 수 있다. 심성관이 가장 소업해 준다. 이것이 우리 수련의 정수이며, 정법대도(正法大道) 수련의 진기(眞機)다!
수천 년간 도를 닦은 이들은
첫째 이 진기와 법리를 알지 못했고,
둘째로 이처럼 마음을 닦고 단련할 수 있는 모순 환경이 없었으며,
셋째로 그토록 높은 사부님께서 자신을 지켜봐 주고 성취시켜 주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의 만 분의 일만큼의 행운도 가지지 못했기에, 그저 산속에서 수천 년간 고생하며 부딪히고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끝없는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불과 30여 년의 수련을 하면서도 종종 “왜 아직 끝나지 않는가, 시간이 너무 길다”며 장탄식을 하곤 합니다.
왜 시간이 길게 느껴질까? 우리 마음속에 아직 내려놓지 못한 자식에 대한 정이나 인간 세상의 번뇌와 미련이 실타래처럼 얽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수천 년간 도를 닦은 이 앞에 서서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자녀와 자손들을 기억하십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들 앞에 서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진다. 우리는 이제 어떤 마음을 버려야 하고 스스로를 어떻게 단속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 수련 속에서 우리는 종종 심성관을 이리저리 밀어내고 모순을 기피하곤 한다. 심성관을 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마음을 도려내는 듯 아프기 때문이다. 대법제자들 간의 모순은 사부님께서 우리의 수련 제고를 위해 연화해 주신 일종의 수련 형식이며, 우리가 서로를 제고하도록 마련해 주신 국면이다. 모순 속에는 우리를 향한 사부님의 심혈과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순 속에서 심성을 제고하고 산과 같은 업력을 소멸하여, 우리가 각자(覺者)로서 구비해야 할 심성 표준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과 2년, 혹은 두세 달 만에 수천 년 동안 도를 닦은 이들과 필적하거나 훨씬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고서야 겨우 그 자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는 사부님께서 1992년 법을 전하신 이래 꽉 찬 34년이라는 손가락을 튕길 만한 짧은 세월 속에 수많은 각자로 성취되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너무 길다며 나태해지고 있다.
그 일을 겪은 후로 나는 대륙에서 온 수련생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그들에게 환경이 변했으니 수련에도 새로운 국면이 존재한다고 말해 준다. 우리는 모순 속에서 마음을 닦아 제고하는 것이지, 해외 수련생들이 냉정하고 자비롭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도리어 다른 형식으로 상대방을 받쳐 들어 원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우리 수련 중에서 모순이 지닌 진짜 내포다. 이는 대륙 수련생들이 엄혹한 환경 속에서 나누었던 수족 같은 정을 초월하는 지고무상한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수련의 기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3. 심령과 신체의 동시 정화를 완성하자
‘그런 화가 나는 일들(十年穀子八年糠 직역하면 십 년 묵은 곡식과 팔 년 묵은 겨)’에 대한 깨달음이다.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튼 그녀로 하여금 반드시 닦게 해야 하고, 현재의 우리 일부 수련생들을 포함한 젊은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도 이런 일을 만나게 하는데, 그녀로 하여금 그런 화가 나는 일들을 생각나게 해서, 그녀가 화를 내는지, 내지 않는지를 본다. 옛날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그녀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는데, 아무튼 그녀가 어떻게 대하는지 본다.”(《싱가포르법회 설법》)
과거에 사부님의 이 설법 구절을 볼 때마다, 나는 그저 수련 환경이 없는 노수련생들에게 주신 말씀으로만 치부했다. 자신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겨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심성 제고에 관한 사부님의 법리를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자주 ‘십 년 묵은 곡식과 팔 년 묵은 겨’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수련이 이미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어느 방면에 누수(漏)가 있기에 이 구절이 자꾸 떠오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도 십 년 묵은 곡식과 팔 년 묵은 겨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케케묵은 옛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선입견이나 응어리, 심지어 원망이 쌓여 형성된 고정된 관념이다. 누군가의 이름만 들으면 먼저 마음속에서 그 사람에 대해 내려진 결론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나는 기억 속을 뒤지며 내게 그런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자 정말 있었다! 나는 종이와 펜을 꺼내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며, 내가 과거에 이 사람과 어떤 모순이 있었기에 그런 결론을 내리고 그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돌이켜보았다.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며 대뇌 속의 옛 기억들을 들추어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 성격이 선량해서 뒤끝이 없고 앙금을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는데, 마음 바닥에는 이토록 수많은 지저분한 것들이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단호하게 순정(純淨)하게 만들겠다는 심태로, 그리고 무조건 안으로 찾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과거의 일들을 다시 검토하며 그것들을 완전히 깨끗이 청소하기로 결심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유형을 발견했다.
첫째는 안으로 찾지 않아 넘기지 못한 심성관이었다. 모순이 생기고, 이견이 제기되며, 심지어 질책을 받을 때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왜 내게 이런 문제가 나타났을까?’ 하고 자신에게 먼저 묻지 않고,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여겼다. 안으로 찾지 않으니 자연히 결과가 없었고,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은 채 쌓여 원망이 되었다.
둘째는 스스로 차단하여 아예 넘지 않은 심성관이었다. 모순을 밀어내고 피해 가는 태도를 취하면서, 사람의 이른바 인품과 경지를 핑계 삼아 상대방과 다투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며 경원(敬遠)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속인 사회에서는 이것이 품성이나 교양의 표현일지 모르지만, 수련의 관점에서는 결코 수련이 아니다. 닦지 않은 것이며 사부님께서 마련해 주신 관을 허사로 만든 꼴입니다. 모순과 불만은 고스란히 마음속에 묻어둔 채 말이다.
셋째는 보이지 않는 앙금과 배후의 요소였다. 수련계에는 ‘만나는 모든 이는 옛 인연이다(所遇皆故人)’라는 말이 있다. 당연히 그 옛 인연에는 선연(善緣)도 있고 악연(惡緣)도 있다. 어떤 이는 항목에서 몇 년을 함께 일해도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속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반면, 어떤 이는 처음 만나자마자 오랜 친구처럼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통한다. 여기에는 모두 배후의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료들 간에 소그룹이나 파당을 짓는 것도 대개 이런 인소가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이번 생은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이다. 대법 수련 속에서는 선연도 내려놓아야 하며, 악연은 더더욱 풀어야 한다.
수련의 길에서 우리 각자에게는 이른바 개인적인 호오(好惡·좋아함과 싫어함)가 존재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속에 쌓여있던 케케묵은 옛일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지나간 일들이 재현된다. 그 앙금과 선입견은 우리가 그 사람과 그 일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을 제약한다. 항목을 진행할 때 이것은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 속에서 상호 협력을 가로막는 교란이 되며, 화합해서 함께 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오래된 겨와 묵은 곡식들이 마음속에 쌓여 있으면 바로 우리 수련의 사각지대(死角地帶)가 된다. 그럼 이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다! 그것은 물질로 전환된다. 많이 쌓이면 신체의 어느 부위에 검고 어두운 물질의 덩어리를 형성하게 되고, 계속 존재하면서 부패한다. 결국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병업을 초래해 생사관(生死關)으로 변하게 되며, 그때 가서는 열 배 백 배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소멸해야 한다. 하물며 우리 중에 그 누군가에 대한 선입견을 품은 채 백일비승(白日飛昇)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어떤 수련인도 그렇게 할 수는 없으며, 오직 철저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당시에 우리가 모두 안으로 찾을 수 있었다면 모든 것이 화해되었을 것이며, 마치 한 줄기 맑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마음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이와 관련된 법을 여러 번 말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늘 말하는데, 두 사람이 모순으로 부딪치게 되면 당신들은 서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 두 사람 쌍방에게 모순이 발생하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설사 제삼자로서 이 문제를 보게 되더라도 당신은 마땅히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제고 속에서 돌비맹진(突飛猛進)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싱가포르법회 설법》)
하물며 우리는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당사자다. 안으로 찾지 않고 모순을 회피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제고시키기 위해 질서 있게 안배하신 회피하고 제고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수련은 이제 곧 다음 단계로 진입하려 한다. 우리의 심령과 신체는 아직 진정으로 순정해지지 못했고,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는 문제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신체는 아직 완전히 정백체(晶白體) 상태에 도달하지 못해 엷은 안개가 끼어있거나 검은 그림자가 남아 있다. 속인의 육체를 고에너지 물질로 전면 전환시키는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묵은 곡식과 오래된 겨와 같은 수련의 사각지대를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 《법난(法難)》 경문에서 말씀하신 마지막 15%의 업력을 소멸하는 과정을 완수해야 하며, 심령의 순정과 신체의 순정을 동시에 이루는 정화를 완성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종점에 거의 다다랐다. 구구 팔십일 난 중에서 단 한 가지 난이라도 부족하면 우리는 학점을 이수하지 못한 것이며 불합격입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아직 결속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는 이 생명의 답안지를 계속해서 작성해 나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귀정(歸正)하고 제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아직 남아 있다. 심성은 초월할 수 있으며, 심성이 초월하여 제고되어 올라오기만 하면 모든 물질적 변화는 그에 따라가는 법이다.
돌이켜보면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지 어느덧 34년이 되었고, 우리는 27년의 정법 세월을 걸어왔다. 더 멀리 돌이켜보면 수천 년, 수억 년의 세월 동안 천지가 아득하고 우주가 황량하던 그 시절,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하는 장구한 세월을 우리는 모두 걸어왔다. 그런 우리가 마지막 일세(一世) 몸 뒤에 남겨진 그 사소한 과거의 인연과 인간 세상의 번뇌에 얽매여 이를 내려놓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지막 길을 잘 걸어가야 한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심성 제고와 초월을 지속적으로 완성해, 사부님께 원만의 종점에 도달할 수 있는 합격 답안지를 제출합시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그 종점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사부님을 바짝 따르고 다시 시작해 순정한 심신으로 법정인간(法正人間)의 시대로 걸어 들어가 새로운 사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7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