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대
【정견망 2026년 7월 11일】
모든 사람의 마음속 집착은 모두 불균형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인간의 눈은 사물의 앞면과 표면만 볼 뿐, 그 이면과 내면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사실 균형 있게 운행하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단지 인류 공간이라는 이 층차에서만 보더라도, 겉과 속이 상반되면서도 하나로 통합되어 균형을 이루는 사물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 예를 들어 야자수의 겉껍질은 돌처럼 단단하지만, 그 안은 물처럼 즙이 풍부하다. 용안(桂圓)과 여지(荔枝)의 겉껍질은 울퉁불퉁하지만, 안의 씨앗은 거울처럼 매끄럽다. 레몬과 라임의 겉껍질에는 휘발성 향유가 들어 있지만, 그 안의 레몬즙은 바로 그 기름기를 제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장점과 단점이 동일한 비중으로 존재하는 균형 잡힌 사물들 또한 인간 공간에서 도처에 널려 있다. 심지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이를 알 수 있다.
사람이 잔머리를 굴려 수돗물 속의 녹물을 피하겠다고 물을 가만히 두었다가 그릇 바닥의 물을 버리곤 하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물속의 모든 미네랄 성분까지 함께 버린다는 사실은 모른다. 이 미네랄 성분들은 녹물과 마찬가지로 그릇 바닥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전해질이 부족해지면 온몸의 근육에 힘이 빠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자신에게 돌아와서는 안 될 이득을 손에 넣고 나면, 그와 연결되어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해로운 일들이 마치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온 것처럼 몸에 붙게 된다. 그 이득과 그 해로움은 본래 하나의 사물이 가진 양면이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예로 ‘미식의 즐거움’이라는 일상적인 일을 들 수 있다.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옮겨, 따뜻한 음식 상자를 손에 들고 나오며 기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먹을 복(口福)이 그만큼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결과적으로 집에 돌아와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혀를 깨물고 만다. 혀가 다쳐 고통을 겪으며 자신의 공간장에 있던 일부 업력을 소멸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복으로 전환되어 그 음식을 온전히 즐길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작은 아파트에 가시 돋친 장미를 한 줄 심어두었는데, 드문드문 핀 꽃들의 모양새가 별로 예쁘지 않다. 그런데 하필 가장자리에 심은 독성 있는 영산홍이 모든 관심을 독차지하며 지나치게 화려한 독꽃을 피워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 사실 꽤 괜찮은 일이다. 무엇을 원하든 그 이면의 양면성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좋은 면만 봐서는 안 되며, 나쁜 면 또한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격으로 당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무료로 따라올 것임을 반드시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한다.
사람의 집착을 모두 제거하면, 무슨 일이 있든 없든 상관없게 된다. 어차피 결과는 항상 좋고 나쁨이 반반이니, 결국 서로 상쇄되는 것이 아닌가.
심태(心态)가 균형 잡힌 수련인은 무위(無爲)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할 뿐, 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생각 하나가 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일이 생기면 또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일의 의미는 결국 이해득실이 반반이라는 법칙에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일이 의미가 없다면, 굳이 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무위(無爲)는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3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