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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북미 대법제자

【정견망】

부모님께,

우선 두 분께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들로서 연락을 드릴 때 자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고, 제 신앙이 요구하는 기준에도 위배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저의 신앙 문제로 종종 언쟁을 벌이게 되는데, 제 생각을 글로 써서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상 통화를 할 때 감정에 휩쓸려 평온하고 유효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서로 말을 내지르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먼저 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늘 제 신앙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저에게 어떤 안 좋은 변화가 생겼나요?”라고 여러 번 여쭈었던 기억이 납니다. 두 분을 곤란하게 만들려던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제 스스로도 깊이 고민해 왔고 앞으로도 늘 고민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무신론과 진화론 교육을 받았습니다. 20대까지는 신(神)과 부처(佛)라는 개념을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곤 했습니다.

노자(老子)는 “하사는 도(道)를 들으면 크게 비웃나니,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라고 했습니다. 예전의 제가 정말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처나 신, 초자연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렸습니다. ‘과학이 이토록 발전한 오늘날에 어떻게 저렇게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진리와 진상을 파악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육받은 이성과 논리는 제 삶의 고뇌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부모님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만약 제가 유학을 오지 않고 국내에서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가며 직업을 가졌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확률이 큽니다. 저는 대륙의 수많은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삶은 더 고달팠습니다. 제가 우수하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가졌던 고뇌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현상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프리카나 빈곤 국가의 사람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그러한 것은 정말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서이며, 전부 후천적인 요인 때문일까요?

유학을 온 것 자체도 수많은 인연과 요소가 결합한 결과였습니다. 내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지능은 어떠한지, 다녔던 학교와 어릴 적 경험 등 끝없는 ‘인(因)’들이 모여 지금의 ‘과(果)’를 만들었고, 이 결과는 다시 제 향후 인생에서 무수한 일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제 두 손으로 완벽히 쥔 채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었을까요?

30세가 되기 전까지 저는 종종 ‘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 같은 전통적인 가정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것은 건강하게 자라 공부하고 취업하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다시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어항 속의 금붕어들이 떼를 지어 일정한 범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규칙적으로 헤엄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늘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지만, 본질적으로 이 금붕어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다들 그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회, 학교, 가정, 친구 그리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온갖 관념에 떠밀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헤엄치며 일생을 보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소멸함과 동시에 그토록 무겁게 여기던 모든 것들은 결국 아무런 의미를 잃게 될 터였습니다.

그러다 제 신앙을 만나고 나서 이러한 고뇌와 다소 비관적이었던 생각들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이전에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우주와 인생에 관한 심오한 이치들에 대해서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이치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는, 이를 알게 된 후 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중 일부 변화는 부모님께서도 충분히 느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신체적인 변화입니다. 제 몸은 늘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는데, 이는 두 분이 저를 지극히 보살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직업 특성상 제가 어릴 때부터 사소한 부분까지 아주 꼼꼼하게 신경 써 주셨고, 제가 운동을 좋아하는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점차 나쁜 습관들을 형성해 갔고, 그것들은 은연중에 제 몸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술이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술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유학 생활을 하는 곳은 술에 매겨지는 세금이 무척 높았습니다. 그래서 공항을 지날 때마다 면세 한도에 꽉 차게 술을 종류별로 사서 집으로 가져오곤 했습니다. 한동안은 매일 혼자 위스키 같은 독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의학 저널 《란셋》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알코올의 중독성과 신체 위해성은 대마초나 엑스터시보다 높으며 신체 손상도로만 따지면 담배보다 더 해롭다고 합니다. 수련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저는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습니다. (모르고 먹은 경우나 음식에 들어간 요리용 맛술 등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도박과 카드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행을 갈 때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부근에 카지노가 있는지였고, 카드 게임 시간을 우선적으로 예약해 두곤 했습니다. 카드 게임을 한다는 것은 공기가 아주 탁하고 안 좋은 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새벽까지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그 기간 동안 불규칙하게 식사를 하니 몸에 끼치는 해악은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술과 담배, 도박 등이 왜 나쁜 유혹으로 한데 묶이는지 직접 겪으며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카드 게임을 하면서 접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매우 거칠고 나쁜 언행과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속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전자 게임을 오래 하거나 자극적인 오락 영상을 종일 보는 등 여러 좋지 않은 습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쁜 습관들을 끊어낸 것은 수련이 저에게 가져다준 긍정적인 변화들입니다. (실제로 술을 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사부님께서 명확히 요구하신 수련인의 훈계입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철이 들어 일어난 변화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버지의 술자리와 접대 문제를 조심스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어떤 습관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수십 년 동안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습관이나 관념을 바꾸는 일이 결코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련이 제 정신세계에 가져다준 변화입니다.

이전의 제 머릿속은 늘 수만 마리의 말이 달리는 것처럼 한순간도 쉬지 못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남이 잘사는 것을 보면 질투하며 ‘왜 나는 안 되는가?’ 억울해했고, 직장에서는 경쟁하며 ‘왜 내가 승진하고 연봉이 오르지 않는가’ 투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들이 남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생각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무수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수련하기 전에는 욕설을 입에 담기도 했고 저속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원인을 파악해 보면, 내심 남들에게 돋보이고 싶고 타인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련한 이후로는 이러한 습관들도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다. 남과 다투고 암투를 벌이는 고통,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베푼 만큼 돌려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실의, 남에게 오해를 받은 후 느끼는 억울함 등이 그렇습니다. 물질적인 생활과 어느 정도 연관은 있겠지만, 사회적 지위나 부의 유무를 불문하고 이 고통은 모든 인간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수련한 이후 이러한 고통들은 점차 옅어졌으며, 이제는 제 삶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경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慈悲心(츠뻬이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각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幻)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도리는 수련인에게 요구되는 표준인 동시에, 삶을 더욱 평온하고 기쁘게 만들어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의사가 불치병을 고쳐준다면 환자는 평생 그 의사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마음의 고통을 치유받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치유해 주는 이 힘은 바로 지고한 불법(佛法)에서 비롯됩니다.

부모님, 저는 두 분의 외아들입니다. 저를 키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고, 저를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교육해 주셨습니다. 제가 품을 떠난 후에도 매 순간 저를 걱정하고 염려해 주셨습니다. 자식이 그저 평안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두 분의 유일한 바람임을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타지에 있어 곁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해 마음이 늘 무겁습니다. 하지만 저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부모님께서 거짓말에 눈이 멀어 수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롭게 한 불법과 저희 사부님을 헐뜯으실 때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이 기만에 속아 죄업을 짓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쓴 것은 제 생각이나 신앙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저 제 진심을 전해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부모님께서도 왜 아들이 이토록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길을 선택했는지 온전히 이해해 주실 날이 올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올림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