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
【정견망】
2026년 4월 말, 저예산 조산(潮汕) 방언 영화 《할머니에게 보내는 러브레터》가 개봉했다. 처음에는 상영관 배정이 매우 적었으나, 빠르게 입소문을 타며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불과 두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박스오피스 매출은 예상을 깨고 20억 위안에 육박했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40년대 조산 지역, 현지의 부유한 지주 가문 출신인 예수러우(葉淑柔)와 사회 최하층에서 목수 일로 사방을 떠돌며 입에 풀칠을 하던 정무성(鄭木生)은 신분 격차와 장애물을 극복하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후 재앙을 피하고 처자식의 평온한 삶을 지키기 위해, 1948년 정무성은 어쩔 수 없이 홍두선(紅頭船, 과거 남양으로 가던 무역선)을 타고 남양(南洋) 태국으로 건너가 생계를 도모한다. 이때부터 예수러우는 조산의 고향 땅에 남아 홀로 세 아이를 힘들게 키우며, 매일같이 사랑하는 이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무성은 남양으로 건너간 후 셰난즈(謝南枝)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여관에 기거하게 된다. 과거 한 차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정무성은 목숨을 걸고 그녀의 아버지를 구해주었고, 셰난즈는 이 은혜를 늘 마음속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이후 셰난즈의 가문에 우환이 닥치면서 가경이 한순간에 몰락했다. 1960년, 정무성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비통함에 젖은 셰난즈는 부고 소식을 숨기기로 선택하고 부고장을 사적으로 찢어버린 채, 줄곧 정무성의 어조로 편지를 대필해 고향으로 보낸다. 그녀는 근검절약하고 필사적으로 일하며 무려 18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조산에 있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예수러우의 가족에게 묵묵히 송금하며 그들을 보살폈다. 1978년, 셰난즈는 모든 진상을 밝히려고 편지를 썼으나 안타깝게도 편지가 태풍에 날아가 버리고 오직 사진 한 장만 남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예수러우는 사랑하는 남편이 이국땅에서 다른 가정을 꾸린 것으로 오해하여, 억울함과 서글픔을 품은 채 수십 년을 홀로 인내하며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88세가 된 예수러우는 태국으로 건너가, 마침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셰난즈를 만난다. 반평생의 풍파를 겪은 두 노인이 마주하면서, 수십 년간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오해가 마침내 풀리고 서로는 담담하게 응어리를 풀어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처럼 저예산에 비전문 배우들이 출연하고 홍보마케팅조차 거의 없었던 영화가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우주의 특성인 ‘진·선·인(真·善·忍)’이 속인 층차에서 인간의 감정으로 구현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적절하게 체현했기 때문이다.
속인의 층차는 비록 매우 낮지만 역시 법(法)의 한 부분이며, 인간으로서 정(情)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친정(친족 간의 정), 우정, 애정은 어떻게 해야 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표준에 부합하여 인간의 층차를 안정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유정유의(有情有義, 정이 있고 의리가 있음)’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를 아주 잘 보여주었다. 어떤 이의 훌륭한 평처럼, 이 영화에서는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우며, 친구는 친구답고, 부부는 부부답다. 실로 그러하며, 그들의 언행은 신전문화(神傳文化)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기준을 체현했고 스스로 이를 몸소 실천했다.
* 먼저 ‘진(真)’에 대해 말하자면: 영화 속 젊은 무성과 부잣집 딸 수러우가 서로를 향해 품은 사랑은 진실하며, 남양의 여인 셰난즈가 남양으로 온 무성에게 베푼 도움 역시 진실하다.
* 다음으로 ‘선(善)’에 대해 말하자면: 무성이 불행히 세상을 떠난 후, 셰난즈가 진상을 숨기고 수러우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인간 세상의 대선(大善)을 체현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무성이 사망했으니 비록 그가 셰난즈 가족을 도왔을지라도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와 함께 마지막으로 돈을 한 번 부쳐주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셰난즈가 내린 선택은 참으로 대선이라 부를 만하며, 상인의 층차에서 볼 수 있는 선의 극치라 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인(忍)’에 대해 말하자면: 무성이 남양으로 떠난 후, 수러우는 처녀의 몸에서 백발이 될 때까지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삶의 온갖 고초를 인내했다. 셰난즈 역시 생활의 고통을 인내하면서도 아무런 원망이 없었다. 대인지심(大忍之心)과 큰 사랑이 없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영화는 빛과 그림자의 예술이며, ‘진·선·인’에 부합하는 작품은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다. 선량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 영화에 매료될 것이며, 그리 선량하지 않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상영 시간인 한 시간 남짓 동안은 감화되어 진실한 감정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성공은 겉보기에는 우연인 듯하지만 실은 필연이다. 만약 작년의 영화 《마동뇨해(魔童鬧海)》가 인간 마음속의 마성(魔性)에 영합했기 때문에 흥행한 것이라면, 오늘날 이 영화의 흥행은 천상(天象)의 변화에 따라 정법(正法) 노정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르지 못한 요소와 마의 요소가 대량으로 소멸되면서, 사람 내면의 불성(佛性)이 되살아나고 각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며, 마음속 불성(佛性)이 멸하지 않은 생명은 더욱 그러하다.
수련인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진상을 널리 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그들을 구도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4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