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법제자
【정견망】
속인 중에는 “잠은 자연스럽게 깰 때까지 잔다.”는 말이 있다. 아주 평범하게 들리는 한 마디이지만, 속인이 “잠”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며, 자고 싶은 만큼 잘 수 있어 자연스럽게 깰 때까지 잔다. 속인의 눈에는 이것이 엄청난 일종의 즐거움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깰 때까지 자는 것”을 돈이나 이익만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잠”이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대법제자의 시간은 매우 소중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고, 발정념을 해야 하며, 중생을 구도하는 일도 잘 해내야 한다. 그리하여 많은 동수들은 제한된 수면 시간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능한 한 많이 해낸다.
최근 나는 명혜망에서 동수가 올린 “수련을 처음처럼 하는 상태를 되찾다”는 교류 문장을 보고, 마음의 충격이 매우 컸다. 나는 생각했다. 나 자신도 아침 단체 새벽 연공에 참여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처음 수련하던 때의 상태를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에서 단체 새벽 연공 시간은 아침 4시 20분이다. 제때 일어나 다섯 세트 공법의 연공을 마친 후에는 사부님의 법 한 강을 공부할 수도 있고, 동시에 단체 연공과 단체 법공부의 환경도 가질 수 있다. 만약 꾸준히 해낼 수만 있다면 정말로 일거다득(一擧多得)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해내기란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나는 어쩌다 이토록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나는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퇴근하면 대개 밤 11시 정도이고, 어떤 때는 더 늦을 때도 있다. 1시간 정도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면 기본적으로 이미 밤 12시이다. 씻고 정돈하고 나면 대개 발정념 시간에 가깝다. 발정념을 마치고 나면 나는 가끔 조금 더 발정념을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진정으로 누워서 잠을 잘 수 있게 되기까지는 보통 이미 새벽 1시가 넘었다. 그런데 아침 3시 50분이 되면 나는 또 일어나서 단체 새벽 연공에 참가해야 한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진정으로 잠을 자는 시간은 고작 2시간여밖에 안 된다. 예전에는 나는 내가 수면 시간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더 자든, 조금 적게 자든, 나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일정 기간 동안 나는 매우 뚜렷한 문제를 발견했다. 나는 점점 일찍 일어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것은 나 자신조차 기이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나는 줄곧 아주 잘 지켜왔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나는 연공장에 첫 번째로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알람이 첫 소리를 내자마자 나는 곧바로 일어났고, 따뜻하고 편안한 이불 속을 미련 두며 아쉬워하는 법이 결코 없었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나가고, 자전거를 타고, 곧바로 연공장으로 향했다. 그때는 정말로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없었다. 마음속에는 그냥 한 가닥의 뚝심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 내내 법을 외울 수도 있었다. 곧 바로 연공하고 법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특별히 충만해졌고 또한 특별히 즐거웠다. 그때의 자신은 마치 늘 다 쓰지 못할 정력이 있는 것 같았고, 하루 종일 기운이 넘친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일어나는 것이 이토록 어려워졌는가? 예전의 그 정진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그저 “요즘 너무 피곤하다” “잠이 너무 적다”고 불평만 한다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나의 수련 동력은 무엇인가? 나는 내 수련의 이 수많은 세월의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 보았다. 나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애초에 나는 왜 대법에 들어왔는가? 어떤 힘이 나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견지해 오게 했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수많은 세월 동안 수련계를 떠나지 않게 하였는가? 나는 한 수련인의 많은 표현의 배후에는 사실 모두 하나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매 동수마다 각자 닦아버려야 할 것이 있고, 또한 각자가 가장 넘기 힘든 관이 있다.
어느 날, 나는 사부님의 《전법륜》 중 한 단락 법을 공부했다.
“그가 기타 마음(心)ㆍ명(名)ㆍ이(利) 이런 마음을 제거해 버리면 그 역시 공이 자란다. 그러나 그는 쟁투하는 마음을 좀처럼 제거하지 못하며 비교적 늦게 제거한다.”
내가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쟁투하는 마음을 좀처럼 제거하지 못하며”라는 이 한 구절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곧 생각했다. ‘왜 이 마음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는가? 왜 그것은 심지어 한 사람의 수련 중 동력이 될 수 있는가? 한 사람이 남보다 더 강해지려 하고, 남을 이기려 하며, 남을 넘어서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여 돌파하려고 하는데, 그가 이기고, 남을 넘어섰을 때, 또 일종의 만족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나의 수련 동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수많은 세월 동안 수련의 길을 걸어가게 했는가? 나는 내 수련 상태가 가장 좋았던 그 시절들을 회상하기 시작했고, 그때의 나는 과연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를 회상했다. 천천히, 나는 하나의 문제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졸음(困)”이었다.
나는 발견했다. 자신이 지금 아주 두려워하는 것은 출근할 때 그 일종의 “졸음”의 느낌이라는 것을. 아침에 일어나는 것 그 자체는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직장에 도착한 후, 수면 부족으로 인해 생겨나는 그 머리가 띵하고, 멍하며, 신체가 괴로운 느낌이다. 나는 이 느낌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나는 이전에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이러한 “괴로움”을 자신의 진정한 느낌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연공은 최고의 휴식이며, 피로를 빠르게 해소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왜 줄곧 “아침에 일어난 후의 괴로움” “수면이 적은 후의 괴로움”을 전부 “충분히 자지 못했기 때문”으로 귀결시켜 왔는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혹시 곤마(困魔)가 내게 준 느낌을 진정한 자신으로 여겼던 것이 아닐까? 만약 내가 괴로움을 느끼기만 하면 “이것은 내가 휴식하라는 것이다”라고 여기고, 곧바로 그것을 만족시켜 주며; 졸음을 느끼기만 하면 “나는 반드시 자야 한다”고 여기고, 곧바로 그것을 만족시켜 준다면 —— 그렇다면 내가 만족시킨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것은 나로 하여금 아주 간단한 한 가지 예를 떠올리게 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 생각이 날 때(담배 중독) 아주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지게 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만족을 얻어야 하는 것은 담배 중독이지, 진정한 내 자신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장기간 “나”와 “담배”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담배 중독의 수요를 끊임없이 만족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졸음이 오면 나는 “나에게는 잠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안일함이 오면 나는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괴로움이 오면 나는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긴다. 만약 줄곧 이렇게 계속 나아간다면, 진정한 나 자신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안일한 마음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구실을 만들어 줄 것인가?
나는 또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렸다.
“무릇 속인사회 중에서 당신에게 좋은 점을 얻게 하는 것은 모두 마(魔)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수련인이 만약 점점 안일함을 좋아하고, 점점 고생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점점 정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실상 끊임없이 저 안일한 마음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늘 자신을 좀 더 편안하게 하고, 좀 더 홀가분하게 하려고만 생각하고, 고생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돌파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소업할 기회가 적어지고 심성을 제고할 기회 역시 적어진다.
수련인이 만약 줄곧 안일함을 선택한다면, 또 어떻게 자신을 향상할 것인가? 또 어떻게 진정으로 사람의 것들을 제거할 것인가? 나는 또 아주 재미있는 한 가지 현상을 발견했다. 어떤 때는 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연공하러 가지 않아도 여전히 똑같이 졸리다. 오늘 조금 더 잤다고 해서 곤마(困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많이 잘수록, 어떤 때는 도리어 더욱 자고 싶어진다. 사람의 신체와 사람의 관념은 바로 이렇다: 조금 적게 자면, 괴롭다고 느낀다; 많이 자면, 여전히 계속 자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수련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진정으로 돌파해야 할 것은 “졸음”이 아니라, 바로 관념이다. 나는 점점 인식하게 되었다. 진정한 문제는 어쩌다 내가 도대체 몇 시간을 잤는가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도리어 이것이다: 나는 이 졸음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이 고생을 어떻게 대하는가? 괴로울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만약 내가 괴로움을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여긴다면, 그것에 타협하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안일함을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끊임없이 그것을 만족시키게 될 것이다. 시간이 오래 흐르면, 사람의 정진하려는 마음은 조금씩 갉아 먹히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진정으로 자신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오후에 휴식하는 일부 시간을 이용하여 발정념을 하며 사악한 요소를 청소했다. 다른 시간은 가급적 법을 공부하는 데 이용했고, 그것도 대량으로, 체계적으로 법을 공부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로 홀가분하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 나는 몇 차례의 매우 뚜렷한 사상 투쟁을 겪었다. 왜냐하면 엎드리기만 하면 바로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이 얼마나 편안한가! 잠시 피로를 떨쳐버릴 수 있고, 잠시 저런 괴로운 느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목소리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더는 이렇게 계속 나아갈 수는 없다.”
나 역시 일찍이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럼 한숨 자볼까, 조금 더 자면 좀 나아지는지 보자.’
하지만 사실은 내게 알려주었다, 잠을 많이 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두 번 거친 후, 나는 마침내 이 교란의 일부 표현들을 똑똑히 보게 된 것 같았다. 나중에, 나는 단호하게 더 이상 이것에 타협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나는 심지어 베개조차 가져오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법공부를 하고 발정념을 했다. 이틀이 지난 후에, 나는 변화를 보게 되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아주 짧은 시간임에도 상태가 의외로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곤마의 방해가 단숨에 아주 많이 약화된 것 같았다. 법공부할 때 더 이상 그렇게 졸리지 않았고, 게다가 더욱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힐 수 있었으며, 법도 천천히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발정념을 할 때 역시 예전처럼 몽롱하지 않았다. 가장 뚜렷한 느낌은 바로 이것이었다: 머리가 아주 청성해졌다. 그 청성함은, 마치 사상 공간을 단숨에 확 열어젖힌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진정으로 체감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부족한 것이 시간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부족한 것은 어쩌면 하나의 견정한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관건적인 순간의 한 번의 선택은 정말로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이 어쩌다 돌파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장 괴로운 그 순간에 타협해 버렸던 것이다.
오늘 조금 타협한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
내일 또 조금 타협한다.
“내일부터 시작하자.”
며칠이 지나면 또 “요즘 일이 너무 바빠.”라고 타협한다. 시간이 오래 흐르면, 내 자신은 점점 “나는 정말 해낼 수 없다”고 믿게 된다. 사실, 어쩌다 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선택권을 안일함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법을 얻었을 때 그 초심을 되찾기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비로소 발견했다. 내가 진정으로 돌파해야 할 것은 아마 단 한 번도 “아침 기상”이라는 이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도리어 “잠” 배후에 숨겨진 안일한 마음이었다. 애초에 처음 법을 얻었을 때, 나는 왜 그토록 정진할 수 있었는가? 왜 매일 그토록 큰 동력이 있었는가? 왜 연공하고 법공부하는 것 모두 즐겁다고 느꼈는가? 왜 조금 고생해도 고생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는가? 그때의 자신은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수련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법공부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대법제자가 응당 해야 할 일을 잘 해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의 관념은 점점 더 많아졌고 고려하는 것 역시 점점 더 많아졌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
“내일 또 출근해야 해.”
“조금 적게 자면 신체가 견디지 못해.”
“오늘 상황은 특수해.”
“오늘 좀 쉬어도 관계없어.”
이 말들은 들어보면 모두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한 수련인이 늘 자신을 위해 구실을 찾는다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진하려는 마음은 천천히 안일함에 의해 대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체감하는데, 수련을 처음처럼 하는 것은 아침 기상, 법공부 견지 같은 이러한 표면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것뿐만이 아니며, 더욱 중요한 것은 애초에 법을 얻었을 때의 그 순수하고 확고하며 정진하는 마음을 되찾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홍음 2》 〈견정(堅定)〉에서 말씀하셨다.
“큰 난 중에서 견정해야 하나니
정진의 뜻은 접을 수 없도다”
예전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그저 이 구절에 아주 큰 힘이 있다고만 느꼈다. 지금 다시 읽으니, 도리어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다.
수련 길 위의 “어려움”은 반드시 모두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가장 큰 관은 바로 자신의 관념이다. 우리가 마난을 자신으로 여기고, 안일함을 자신으로 여기며, 우리를 교란하는 수요를 내 자신의 수요로 여길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에 타협하게 된다. 반면에 우리가 가장 괴롭고 가장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의 정념을 지켜내며, 그것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것에 타협하지 않을 때, 어쩌다 돌파는 바로 그 일념 사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점점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진정으로 이겨내야 할 것은 “졸음” 그 자체가 아니라, 졸음 배후에서 정진을 포기하고 안일함을 선택하게 만드는 그 관념이라는 것을. 우리가 끊임없이 법에서 자신을 제고하고, 끊임없이 사람의 관념을 전환하며, 안일함과 나태함을 제거하고, 애초에 법을 얻었을 때의 순수함과 정진을 다시 되찾을 때면, 어쩌면 우리는 걸음걸음 진정한 나 자신을 되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나 역시 무엇이 “수련을 처음처럼 하기”인지를 더욱 명백히 알게 되었다. 시간을 처음 법을 얻었던 그날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 마음을 처음 법을 얻었을 때의 상태로 다시 되돌리는 것이다. 그 마음은 잃어버릴 수 없다. 그 정진은 잃어버릴 수 없다. 대법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은 더더욱 잃어버릴 수 없다. 앞으로의 수련 길에 또 얼마나 많은 관이 있든, 얼마나 많은 마난이 있든, 결코 우리가 정진을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법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기연인가; 오늘날과 같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
내 생각에, 진정으로 “수련을 처음처럼 하기”란 바로 자신을 마주하는 매 순간마다 모두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다.
“애초의 나는 왜 대법에 들어왔는가?
애초의 나는 왜 그토록 정진할 수 있었는가?
오늘의 나는, 여전히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없다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만약 동요했다면, 다시 확고해져야 한다. 만약 해이해졌다면, 다시 정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걷는 것은 바로 생명의 본진(本真)으로 복귀하는 한 갈래 길이기 때문이다.
원컨대 나 자신도, 또한 모든 동수들도, 모두 이 만고에 만나기 힘든 기연을 소중히 여겨, 법 에서 끊임없이 제고하고, 마난 중에서 확고하며, 수련 중에서 애초 자신을 되찾고, 마지막 수련의 길을 잘 걸어 나가기를 바란다.
